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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팍 Feb 15. 2022

아이는 어떻게 내 딸기우유를 찾아냈을까?

아이의 시선에서 본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엄마, 버섯에 눈이 내렸어~~~~


주방에서 뚱땅뚱땅 요리 중에 갑자기 무슨 소리지?? 오늘 눈 안 왔는데??


어지러운 주방을 둘러보니 버섯이 눈에 들어온다. 냉동실에서 꺼낸 버섯에는 살얼음이 끼어 정말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발상에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이건, 눈이 아니라 얼음이야! 냉동실이 영하로 내려가면서 그에 따른 온도 차이로... 블라블라'가 떠올랐지만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 정말~~ 버섯에 하얀 눈이 쌓였네~~^^




육아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또는 육아를 조금 더 쉽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을 이렇게 내리고 싶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아이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대화하는 것


이를 위해, 약 25권의 육아서를 읽고 아이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해주고 있으며, 아이가 원하는 놀이를 주도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맞춰주고 있다. 현실은 놀아줄 틈을 내기도 힘들고, 고집부리는 아이 앞에서 인간의 본성대로 소리치기도 하지만 늘 생각이 깨어있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내게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자만심을 일깨워 준 일이 발생했다.


냉장고에는 나만의 비밀 공간이 있다. 냉장고 맨 윗 칸인데 주로 아이의 반찬을 두고 뒤편에는 아이의 간식을 숨겨둔다. 숨겨두는 이유는 아이가 볼 때마다 무제한으로 먹으려 하기 때문이다. 간식만 먹으면 배가 이상하게 불러 끼니를 제대로 안 먹고, 그러면 다시 배고파져서 간식만 찾게 된다. 또는, 시판 간식엔 아무래도 설탕이나 화학물질, 합성향료 등이 섞여 있을 것이고 또는 매일 주스를 먹었는데 양치 거부가 심해 조금 내려놓았더니 초기 충치가 보인다 하여 '건강 간식'이 아닌 것들은 퍼주진 않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는 곳곳에 숨겨둔 간식을 매의 눈으로 스캔 후 각 장소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주스 두는 곳, 과자 두는 곳, 빵 두는 곳, 요플레 두는 곳 등! 심지어 뚝 떨어진 간식은 어떻게 알고 잘 찾지 않고, 새로 사 둔 간식은 정확히 알고 며칠 동안 찾곤 한다. 냉장고에 사 둔 요플레 한 세트를 순식간에 다 먹어치운 뒤 하나가 남았었다. 며칠이 지나 나조차 잊고 있었는데 냉장고 문을 열자 아이가 금세 외친다


"엄마! 요플레~~~~ 요플레 주세요~~~~~!"


아 맞다! 요플레가 있었네? 하며 요플레 간식을 주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딸기우유를 사두었는데 하루 이틀 사이에 모조리 다 먹어치우고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1주일 정도 지난 후였다. 나만의 냉장고 비밀장소에 숨겨두었는데 나조차 보이지 않으니 또 잊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아이가 갑자기 또 외친다.


"엄마~~ 나 딸기우유!! 딸기 우유 주세요~~!!"


응? 딸기 우유가 있었나?? 하나 남은 딸기우유를 발견하고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의 기억력이 이렇게 좋단 말인가? 아이도 분명 1주일간 찾지 않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묘한 추리력이 발동했다. 분명 불특정 한 맛있는 걸 달라고 조르던 아이가 냉장고 문을 열고 나니까 '딸기우유'를 외친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냉장고 맨 위칸은 아이의 키에서는 절대 보일 수 없는 매우 높은 위치이며, 반찬통 뒤에 가려져서 평소에 내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조차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높이도 높을뿐더러 이렇게 뒤에 꼭꼭 잘 숨겨져 있어서 나도 찾기 어려운 곳인데... 아이는 어떻게 딸기우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1주일 전 장 볼 때 구매한 전체 숫자를 기억했다가 하나씩 먹으며 뺄셈을 해서 남은 개수를 안 것일까? 그렇게 천재란 말이야? 만일 그렇다면 1주일 간 간식이 남아있을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아이의 키 높이로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아이의 키에서 쳐다보니... 아뿔싸. 딸기우유가 '날 데려가세요' 하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너무나 선명하게 또렷이 잘 보였다. 요플레도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 엄마의 비밀 창고는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 성인이 된 후 늘 냉장고를 위에서 내려다보았지, 한 번도 아래에서 올려다본 적이 없었다. 아래에서 쳐다볼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타인의 관점에서 아무리 생각한다고 한들, 내 시선과 판단은 여전히 내 입장에서 내 눈높이에서 출발할 뿐이었다. 수십 년간 쌓인 경험, 관념, 생각들이 나라는 울타리로 꽁꽁 둘러싸여 있는 걸 모르고, 울타리 안에 서서 타인의 입장에 서 보았다고 자만한 걸 아닐까.






나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진정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는가?

타인의 입장에 온전히 서 보았는가?

나와 다를 땐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건 아닌가?

틀렸다고, 이상하다고 치부한 건 아닌가?

.

.

.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니 그제야 아이의 시선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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