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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팍 Oct 14. 2021

엄마는 떨어진 거 주워 먹어

아이를 키우며 가장 반복적으로 많이 한 일이 있다면 기저귀 갈기와 밥차리기다. 만 2년을 기준으로 5,000번 이상 기저귀를 갈았고(1년 차 × 하루 10번, 2년 차 × 하루 5번 기준), 밥 차리기는 2,000번을 했다. (3끼 × 2년) 뭐든 수백 번, 수천번을 하면 달인이 될 텐데 살면서 이렇게 똑같은 일을 5,000번이나 한 적이 있었나? 내게 숨겨진 '꾸준함'의 저력을 느끼며,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5,000번의 시도라는 숫자가 새삼 의미 있게 다가온다. 게다가 혹시라도 아이에게 해 준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최소한 나중에 수치로 증명은 할 수 있다. 5,000번의 기저귀를 갈아 준 노고는 있었다고 말이다.


이외에 가장 많이 한 일을 떠올린다면 단연 떨어진 음식과 수저 줍기다. 7개월 무렵부터 '자기 주도 이유식'이라고 하는 아이 스스로 먹게 하는 걸 시도했는데 엄청난 인내심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손과 숟가락으로 먹기 시작한 아이는 먹는 양과 흘리는 양이 비슷했고 수없이 많은 음식을 떨어뜨리고 입과 옷에 범벅으로 묻히며 최초의 먹는 즐거움을 알아갔다. 나는 매 끼니 옷을 갈아입히고 걸레질을 하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스스로 밥을 먹는' 그날이 오길 기다리며 인내했다. 조금 더 크자 제법 숟가락과 포크로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끼니마다 음식은 물론이고 수차례 수저를 떨어뜨렸다. 나는 '이삭 줍는 사람들'처럼 묵묵히 허리 숙여 줍기를 수백 번 이상 반복했다. 그러다 돌이 지나고 16개월이 되자 어른들처럼 젓가락을 달라고 하더니, 그때부터 아이는 아이용 젓가락으로 스스로 밥을 먹었다. 수 없이 흘리고 떨어뜨리는 과정을 1년간 반복한 아이의 시도와, 끼니마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떨어진 식기류를 주워 준 엄마의 노력, 식탁 주변 바닥에 찍힌 영광의 상처들의 하모니가 더해져 아이는 스스로 밥을 먹는 법을 터득했고 엄마는 생각보다 빨리 광명의 날을 맞이했다.



음식을 떨어뜨리는 다반사의 일상 속에 아이가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경우도 허다했다. 옷에 떨어진 반찬을 집어먹거나 바닥에 흘린 과일을 집어먹기도 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과일을 순식간에 다시 집어 먹으려고 할 때마다 재빨리 막으며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잠깐!! 떨어진 건 엄마가 먹을게! 넌 항상 좋은 것만 먹어!



이 말을 뱉는 내 기분은 오묘했다. 어른으로서 떨어진 걸 먹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나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딸로 컸고 한 인간으로서 좋은 음식과 좋은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심지어 임신했을 때 시어머니께서 ‘항상 예쁘고 좋은 것만 먹어야 한다 ‘고 하시며 가장 예쁘고 좋은 과일만 먹이셨다. 떨어진 건 손도 못 대게 하셨다. 그런 기억들은 어느새 추억이란 이름으로 멀어지고, 나의 현실은 아이가 먹을 새라 못난 것을 냉큼 주워 먹고 있었다. 어떤 본능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리고 소중한 아기에게 깨끗하고 ’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이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 아이의 먹기 본능으로 뻗는 손보다, 더 빠르게 손을 뻗으며 떨어진 음식을 가로챘다. 그때마다 오묘한 기분과 함께 위의 문장을 외치며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항상 떨어뜨린 과일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아이가 음식을 집어 내게 건네주며 말한다.


“떨어진 건 엄마가 먹어~”

“으.. 응? 고.. 고마워”    


순간 당황함을 느꼈지만, 늘 떨어진 것을 먹겠다고 달려드는 엄마의 마음을 알았는지, 아니면 이제 ‘떨어진 것은 엄마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는지 나를 챙겨주며 과일을 건넸다. 고마운 일인지 좋아할 일인지 아리송했지만 엄마의 반복되는 말과 행동을 통해 아이는 확실하게 학습된 것이다. 떨어진 것은 엄마에게 줘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는 어디까지나 엄마에게 배운 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기준을 잡아가고, 그에 따라 행동할 뿐이었다.


한 번은 아이가 아빠에게 요플레를 먹여주는데 아빠가 몇 번 먹다가 안 먹겠다고 하자 아이가 아빠에게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아빠, 다 먹어야지 튼튼한 어린이가 돼!”    


우리는 폭소를 터뜨렸다. 자신도 모르던 말버릇과 행동이 거울 보듯이 고스란히 드러난 현장이었다. 또 한 번은 아이가 스스로 신발을 신고는 갑자기 박수를 치며 “천재다 천재!!!”라고 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동안 우리가 아이 혼자 신발 신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해 ‘천재’라고 손뼉 치며 좋아했던 것이다. 아이는 그 상황에서 ‘천재’라는 단어를 익히고 그 단어가 쓰여야 할 상황임을 학습한 것이었다.






아이의 인지발달 모습을 보면서 어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내가 하는 말과 행동들을 통해 아이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세상을 편견으로 바라본다면, 아이는 그게 기준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배우게 될 것이다. 내가 만일 누군가를 밀치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사람을 밀쳤을 때는 ‘사과하지 않는 것‘이라고 배워갈 것이다. 내가 만일 웃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함부로 대한다면, 아이는 그게 옳은 것인 줄 알고 똑같이 행동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일회용품을 당연하게 쓰면, 아이도 그렇게 자랄 것이다. 내가 가진 기준에서 비롯된 모든 행동들이 아이에겐 전부가 되어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워가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왜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론의 진정한 이유가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곧 나의 거울이었다. 아이가 긍정적인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 긍정적으로 생각해 ‘라고 주입할 게 아니라 내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나와 닮은 모습으로 자라 있을 것이다. 


아이 덕분에 내가 조금 더 멋진 어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아이 덕분에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바라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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