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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팍 Sep 06. 2021

워킹맘의 피로를 녹여버린 아이의 한마디


"여보, 분홍색 화장품 버릴게"

"콩물국수 엎고 치약 벅 화장품 범벅ㅠㅠ"



하고 있는데 집에서 육아 중인 남편이 갑자기 내 화장품을 버린다고 문자가 왔다. 화장품과 거리를 둔지도 오래되어 순간 어떤 제품인지 몰랐지만 긴박함이 느껴진 문자에서 '그게 무엇이든 버리라'라고 답장했다. 뒤이어 온 문자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났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아기는 남편의 콩물국수를 엎어버리고 남편이 치우는 사이 방에서 치약을 이불에 범벅으로 묻히 더니 남편이 이불 빨래를 하는 사이 나의 파운데이션으로 남아있는 이불마저 화사하게 색칠해 버렸다. 혼난 아이는 소파로 달려가 잉잉대며 엎드렸는데 손에 남아 있던 파운데이션이 소파와 커튼에도 묻고 말았다.


남편은 이불 3개와 소파 커버, 인형, 커튼까지 쓸고 닦고 손빨래, 세탁기 빨래를 하며 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육아와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싶었지만 내 발은 회사에 묶여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행사 때문에 야근을 해야만 하는 날이다. 사무실에 앉아 멀리서나마 울고 싶을 것 같은 남편에게 위로 텔레파시를 보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 역시 긴 하루를 보냈다. 왕복 2시간의 출퇴근 시간까지 포함하니 집을 나온 지 꼬박 15시간 만에 다시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침형 인간도 아닌데 겨우 눈을 떠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밤 10시에 다시 집에 오니, 퇴근길엔 아늑한 집에서 빨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내 몸이지만 내 마음대로 쉴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이가 깨어 있다면 제2의 육아 출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잠들 때까지 내 휴식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웃긴 것은 아이를 재우다가 먼저 잠드는 날이 더욱 많다는 것이다. 하루 2번 출근하는 워킹맘게 피로는 참 잘 어울리는 단어다.


마음으로는 깨어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싶지만, 몸으로는 잠들어 있는 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공존하며 살금살금 집에 들어갔다. 불 꺼진 집에서 아이를 재우고 있 남편의 속삭임이 들렸다.


'아는 척을 할까? 아님 다른 방에 숨어있을까?'

내 집에서 도둑처럼 숨어있을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며 아이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다~ 엄마~~~!"

환하게 웃는 아이 앞에 워킹맘은 털썩 주저앉아 간신히 남은 힘을 쥐어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26개월 아이가 갑자기 내 곁으로 오더니 내 볼을 양손으로 지긋이 감싼다. 그리곤 내 얼굴을 바라며 또박또박 얘기한다


엄마..... 예쁘다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말에 나는 쿵하고 말았다. 작고 앙증맞은,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손으로 내 볼을 감싸 안아주는 스킨십과 예쁘다 표에 그간의 고생이 사라지며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힘든 하루에 씻겨진 화장기 없는 민낯 얼굴에 땀과 피곤으로 얼룩져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예쁘다고 해주다니.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내느라 '예쁨'과는 멀어진 지 오래인데. 내 얼굴에 연지곤지 찍을 시간에 아이 반찬 하나라도 더 만들고, 아이를 씻기고 돌보느라 내 머리는 감을 시간이 없어 질끈 묶기 일쑤고, 한가롭게 옷을 고를 시간이 없어 손에 집히는 대로 편한 옷만 찾아 입고,  물건을 쇼핑할 시간에 아이 기저귀를 쇼핑하고, 나를 가꿀 시간에 아이에게 책 한 권이라도 더 읽어주느라 나를 돌보지 못한 2년이었다.


2년 새 아이는 누구보다 밝고 예쁘게 자라났지만 엄마는 자주 듣던 '동안'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아줌마'소리를 들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위축되어 있었다. 남편에게조차 예쁘단 말을 들어본 기억이 언제 적인지 가물가물하다. 지만 아이만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라면 나는 어떻든 상관없었다.


그런 내 아이가 내 모습을 예쁘다고 해준다. 엄마의 고군분투를 다 이해 하노라는 뉘앙스로, 엄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예쁘다' 포근히 안아준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온 엄마의 삶이 아름답다고 예찬한다. 지친 표정 역력한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변하는 순간이다. 늘 하루, 지난 한 주간의 피로가 눈 녹듯이 취를 감춰버린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아이 눈에 가장 예쁜 엄마가

아이 눈에 가장 멋진 아빠가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예쁘다는 표현으로 아이의 마음을 가득 담았다.

예쁜 엄마,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

.

.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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