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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우주 Aug 06. 2022

가장 강력한 터부 ‘죽음’

17  Ⅱ. 죽음에 대하여 ③

죽음은 우리 일상에서 가장 이야기되지 않는 주제다. 누구나 죽지만 누구도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살만큼 살다 편안히 죽어도, 늙어 병들어 죽어도 죽음은 피하고 싶은 주제이며 누군가 사고로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면 당사자는 물론 주변인들에게 죽음은 더욱 불경한 것이다. 죽음은 도처에 존재하지만 외면받는다. 죽음은 두렵고 불온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 뒤에 따라오게 마련인 상실감에 대한 두려움도 죽음을 애써 외면하게 하는 이유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의 죽음은 더 그렇다.


우리는 죽음을 피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혐오한다. 죽음 혐오는 일상에서 비이성적인 지경으로 나아간다. 죽을 () 발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숫자 4 기피하는 현상이 그렇다. 건물 엘리베이터 숫자에 4 대신 F 표기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인데, 죽음이란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싶다. 죽음에 대한 일상적인 터부는 현실에 집중할  있도록 인간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 ‘죽으면 끝인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하는 식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은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터부는 죽음이 알 수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지만 한번 죽어본 인간은 없을뿐더러 죽기 전까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가급적 피하려는 것도 이해가 된다. 건강한 사람 대부분 죽음을 아주 먼 이야기로 느낀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죽음은 매우 가까이 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 운 좋게 천수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오늘 당장 비명횡사할 수도 있는 게 알 수 없는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더 죽음이 무섭고 피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삶의 유한성은 오늘을 충실히 살도록 하는 강력한 동인이다.


무턱대고 죽음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미지의 영역인 죽음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삶에서 두려운 것, 어려운 것을 마주하는 용기가 대개 그렇듯 죽음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은 온전한 삶,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는 힘을 줄 것이다. 내 고양이가 준 가장 큰 선물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은 무엇일까. 심장이 뛰지 않고 호흡 활동이 멈추는 것, 그래서 뇌와 다른 기관들의 기능도 멈추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죽음의 정의다. 심장박동과 호흡운동의 정지, 나아가 개체를 구성하는 모든 조직 세포의 기능이 정지되는 것이 생물학적인 죽음의 정의다.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상태, 임상적으로 생명체의 활동과 기능이 영구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를까. 임종의 순간 죽어가는 이는 무엇을 경험하고 느낄까. 질병이나 노화, 사고, 급작스러운 심장의 정지, 상해, 자해 등 죽음에 이르는 원인은 다양하다. 그 발원이야 어찌 됐든 죽음에 이르는 일은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는 것일까. 고통의 절정에 마침내 죽음이 찾아오는 것일까. 그리고 죽음과 동시에 인간은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일까.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숨과 함께 뇌의 활동이 멈추면 의식이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모든 게 끝나는가. 마지막 숨이 빠져나가고 육신의 기능이 멈추고, 감각과 의식이 사라지면, 모든 게 무(無)가 되는 것일까. 죽은 생명체가 남기는 것은 차게 식은 육신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혹은 어릴 적 어느 영화나 만화에서 본 것처럼 영혼이라 부를만한 게 있어, 죽고 난 몸에서 ‘꼬마 유령 캐스퍼’ 같은 둥그런 혼령이 빠져나가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것일까.

Casper the friendly ghost - Puss N'Boos 편

나는 종교가 없고 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죽은 뒤의 내세(천국과 지옥)나 윤회 등 주요 종교들이 제시하는 죽음관에 대해선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을 따라 성당을 다녔지만 머리가 굵어진 뒤로는 내 나름의 판단에 따라 유일신 하느님도 사후세계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살았다. 누군가 종교를 물으면 “독실한 무교입니다”라는 식으로 답해왔다.


다만 생명의 영적인 측면에 대한 의문은 없지 않았다. 영혼이라 부를만한 것이 실재하는지 모종의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인간을 구성하는 어떤 영적인 차원, 뇌의 작용인 의식(consciousness)과는 다른,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는 확정적 표현 대신 ‘의문은 없지 않았다’는 식의 어색한 문장을 사용한 것은 어쨌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거나 긍정하는 것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21세기의 흔한 물질론자,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겠다. 종교나 미신보다는 이성에, 믿음보다는 지식에 균형추를 두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10년 넘게 가진 직업은 의심하는 게 일이라 누군가의 주장이나 견해를 잘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의심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묻고 또 묻고,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이 나와야 고개를 끄덕이는 편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유기적인 존재로, 뇌의 작용으로 인한 의식과 지각이 인간성의 핵심이지만, 이외에 인간을 이루는 영적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인식을 갖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죽음, 즉 심장 박동과 호흡이 멈추면 뇌와 장기의 활동이 곧 정지되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라 생각했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의식을 만드는 뇌와 생명활동을 위한 몸의 세포에 산소 공급이 끊겨 생명체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멈춘 생명활동은 다시 깨어나지 않는다. 즉 불가역성, 돌이킬 수 없는 생명활동의 정지가 죽음이다. 죽음은 번복될 수 없으며, 한 존재의 영원한 끝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적인 차원, 영혼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는 진지하게 궁리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죽음은 보이는 대로 한 생명체의 완전한 소멸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미미에게서 마지막 숨이 빠져나갔을 때 아이의 삶은 최종적으로 완결되었고, 사랑하는 존재가 완전히 소멸했다고 생각했다. 견디기 힘들게 비통하고 허무했지만, 죽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Dave Hoefler (unsplash.com)

나는 죽음을 전혀 몰랐다. 아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죽음에 대해 탐구하면서 나의 죽음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여전히 종교는 없다. 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서양 속담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게 됐지만, 신이 있다면 우주와 생명체를 굴러가게 하는 질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생명체의 영혼 혹은 육체와 분리되는 의식과 사후세계에 대해 ‘지식’을 갖게 됐다. 믿음이 아니라 지식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것들이 실재한다는 강력한 경험 증거와 과학적인 연구 성과가 쌓여있고, 이를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부분에서 뒤로가기를 누를지 모르겠다. 고양이의 죽음으로 이성이 마비됐다거나 갑자기 웬 신비주의에 빠졌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극도의 상실감을 경험한 뒤 판단력이 어두워져 미신의 세계에 빠진 한 집사의 허무맹랑한 주장, 혹은 소망이 투영된 믿음에 불과한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 자기 분야에서 바쁜 일상을 사느라 몰랐을 뿐,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고, 임사체험(근사체험)이나 체외이탈 같은 매우 비과학적으로 들리는 현상은 권위의 의학 학술지들이 다루는 연구 분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 도서관에는 별도의 섹션이라고 할 만한 규모로 죽음학 책들이 서가를 그득 채우고 있었다. (뒤늦게 석사과정을 밟고 있어 양서가 가득한 대학 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죽음의 과정부터 임사체험(근사체험), 윤회, 환생, 영계(靈界) 등 ‘과학’을 애호하는 현대인들에게 얼토당토않게 들릴, 하지만 죽음의 다양한 측면과 사례, 그 너머의 세계를 연구한 책들이 가득 쌓여있어 놀랐다.


아이가 죽은 뒤 툭툭 털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내 품에서 생의 마지막 숨을 내쉰 한 생명체가 맞이한 최후, 지금은 한 줌 재가 되어 곁에 있는 내 아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렀고,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된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망자에 대한 축원과 덕담도 나를 부추겼다. 흔히 오래 함께 한 반려동물이 죽고 나면 사람들은 고통 없는 곳에서 이제 행복할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만날 것이다 등의 말로 서로를 위로한다. 그저 의례적인 축원이라 생각했던 그런 문구들로 나도 위로를 받았다. 또한 실로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나는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죽음과 동시에 한 존재는 완전히 소멸한다고 생각하고 말해 왔다.

 

그런 내가 앞서 인생을 지배해온 죽음관에 눈을 질끈 감고, 내 고양이만은 좋은 곳으로 돌아갔으며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위로받거나 소망할 수가 없었다. 죽음을 향한 표리부동 상태랄까. 아이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그저 마음으로, 말로 언젠가 내가 죽으면 우리는 서로 만날 것이라고, 내 고양이는 고양이별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은 상실의 고통을 겪는 이들을 같은 말로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저 어렴풋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었다. 죽음은 무엇인지, 죽은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정말 영혼이라는 게 있고 사후의 삶이 실존하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로써 인식과 소망의 불일치가 해결된다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죽음을 알고자 했던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은 더러 경험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같은 반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그해 늦가을엔 각별했던 친구가 등굣길 교통사고로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두 사건 모두 예민한 청소년기 감성을 뒤흔들었고 오래 슬퍼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상실감에 죄책감이 더해져 괴로운 날이 많았다. 대학교 2학년 때 같은 동아리 두 학번 선배 언니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 이듬해엔 너무나 좋아하는 뮤지션이 비극적으로 삶을 끝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을 때마다 안타깝고 슬퍼했지만 죽음과 존재에 대한 사유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계속 살아갈 존재로서 내 삶에 대한 고민은 했던 것 같지만 죽음 그 자체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경험한 죽음들이 사고사에 가까운 것들이고, 죽음의 과정이나 돌봄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평생 가져왔다는 죽음관, 굳게 믿었던 ‘완전한 끝으로서의 죽음’은 사유와 탐구가 없는 것이었다. ‘관점’이라는 말을 뒤에 붙일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그저 일종의 추측, ‘뇌피셜’이랄까. 마치 신데렐라가 왕자님을 만나 결혼한 뒤 ‘일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Happily ever after).’ 하고 관습적으로 끝맺는 동화처럼 사유 없는 확신에 불과했다. 모든 생명은 죽고, 죽으면 거기서 끝,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 뒤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은 암흑일 뿐. 그렇게 보이는 대로 쉽게 결론짓고 죽음이나 관련한 논의에 대단히 쿨한 지성인인양 했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 스스로 탐구한 적도 사유한 적도 없는 무언가를 믿는 것은 지성인의 자세가 아니다. 죽음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이가 떠나고 난 뒤 죽음학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고양이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은 삶의 뿌리를 흔들 지경으로 큰 것이었지만, 이성과 사고력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합리적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견지하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죽음을 공부했다.


나는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뒤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소풍을 떠났다, 별이 되었다, 고양이별로 돌아갔다’ 등 반려동물의 죽음을 일컫는 은유적 표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진심으로 끄덕이게 됐다. 인간의 죽음을 이르는 비슷한 은유나 관습적 표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삶에 대한 관점, 혹은 세계관이 바뀌었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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