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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우주 Aug 08. 2022

죽음에 대한 오해 -1

18 Ⅱ. 죽음에 대하여 ④

1. 죽음은 끝이다 :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는 스노우캣의 이 그림. 믿어도 좋다.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넌 동물이 당신을 맞으러 나오는 이 순간은 여러분에게 정말 올 것이다.     

스노우캣 블로그 캡처

1998년 개봉한 미국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에도 이런 모티브가 아름답게 녹아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주인공 소아과의사 크리스(로빈 윌리암스)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어딘가 도착하자 수년 전 안락사로 떠나보낸 강아지 케이티가 나타난다. 주인공은 그제야 자신이 죽었기에 반려견을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케이티를 향해 기쁘게 웃음 짓는다. 


2016~2017년 방영된 tvN 드라마 <도깨비>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죽음을 맞은 시각장애인이 저승사자의 안내에 따라 저승의 문을 열자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린다. 뜻하지 않은 개 짖는 소리에 남성이 "해피?"라 외치자, 안내견 라브라도 리트리버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반갑게 꼬리 치며 다시 짖는다. 먼저 그곳에 당도한 강아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성의 입가에 마침내 미소가 번지고, 해피의 안내로 하늘 계단을 함께 오르는 둘의 뒷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판타지’로 분류된 이 드라마의 인물 설정과 극적 요소를 위한 이야기 전개는 창작(허구)이지만, 이동욱이 연기한 저승사자를 중심으로 한 망자들의 에피소드는 죽음과 사후세계, 환생에 대한 기존 연구가 바탕이 된 것이다. 물론 방영 당시 이 드라마를 봤을 때 나는 환생이나 윤회는 물론, 강아지의 배웅 장면 역시 그저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탐구 후에 드라마를 다시 찾아보니 당대의 이야기꾼인 작가가 죽음학의 연구 성과에 극적 재미와 감동을 위한 상상적, 신화적 요소를 보탠 소재가 많았다.


과로사로 생을 마감한 응급실 의사 에피소드(도깨비 3회)가 대표적이다. 이 의사는 죽음 직후에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하려 애쓴다. 이미 죽어 영혼이 체외이탈을 한 상태이지만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해 생전의 행동을 반사적으로 한 것이다. 자신이 죽은 줄 몰랐던 의사는 저승사자가 나타나자 그제야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다.


죽음의 전령 저승사자가 저승을 설명하는 대목도 그렇다. 한 망자가 ‘저는 어디로 가면 되나요?’ 묻자, 저승사자는 “들어온 문을 다시 나가면 된다. 저승은 유턴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디어와 팬들은 이 드라마가 환생, 윤회 등을 바탕으로 ‘도깨비의 세계관'을 탄생시켰다고 열광했지만 앞서 축적된 죽음에 대한 연구 성과에 빚진 작품임을 후에 알았다. 


나는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죽음은 존재의 소멸, 무(無)가 되는 것이라 믿었다. 이런 믿음은 오래도록 굳건했기 때문에 미미가 고양이별로 돌아간 뒤 아이를 향한 조사(弔辭)에도 그렇게 썼다. 미미 역시 육신의 몸을 벗고 이제는 내 기억 속에만 있을 뿐 미미 그 자신의 존재는 영원히 소멸된 것이라 굳게 믿었다. 스노우캣의 그림이나 먼저 죽은 반려견이 저승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심금을 울렸지만 그것은 신화적이고 비유적인 위로에 대한 감상적 반응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죽음학 연구자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 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명체는 육체와 육체에 깃든 의식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몸과 분리되는 의식, 즉 영혼(*)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몸과 의식(뇌가 만들어내는)은 사라지지만 영혼은 남는다. 그래서 육신이 아닌 영혼의 삶은 계속된다. 죽음 뒤의 삶, 사후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전 같으면 말도 안 된다고 넘기고 말았을, 혹은 경천동지 할 이런 지식(믿음이 아니라)은 이미 죽음학에서 매우 상식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이 된 정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놀라웠다. 몸과 의식은 눈에 보인다. 즉 굳이 설명하거나 논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비(非)과학, 미신의 세계로 치부된다.


2009년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펫로스, 반려동물의 죽음>, 미국의 동물보호소 운영자이자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리타 레이놀즈가 쓴 이 책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펫로스 증후군’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저자가 여러 동물과 이별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고 느낀 이야기를 전하는데 미미를 보낸 직후 처음 책장을 넘겼을 때부터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반려동물을 포함해 여러 동물의 죽음을 겪은 본인의 체험, 믿음 등에 대한 근거는 저자 한 사람의 경험과 느낌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사건에서 보여주는 동물들의 행동과 이야기 자체가 감동적이고 위로가 되긴 했지만 의구심은 떨칠 수 없었다.


특히 떠난 강아지의 영혼이 나타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저자는 12살에 구강암 진단을 받은 반려견 웨기를 사후 13개월이 지나 만난 경험을 적어뒀다. 죽음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러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아침 완벽하게 건강하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으로 주방에 나타난 웨기는 “엄마 저예요. 항상 지금처럼 잘 지내요. 죽음 뒤에 삶이 있다고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엄마를 떠난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요. 힘내세요. 또 올게요.”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죽음 너머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누군가에게 이 경험을 말할 때 이렇게 운을 뗀다고 한다. “저를 미쳤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제게는 웨기라는...” 나처럼 이런 이야기를 황당하게 생각할 이들에게 선수를 치는 셈이다.


아이가 떠나고 한 달이 지나, 아이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환묘를 돌보는 이들이 모이는 인터넷 공간에 글을 올렸는데 이런 댓글이 달려 마찬가지로 당황하기도 했다. ‘아직 곁에 머물고 있으니 소풍길 가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세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아이들은 몇 개월 정도 보호자를 옆에서 지켜보며 안정이 됐음을 확인하고 길을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동물과 교감하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의 능력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동물에게도 인간만큼 풍부한 감정과 의식, 의사소통 욕구가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교감해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는 사람들은 대개 사기꾼일 것이라 생각했다. 인간의 운수와 길흉화복을 꿰뚫는다는 점쟁이 역시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영역엔 거짓과 술수가 파고들기 쉽다. 그래서 반려동물이 떠나고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를 찾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간절함은 알겠지만 일종의 ‘영매’를 통해 떠난 동물과 소통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을 활짝 열고 그럴 수도 있겠다, 드물게 그런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는 것, 특히 과학이나 실재라고 이름 붙인 것들, 우리가 감각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과학이나 이성, 합리주의 같은 이른바 인류가 쌓아 올린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인식이란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열린 자세를 갖는 게 중요하다. 인간은 개가 맡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박쥐와 돌고래가 듣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렇다고 개가 맡는 냄새, 박쥐와 돌고래가 듣는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실세계에 발 디딘 인간이 감각할 수 없는 영역,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이 바로 죽음과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흔히 쓰는 영혼(soul), 영(spirit)이라는 단어가 주는 종교적, 비과학적인 어감 때문에 최근 의학계에선 ‘국한되지 않는 의식(Non-local consciousness)’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현대의 주류 의학은 인간의 의식을 뇌 기능의 산물로 본다. 지성인들의 상식도 인간의 의식은 두뇌의 작용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뇌가 활동을 멈추면 보고, 듣고, 느끼는 체험이나 생각, 기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임사체험 연구 등을 통해 죽음학이 밝힌 성과는 뇌의 작용이 없어도 인간은 선명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두뇌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의식, 육체에 귀속된 의식을 넘어선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흔히 영혼이라 부르고,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를 인간 영성의 핵심으로 보기에 영혼이란 단어에선 종교적 어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육체에 귀속된 의식과 이를 구분하되 종교적 선입견에 치우치지 않도록,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 의식이라는 뜻을 담아 ‘국한되지 않는 의식’이란 용어를 쓴다. 이에 따라 죽음을 ‘국한되지 않는 의식’이 몸에서 분리되는 사건으로 정의하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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