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Ⅱ. 죽음에 대하여 ⑤-5
죽음 논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기울어진 아래편 운동장(비물질의 세계)에서 평평한 운동장(물질의 세계)을 향해 공을 차는 것 마냥 시작부터 공정한 경쟁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그렇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고, 주장하고, 논증해야 한다.
임사체험에 대한 다양한 학술연구가 쌓이고 있지만, 죽음 뒤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둘러싼 편견은 여전히 공고하다. 임사체험은 죽음과 가까웠을 뿐(Near-death) 정말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게 회의론자들의 단골 지적이다. 또한 임사체험은 일시적 환각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따라붙는다. 임사체험 중의 경험은 뇌의 산소부족 등 일시적 오작동으로 환영을 본 것이라거나, 심폐소생에 사용하는 마취제 등 특수한 약물 때문에 일어나는 환각 현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임사체험의 일부 요소들을 유도하는 실험도 행해지고 있다. 뇌의 특정부위를 자극하면 환영이 보이고 저산소증에 의한 뇌의 착각이 유체이탈, 터널을 지나는 느낌 등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사체험 중 안도감과 행복감은 뇌의 기능이 완전히 종료되기 직전에 분출하는 전기에너지나 엔도르핀 등으로 인한 것이란 주장도 있다.
이처럼 임사체험을 ‘과학’으로 반박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사체험의 복합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설명하는 반론은 없다. 어떤 회의론도 임사체험의 특정 요소를 반박하는 것일 뿐 복합적이고 다양한 임사체험의 요소 전부를 성공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두서없이 조각난 기억으로 구성되는 환각과 임사체험은 분명히 다르다. 환각이나 섬망은 근사체험처럼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과정, 체험 후 삶의 태도나 가치관이 바뀌는 결정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혼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철학적 반론에 대해선 셸리 케이건 예일대 교수의 베스트셀러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추천한다. 철학은 죽음을 사유하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죽음 앞에 선 철학이 인간의 몸과 영혼을 보는 관점은 일원론(monism : 인간을 구성하는 영혼은 없다), 이원론(dualism : 영혼이 있다)으로 나뉜다. 셸리 케이건은 철학적 일원론자로, 죽음은 존재의 완전한 끝이라는 입장에 선다.
인간은 오직 생명활동을 하는 유기체, 육체적인 존재일 뿐, 인간을 구성하는 영혼은 없다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은 사고실험(생각으로 진행하는 실험) 같은 철학적 논증을 통해 영혼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나 의식과 분리되는 영혼, 죽음 뒤의 세계를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게 셸리 케이건의 주장이다. 언뜻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이원론을 받아들일만한 타당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일원론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다만 셸리 케이건도 임사체험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나는 비록 영혼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혼과 같은 비물질적인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비물질적인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과학, 특히 물리학 법칙을 어기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은 과거에 부정했던 존재나 특성들을 발견해나가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직 과학은 영혼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혼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면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처사일 뿐이다.(*주1)
철학적 일원론을 설파하면서도 임사체험은 ‘약속어음의 상태’로 본 것이다. 셸리 케이건은 임사체험 현상을 부정하지 않았고, ‘극소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특별한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기술했다.
개인적으로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의심한 지점은 간절한 소망, 이승을 떠난 존재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 빚어낸 믿음(wishful thinking, 소망투사)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스티븐 호킹은 2011년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천국은 없다. 사후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동화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뇌는 부속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다.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다”고 했다.(*주2)
21세기 가장 위대한 이론 물리학자를 향한 일개 고양이 집사의 호소가 어떤 공신력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적어도 내게 사후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앎(수용)은 종교적 믿음도, 확증편향으로 굳어진 희망사항도 아니라는 점이다. 스티븐 호킹의 말처럼 죽음이 두려워 죽음 이후의 삶에 마음을 빼앗긴 것도, 혹은 먼저 떠난 존재를 향한 그리움과 간절한 소망이 빚어낸 환상도 아니다.
합리성의 시대, 죽음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나 그 이후의 세계는 ‘비과학’이란 오랜 편견 아래 봉인돼 왔다. 또한 나 혹은 소중한 존재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생의 단계, 기꺼운 마음으로 준비할 삶의 마무리가 아니라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경하고 두려운 것이 됐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사후세계를 팔아 호의호식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꾐으로 절박한 이들을 등치는 사기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일까. 천국이나 극락이란 이름으로 혹세무민 하는 이들이 넘치도록 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누적된 연구와 사람들의 경험을 탐구해 본다면 그저 회피하거나 믿어왔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설사 그 반대의 결론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받아들였을 것이다.
관련해 개인적인 체험은 전혀 없었다. 누군가는 큰 사고나 영적 사건, 매우 암시적인 꿈같은 것을 통해 세계관을 바꾸기도 한다. 미미가 죽고 몇 차례 아이 꿈을 꾼 적은 있지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죽음학에 어떤 권위도 없는 내가 짧은 지식을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은 ‘알 수 없다’고 편리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양비론, 양시론은 객관과 균형을 중시하는 지식인의 태도로 자주 채택되지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의 고통을 피하거나 어떤 선택도 논란이 불 보듯 뻔할 때 슬쩍 피해 가는 책략일 때가 많다. 반대로 사후세계가 없다는, 즉 육체와 분리된 의식이 없다는 많은 이들의 주장도 대개 보이지 않으니 없다, 단지 그것뿐 아닌가.
그걸 왜 알아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죽음의 실체가 궁금하지 않다면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하지만 소중한 존재를 잃고 삶이 무너진 듯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면, 존재의 시작과 끝은 어떤 것인지 개별적 탐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적 통념에 기대거나 누군가의 신념에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론, 나의 생각 말이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테고, 우리 삶에 확실한 것은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있다, 없다 무 자르듯 얘기하는 것이 여전히 거북하다면 ‘육체와 분리된 의식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다양한 사례와 과학적 연구들(즉, 근사체험에 대한)이 있다’ 정도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육체가 소멸하고 난 뒤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표현도 가능하겠다.
*주1 : <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엘도라도, 2012. p148
*주2 : 2011.5.15 가디언 기사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11/may/15/stephen-hawking-interview-there-is-no-heaven 호킹의 이런 생각은 2010년 출간된 책 <위대한 설계 : the Grand Design>에 잘 담겨있다. 호킹은 우주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자라는 개념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