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가지 끝
부딪히는 잿빛 상처<B-14>

기꺼이 찔리고 베이면서도 다시 곁을 내어주는 용기

by 김정교
잿빛 하늘 아래 나뭇가지 꼭대기에서 날개를 활짝 편 하얀 백로와 잿빛 왜가리가 맹렬하게 영토 다툼을 하는 사진


백스페이스를 누르며 삼킨 말들

어젯밤, 단체 카톡방에 긴 해명 글을 썼다가 지웠습니다. "아... 그냥 참자."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결국 백스페이스를 길게 눌러 모두 지워버렸죠.


오해를 풀려다 오히려 말이 길어져 상황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았거든요. 폰을 엎어두고 눈을 감았지만, 속이 은근히 뒤틀리고 명치끝이 뻐근해져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사람 사이의 틈은 참 얄궂은 것 같습니다. 선의로 내민 손이 가시가 되어 돌아올 때면, 마음은 여지없이 베이고 마니까요. 베인 자리는 얕아 보여도 그 따가움은 제법 오래가더라고요.


넓은 하늘을 다 두고도, 새들은 왜 저 좁은 가지 끝에서 엉켜 있는 걸까요.


좁은 가지 끝의 맹렬한 파열음


모니터에 띄워둔 사진 한 장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잿빛 하늘 아래, 나무 꼭대기에서 하얀 백로와 잿빛 왜가리가 날을 세우고 있네요.


날카로운 부리가 허공을 찢고, 거대한 두 날개가 맹렬하게 부딪칩니다. 서로의 영토를 지키려는 짐승의 본능에 잎사귀들이 파르르 떨며 바닥으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더군요.


저 치열한 날갯짓을 보고 있자니, 어젯밤 제가 겪은 서운함과 분노의 정체가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아, 결국 이거였구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필연적으로 내 몫의 상처를 미리 떼어놓는 일이더라고요.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뾰족한 모서리에 긁히는 일이 잦아질 수밖에 없겠죠. 내 자리를 지키려다 타인의 날개를 꺾고, 내 상처를 피하려다 누군가를 부리로 찌르는 서툰 몸짓들. 차라리 다 놓고 숨어버리고 싶었던 밤들이 제게도 수북하게 쌓여있습니다.


찔리고 베이면서도 곁을 내어주는 일


상처받지 않으려면 그냥 저 가지를 떠나 혼자 날면 그만입니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는 부딪칠 일도, 깃털이 뽑힐 일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안전한 고립 속에서 마음은 서서히 온기를 잃고 굳어버리겠죠.


하얀 날개와 잿빛 깃털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저 맹렬한 파열음은, 참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와 맞닿아 살아가고 있다는 뜨거운 증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라는 치유제는 결코 영화처럼 극적이지 않더라고요. 어제 베인 상처가 오늘 아침에 감쪽같이 아무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뜯겨 나간 깃털 사이로 무심한 바람이 수없이 드나들며, 흉터를 조금씩 단단하게 굳혀갈 뿐이겠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관계를 맺을 용기란, 두 번 다시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이 아니라 기꺼이 찔리고 베이면서도 곁을 내어주겠다는 우직한 미련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관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겠죠. 엇갈리고 베이는 시간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커다란 침묵이 이 서툰 날갯짓들을 묵묵히 품어주고 있음을 가만히 믿어볼 뿐입니다.


모니터 화면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식탁 위에 놓인 머그잔을 들어 올렸습니다.


반쯤 남은 둥굴레차가 알맞게 식어 있네요. 서늘한 액체가 목을 타고 꿀깍 넘어갑니다. 그 둔탁한 느낌이 오늘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이곳에 다 펼쳐놓지 못한 풍경의 여운과, 셔터를 누르며 갈무리한 못다 한 이야기들은 저만의 작은 앞마당에 정갈하게 모아두었습니다. 일상에 쉼표 하나가 필요한 날, 편안한 걸음으로 놀러 오십시오."


"인생 망한 줄 알았는데, 봉오리는 올라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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