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숲 빨간 가방, 40만 원짜리 봄꽃<B-013>

봄은 빨간 핸드백을 타고 온다

by 김정교

안개 숲 빨간 가방, 40만 원짜리 봄꽃

오전 6시 40분, 소나무 숲의 불청객


"아이고, 허리야." 오전 6시 40분, 안개 낀 숲에서 이리저리 기괴하게 휘어진 소나무들을 보며 삐걱거리는 제 척추를 두드립니다.


오늘은 밋밋한 숲 풍경에 포인트를 좀 줘보려고, 집에서 몰래 챙겨 온 아내의 새빨간 핸드백을 간이 의자 위에 세팅해 두었습니다. 뷰파인더로 들여다보니, 칙칙한 녹색과 갈색 틈바구니에서 저 빨간 가방만 "나 여깄소!" 하고 요란하게 존재감을 뽐냅니다.


빙하기를 불렀던 40만 원


저 쨍한 빨간색을 보니, 불과 석 달 전 제 마음속에 찾아왔던 지독한 겨울이 생각납니다. 사진을 꽉꽉 채워둔 엠지텍(MGTEC) 외장하드에 이어 도시바 하드까지 연달아 뻗어버렸거든요. 무려 3테라바이트.


제 평생의 기록이 허공으로 증발했을 때, 방바닥을 뒹굴며 오열할 뻔했습니다. 데이터 복구비로 생돈 40만 원을 긁으면서, 제 영혼도 함께 탈탈 털려 나갔습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밥맛도 뚝 떨어져 며칠 앓아누웠을 때, 아내가 과일 접시를 들고 와 "청승 그만 떨라"며 등짝을 스매싱했었죠.


빨간 경고등이 붉은 봄꽃으로

감정의 사계절이라는 게 참 웃깁니다. 한 번 우울한 겨울이 오면, 평생 봄이 안 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게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 숲속에 놓인 저 빨간 가방을 보니 묘한 위로가 됩니다. 에러가 났을 때 깜빡이던 외장하드의 빨간 경고등 같기도 하고, 지독한 빙하기를 끝내고 피어난 붉은 꽃 같기도 합니다. 아마 제 척박했던 마음에도 드디어 싹이 트려나 봐서, 저 붉은색이 유독 희망차게 보이나 봅니다.


서둘러 접는 의자


40만 원은 아직도 아깝지만, 덕분에 하드디스크 대신 제 머릿속을 싹 비우는 법을 배운 셈 칠까 합니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카드 명세서를 보면 아직도 속이 쓰리긴 하지만요.


어디선가 까치 소리가 들립니다. 짙었던 안개도 조금씩 걷히는 것 같네요. 세팅해 두었던 의자를 접고, 빨간 가방을 카메라 가방 깊숙이 쑤셔 넣습니다.


자, 이제 아내가 가방 없어진 걸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집에 가서 제자리에 갖다 놔야겠습니다. 축축한 흙냄새 사이로 은근한 식은땀이 배어나는 쫄깃한 아침입니다.


"브런치에 미처 다 담지 못한 또 다른 풍경 사진과, 렌즈 너머로 건져 올린 조금 더 깊은 묵상 이야기는 아래 저의 개인 공간에 조용히 남겨두었습니다. 차 한 잔의 여유가 필요하실 때 언제든 들러주세요."


"혼자만의 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충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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