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지우는 게 아니라,
곁에 새 살이 돋는 것

시든 봉오리 옆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위로

by 김정교
어두운 연못 위, 활짝 피어난 분홍빛 연꽃 바로 옆에 피어나기도 전에 검게 말라버린 꽃봉오리가 함께 서 있다.

따가운 모기와 눅눅한 습기 속에서


“아이고, 따가워라.”


오후 5시 40분. 문경 신기동 틀모산 못 연꽃 자생지.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모기 한 마리가 팔뚝을 물고 달아납니다. 장마가 막 끝난 공원에는 눅눅한 습기가 가득합니다. 셔츠 등판은 어느새 땀으로 젖어 있습니다.


손등으로 땀을 훔치고 다시 뷰파인더를 들여다봅니다. 그때, 묘하게 마음을 붙잡는 장면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옵니다. 오른쪽에는 꽃잎 한 번 펼치지 못한 채 시커멓게 말라버린 연꽃 봉오리가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그 바로 옆, 왼쪽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분홍빛 연꽃 한 송이가 환하게 피어 있습니다. 같은 자리, 같은 물, 같은 햇빛. 그런데 하나는 말라버렸고, 하나는 활짝 피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시든 목소리


셔터를 누르려다 문득 손이 멈춥니다. 그 시든 봉오리가 어젯밤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이던 딸아이의 목소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어제저녁 9시, 서울에 사는 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직장 상사 때문인지, 오래 만난 친구 때문인지 구체적인 이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용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빠… 내 마음이 다 타버린 재가 된 것 같아.”

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수화기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 많이 힘들었구나.”


사진 속 시든 봉오리가 정말 슬퍼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쭈글쭈글한 모습이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저 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싶었는데… 세상이 너무 뜨거웠어.”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습니다. 진심을 다했지만 닿지 않았을 때. 열심히 준비했지만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때. 그럴 때 우리는 문득 깨닫습니다. 내 마음이 저 시든 봉오리처럼 초라해졌다는 것을.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다시 뷰파인더를 들여다봅니다. 그때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저 화려한 연꽃은 시든 봉오리를 피해 멀리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꽃잎을 열고 있습니다.


마치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가 네가 무너진 자리라면, 여기가 내가 피어날 자리다.” 연꽃은 진흙을 탓하지 않습니다. 먼저 나왔다 말라버린 동료를 흉보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 모든 것을 거름 삼아 자기 차례의 꽃을 피워냅니다.


어쩌면 회복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요. 상처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흉터 옆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비록 저 봉오리는 피지 못했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진흙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다음 꽃을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조언보다 깊은 침묵의 곁


촬영을 마칩니다. 철커덕. 셔터 소리와 함께 꿀벌 한 마리가 꽃술 위에 내려앉았다 날아갑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훈아, 오늘 뭐 먹었어?” 별것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면 충분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아비의 조언이 아니라 말라버린 봉오리 옆을 지켜주는 연꽃 같은 침묵일지도 모르니까요.


공원 앞 편의점에 들릅니다. 딸이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 기프티콘 하나를 보냅니다. 짧은 메시지도 함께 보냅니다.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다.”


매미 소리가 맴맴 귓가를 때립니다. 휴대폰 화면에 ‘전송 완료’라는 알림이 뜹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연못에서도 꽃은 가장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나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브런치에 미처 다 담지 못한 또 다른 풍경 사진과, 렌즈 너머로 건져 올린 조금 더 깊은 묵상 이야기는 아래 저의 개인 공간에 조용히 남겨두었습니다. 차 한 잔의 여유가 필요하실 때 언제든 들러주세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성공했습니다."

https://lensword.tistory.com/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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