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것은 물결처럼 흔들린다
오늘 새벽, 운전대를 잡고 안개낀 호수 주변 도로를 달리는데 앞이 하나도 안 보일 만큼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답답해서 창문을 조금 내렸더니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훅 끼쳐와서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차를 갓길에 세우고 사진을 찍기 위해 그 몽환적인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빛이 분명히 있기는 한데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쨍한 형광등 불빛이 아니라, 두꺼운 이불 속에서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온기 같은 빛. 마치 누군가 옆에서 "괜찮아, 나 여기 있어" 하고 작게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순간도 꼭 이렇지 않나요? 매일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이벤트가 없어도, 그냥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체온이 올라가는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안개 속에선 모든 색이 물 빠진 청바지처럼 희미했습니다. 붉은지 푸른지 구분도 잘 안 가는 그 흐릿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하더군요. 요즘 세상은 너무 선명한 것만 요구하잖아요. "너는 무슨 색이야?", "우리 관계는 정확히 뭐야?" 하고 묻는 질문들에 지칠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여러분은 혹시 너무 확실한 관계들에 지쳐 숨고 싶으신 적 없으신가요? 모든 걸 설명하고 정의해야 하는 피곤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안개 낀 풍경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말로 정의할 수 없는 흐릿한 감정이,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깊숙하게 마음에 와닿기도 하니까요.
사진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와 저 멀리 안개에 반쯤 잠긴 작은 집이 보였습니다. 둘 사이에는 꽤 먼 거리가 있었는데,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억지로 가까워지려고 애쓰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등을 돌린 것도 아닌 상태.
예전엔 사랑하면 무조건 딱 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만 연락이 안 돼도 불안해하고, 내 모든 걸 공유해야 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숨 막히는 관계보다, 각자의 자리에 서서 서로의 실루엣을 은근히 지켜봐 주는 그 '거리'가 사랑을 더 건강하게 키운다는 걸요.
물가에 비친 나무 그림자는 잔물결이 일 때마다 쉼 없이 일그러졌습니다. 흔들리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꼭 제 마음 같아서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참 애를 씁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건 다 흔들리는 법이잖아요. 물결이 지나가면 다시 제 모습을 찾는 저 그림자처럼, 잠시 마음이 소란스러워도 결국 우리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 애써 단단한 척,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흔들리는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근사한 풍경이니까요.
이 안개는 해가 뜨면 금방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안개가 머물다 간 자리에는 축축한 물기와 차분해진 공기가 오래 남겠죠. 사람 관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화려한 조건이나 타이틀은 안개처럼 사라지지만, 그 사람과 함께했던 그 '분위기'와 '온도'는 마음에 문신처럼 남으니까요.
이 풍경이 주는 위로를 한 문장으로 적어봅니다.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아. 중요한 건 네가 서 있는 자리와 마음의 방향이야."
차창 밖은 여전히 흐리지만, 제 마음에는 작은 온기 하나가 켜진 기분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따뜻한 국물 요리로 언 몸을 녹여야겠습니다. 안개처럼 흐릿해서 더 포근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