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할 듯 날아올라, 기어이 당신 곁으로 가져온 작은 성의
"으악, 눈 부셔!" 오전 6시 50분, 동네 뒷산 정상. 선글라스를 안 가져온 걸 후회하며 눈을 찡그립니다. 아침 해가 정면으로 쏟아지는데, 저 앞에서 뭔가 엄청난 게 나타납니다.
거대한 백로 한 마리가 황금빛 아침 햇빛을 받으며 "쿠아앙-" 하는 포스로 내려옵니다. 날개 편 길이가 족히 1미터는 넘어 보입니다. 저 녀석의 비장한 표정과 근육질(?) 날개를 보아하니, 입에는 분명 월척 잉어나, 아니면 적어도 산삼 뿌리 정도는 물려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독수리 구조대처럼, 세상을 구하러 온 영웅의 등장 씬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줌을 땡겨서 자세히 보니... 녀석의 부리에 물려 있는 건, 앙상하고 비틀어진 나뭇가지 하나가 전부입니다.
셔터를 누르려다 '풉' 하고 웃음이 터졌습니다. 저 화려한 등장, 저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목적이 겨우 '나뭇가지 배달'이었다니요. 마치 명절에 벤츠 타고 고향 내려와서, 트렁크에서 꺼낸다는 게 '참치 선물 세트' 하나인 제 조카 녀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참치도 귀하지만, 차 문 여는 폼은 백화점 전체를 사 온 줄 알았거든요.)
둥지에서 기다리던 암컷 표정도 가관입니다. "어머, 자기야! 날개 각도 예술이다! 근데... 그게 다야?" 라고 묻는 듯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이런 풍경... 왠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우리네 인생도 다 저런 '용두사미' 시트콤 아닙니까. SNS에는 "오늘도 치열하게 불태웠다 #성공 #열정" 하고 비장하게 올려놓고, 정작 퇴근길 손에 들린 건 편의점 '4캔 만원' 맥주 봉지가 전부인 날들 말입니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웃을 일이 아닙니다. 저 수컷 백로, 꽤 멋진 놈입니다. 남들 눈엔 시시해 보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줍기 위해, 저렇게 온 힘을 다해 날개를 폈다는 거니까요.
"폼생폼사면 어때. 내 새끼 위한 건데." 녀석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가 맥주 봉지 하나 달랑 들고 들어가도, "아빠 왔다!" 하고 현관문 열 때만큼은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짓는 것처럼요. 행복이라는 게 원래 좀 뻔뻔해야 제맛 아닙니까. 작은 거 하나 주워오면서도, 지구를 구한 영웅처럼 당당하게 건네는 저 뻔뻔함. 그게 바로 가장의 무게를 버티는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내려가는 길,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봅니다. 오늘 저녁엔 아내에게 줄 붕어빵이나 한 봉지 사가야겠습니다. 천 원짜리 몇 장 없어서 카드로 긁겠지만, 건네줄 땐 백로처럼 날개를 쫙 펴고 말할 겁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위해 이 추위를 뚫고 황금 잉어빵을 사냥해 왔다!"
아내가 "아이구, 가지가지 한다"며 등짝을 때리더라도 뭐 어떻습니까. 그것도 다 사랑의 타격음(?) 아니겠습니까.
이어폰을 꽂습니다. 조용필의 'Bounce'가 흘러나옵니다. 심장이 콩닥콩닥,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집니다. 오늘 하루, 대단한 성과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저 백로처럼 폼 나게 출근해서, 소박하게 퇴근하면 그게 바로 해피엔딩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