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타다오와 이타미준의 있고 없음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창문인지, 어디까지가 벽이었다가 땅인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공간은 우주를 향하게 된다. 노자가 말하기를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안과 밖의 이분법을 탈피하여 단절을 극복하고 순환하며 공간은 스스로 있으면서 없는 무언가가 된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없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진다.
안도 타다오는 이 곳에서 제주의 돌담과 더불어 르 코르뷔지에가 출발시킨 노출 콘크리트의 활용을 통해 재료적 측면에서 단순성 및 기존 풍경과의 조화를 확보하는 동시에, 수직/수평과 기하학적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해 공간적 측면에서의 탈경계-탈장소화를 이루어냈다.
이러한 공간에의 출입은 존재의 무화를 통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어 ’무가 인간의 실존을 매개로 자신을 드러냄‘을 감각하게 하고, 이는 어떤 종교적 원체험으로까지 확장되어 들어갈 때와는 다른 차원의 인식과 새로워진 지각을 가지고 나오게 된다. 분명 같은 통로를 거쳐 같은 문을 지나왔음에도 아까와는 전혀 다른 하늘이 보이고 전혀 다른 바람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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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한명의 위대한 건축가가 있으니. 이타미 준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중시했으며 평생을 본향에 대한 애착을 갖고 살아온 그를 유동룡이라는 이름으로 부름이 온당할 것이다.
유동룡의 건축은 애초에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단순히 안/밖의 이원화된 도식을 허물거나 해체하는 차원을 넘어, 경계 자체가 불필요함을 보여준다. 자와 타, 외부와 내부라는 그 어떤 이분법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믿음을 허무는 셈이다. 즉, 무너뜨릴 벽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사용한 재료의 물성일 것인데, 쇠는 녹슬고 나무는 뒤틀리고 물은 흐름으로써 이 공간들은 어느 한 계절도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있지 않다. 시시각각 돌을 비추는 빛의 각도가 변하고 기둥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의 소리가 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들뢰즈가 말한 ’동일함 속에 스며있는 다름‘일 것이다ㅡ같은 듯 보이지만 단 한순간도 같지 않은 끊임없는 차이와 반복. 숲과 들과 바다가, 그리고 너와 내가 그러하듯이.
‘없음’을 이야기할때 그것은 이미 ‘없음’을 잃는다. 언어는 사고를 제한하므로 무를 이해하고 규정하는 순간 오히려 무는 더 멀어진다. 무엇하나 가두려들지 않고 흘려보내는 이곳에서 변무(辯無)는 모순이 된다. 말 이전의 장소, 사유 이전의 공간. 가히 장자가 기뻐 맞이할 뜰이 아닐지.
-유민미술관과 수풍석뮤지엄을 나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