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읽기>와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읽고
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가 하는 모든 대화는 일종의 중역을 거친 셈이다. 감각으로 인식되는 세계(기의)를 제한된 언어(기표)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데서, 개인의 내부에서 1차 번역이 일어난다. 여기서 첫 번째 손실이 생긴다.틀에 넣어 끄트머리가 잘려나간 빵반죽처럼, 느낌은 넘치고 언어는 언제나 부족하다. 나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온전히 말할 수 없다.
이어서, 화자가 말한 것을 청자가 듣는 데에서 2차 번역이 이루어진다. 서로의 우주를 오가며 말들은 부유하고 의미는 비틀린다. 듣는 이의 기억과 경험이라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단어들이 해체된 후, 처음과는 다른 순서로 재조립되며 모양을 바꾼다. 두 번째 손실. 나는 네가 말한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소쉬르가 아니어도 누구나 마주했을, 말과 말의 끝 사이 가늠할 길 없는 아득함. 이렇게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동안 모든 것이 조금씩 깎여나간다.
오독과 오역의 굴레. 번역가로서 저자는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었을까. 그러나 기실 같은 나라에 산다고 해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나’라는 세상에서 배운 모국어로 이야기하며 서로가 서로의 통역가 역할을 떠맡는다. 바벨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이미지와 소리가 충돌하며 언어들은 필연적으로 어긋난다. 기표는 기의를 겨누지만, 라캉이 말했듯 그것은 늘 그 위에서 미끄러지므로.
저 편의 언어로 쓰여진 글을 이 편의 언어로 옮기는 것은 그리하여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이 불가능할 테지만, 불가능하기에 오히려 순전한 일일 것이다. 말과 글로 다 아우를 수 없는 저 너머를 향하여—닿으려 해도 영영 닿을 수 없는 완전함을 쫓는 이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말과 글 속을 유영하며, 언어의 우주에서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꿈꾼 또 한 사람이 있다.
설핏 보면 같은 이야기를 왜 이렇게 반복해서 쓰지 싶은 구절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실제로 글 전반에 걸쳐 문장들이 단어 하나 혹은 조사만 바뀌어 되풀이되거나, 어순만 달라진 채 똑같이 연거푸 쓰인 구절들이 여러 번 거듭된다.
이는 이승우라는 한 개인이 고전에서 성경 속에서 철학서에서의 한 줄을 며칠이고 몇 달이고 아니, 평생을 붙들고 고민하며 집어먹고 토했다가 다시 곱씹은 흔적일 것이다. 꿈과 말과 죽고 사는 것. 보르헤스와 카프카와 레비나스. 이 책은 동서고금의 텍스트를 넘나드는 메타텍스트이자, 씨줄과 날줄을 엮어 만든 한 권의 태피스트리이다. 한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언어의 실 위로 다른 빛깔의 실이 교차한다. 다른 이의 목소리와 오래된 문장들, 유구한 세월. 그렇게 두 타래가 얽히고 설키며, 또 하나의 세계가 직조된다. 이 새로운 탄생 앞에서 오독이나 오역이라는 말은 무의미해진다.
이렇게 누군가가 고요하게 읽은 것들을 함께 읽을 적에는, 부디 그가 서문에서 친절히 안내해주었듯 몰두해서 ‘고요히’ 읽어야 한다. 행간을 더듬으며, 이따금 잠시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되돌아가기도 하면서. 그래야만 그저 종이 위의 잉크였던 책이 비로소 작은 광학기구가 되어 나를 비추어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