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구스타보 두다멜과 LA필하모닉의 연주를 듣고

by sue


catalyst 라는 단어가 있다. 모두가 알듯 화학에서 ‘촉매’라는 뜻의 이 말이 가진 의미는 비유적으로 확장되어, 어떤 변화나 계기를 일으킨 기폭제를 일컫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클래식이라는 장르에서 내 안에 화학작용을 일으킨 catalyst가 있다면 그건 바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클래식곡’인 셈이다. 어릴적 디즈니에서 나온 <판타지아2000> 영화가 있었다. 8곡의 클래식을 모아 이를 배경음악으로 활용하여 단편영화를 만든 모음집의 형태였다. 그 영화의 마지막 편이 바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였다. 곡을 배경으로 작고 여린 숲의 요정이 평화롭게 들판을 거닌다. 그러다 화산이 갑자기 터지며 화마가 온 사방을 뒤덮고 아름답던 모든 것들이 잿더미로 변한다. 그 속에서 결국에는 다시 싹을 틔워내고 이윽고 아름다운 봄이 찾아오는데, 예쁜 작화와 내용이 음악의 삼박자가 너무나 찰떡처럼 잘 어울려 마음 한켠에 늘 기억하게 되었다. 그 후 한참 뒤에 중학생이 되어 버스를 타고 집에 오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그 곡을 다시금 듣게 되었다. 오래 전 친구를 다시 만나기라도 한 양, 어린 마음에 네이버 지식인에까지 글을 써서 알아내곤 그 내가 알던 불새란걸 깨닫고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모른다. 코묻은 용돈을 모아 무작정 핫트랙스에 갔다. 뭐가 뭔지도 모른채 무턱대고 firebird 라고 쓰인 여러 cd중 하나를 골랐다. 시카고 심포니의 연주였고, 모든 음을 외울 지경이 되도록 거듭해서 들었다. 수천번을 들어도 피날레에선 여지없이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 후로 수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연주한 여러 불새를 들으며 같은 곡도 지휘자와 악단에 따라 전혀 다른 곡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 구스타보 두다멜과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보여준 연주는 아주 재빠르고 확신에 찬 불새였다. 빠른 템포였음에도 서두르는 느낌은 없이, 강렬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리듬의 완급조절로 색채감이 극대화되었다. 아주 부드럽고 몽환적인 선율이 이어지다 갑자기 폭발처럼 터지는 금관과 타악기가 이 곡의 성패를 좌우할터. 두다멜은 단 한순간도 엇나가는 법 없이 완벽한 볼륨과 박자감으로 감정적으로 깊은 침잠에서 한순간의 해방으로 뛰어오르는 구조를 성공적으로 그려내었다.


밤이 걷히고 이윽고 찾아온 새벽. 언제나처럼 우리를 구하러 온 호른소리와 함께 새 시대가 열렸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오늘의 <불새>는 앞으로 갈 길이 한참이나 남은 나의 클래식 여정에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촉매로 남게 될 것이다.


음표들이 온 몸을 감싸던 이 느낌을 오래도록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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