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에 부치는 편지

‘선’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견디는 법

by sue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제한 없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지요. 의도와 동기가 결과보다 중요하다고도 말씀하셨고요. 그런데 오늘의 세상을 마주하며 이런 저런 의문이 들어 글을 씁니다.

진심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아무렇지 않게 남용되는 시대입니다. ‘나는 진짜야’라고 외칠수록 진짜에서 멀어지고, ‘-하려 했는데’, ‘내 원래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같은 말들은 겉치레로만 남습니다. 오, 진심이란 단어는 얼마나 더럽혀졌는지요!


물론 선생님께서는 의지가 결과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다고, 외부 영향과 무관하게 순수한 내적 의지가 존재한다고 다시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오늘을 사는 제가 선생께 선의지의 정의에 관해 다시금 여쭤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제일 슬픈 것은 아무래도 자기기만이겠습니다.

정말 선의였다고 믿는 것. 깊은 사유와 처절한 고민 없이, 그저 좋으니까 좋은 거라고 여기는 얕은 사고 말이지요. 그렇게 자신을 속인 채 행하는 선은 결국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국에 남을 해치고야 말지만 더 최악인 것은 이 모든것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인식의 부재 말입니다.


사실 제가 선생님께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말과 글로 설명되는 의지와 선, 그리고 그 선의 무게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체감되고 지켜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생께서 말씀하신 선한 의지란 단순히 ‘옳은 의도’가 아니라, 정념과 욕망, 본능의 저항을 이성으로 극복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의지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정념의 마찰 없이 행해지는 행위는 아무런 시험을 거치지 않은 의지일 뿐, 진정한 선의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도요.


그런데요, 선생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선생께서 저희를 너무 과대평가하셨다고 생각해요. 그 ‘내적 동기’라는 것이, 속된말로 사람마다 그 ‘깜냥’이 다른 것 같습니다. 무거운 단어를 무겁게 느끼는 감수성, 삶 속에서 도덕적 명령을 체감할 수 있는 능력 말이에요! 진정성이니 선이니 하는 단어가 아무렇지 않게 부유하는 지금, 모든 ‘진짜’는 ‘가짜’와 섞인 채 흩뿌려집니다. 인지되지 못한 채로요. 정말이지 차라리 인식된 악이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까지 합니다.

그 속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순수한 선의지의 무게를 실제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저를 포함해서 말예요.


자신도 자신을 모르는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 과연 우리가 진정 좇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여전히 의도와 동기만으로 선한 행동이 될 수 있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


진짜 선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작가의 이전글경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