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의 슈만 피아노 콘체르토를 듣고
오늘 밤, 홍콩에서 다시 한번 마주한 임윤찬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그동안 내가 알던 유려한 낭만주의의 전형을 보기 좋게 배반했다. 서울에서 들었던 정교한 해석과는 또 다른, 훨씬 더 원시적이고 이글거리는 에너지가 건반 위를 휘감았다. 가장 먼저 귀를 때린 것은 압도적인 베이스 라인이었다. 그는 왼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곡의 근간이 되는 저음부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렬히 돌출시켰는데, 이는 곡의 구조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대위법적 부각이자, 매끈한 외벽을 허물고 거친 골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가히 브루탈리즘적인 파격이었다. 때로는 거칠고 투박한 타격감을 서슴지 않았고, 그 서슬 퍼런 야성 속에서 슈만의 뜨거운 자아인 플로레스탄의 격정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역설적이게도 그 강렬한 야성 덕분에 에우제비우스의 몽상과 침잠 또한 한층 투명하게 빛났다. 광기 어린 불꽃 사이로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그 예민하고도 정밀한 서정성. 임윤찬의 해석은 이렇듯 언제나 놀랍고 새로우며, 매번 기어코 어떤 경지에 도달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화음을 짚어내는 정교한 보이싱이었는데, 여러 음을 동시에 눌러야 하는 순간에도 그는 익숙한 선율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부를 예리하게 강조하거나, 특정 손가락을 일부러 늦게 떼는 지연의 미학을 통해 음들 사이의 유기적인 마찰을 유도했다. 덕분에 수없이 들어온 악보 사이에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숨은 음들이 낯설고 이질적인 아름다움으로 피어올랐다. 매끄러운 재현보다는 위험한 탐구를 택한 그의 직관은 오늘 이 연주를 단순한 이해나 감상을 넘는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 소리를 듣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온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다시금 온몸으로 증명해 준 것이다. 이토록 뜨거운 슈만을 만난 지금, 앞으로 언제 또다시 그의 슈만을 들을지 기약이 까마득해도 좋을 만큼 행복하다. 뼈와 살까지 내어 모든 것을 다해 친 오늘밤의 연주가 오래도록 내 안에서 식지 않는 잔상으로 남을테니.
이제 이 벅찬 마음을 품고 내일모레 처음으로 마주할 스크랴빈을 기다린다. 그가 새롭게 열어젖힐 스크랴빈의 신비로운 우주는 또 어떤 색깔일까. 홍콩의 밤과 함께 설렘이 깊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