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을 수 없는 마음들

늘 나 혼자만 진심이었다

by 렌토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약속을 미루고, 두 시간을 달려와서, 세 시간을 기다렸다. 고작 10분 보겠다고.’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누굴 위해, 도대체 왜?’


생각해 보니, 그날 그는 몇 시간을 기다린 우리에게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 한마디면 모든 게 다 풀릴 수 있었는데 말이다.


다정한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쓰던 그 사람. 그땐 그가 미안한 마음을 말 대신 행동으로 전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나긋한 목소리로 두서없이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솔직히 좀 귀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알고 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저 당시의 불편한 상황만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은 아무 의미 없는 잡담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겐 남들과는 조금 다른 유대감이 있다고 믿었다.

조금은 특별하고, 조금은 더 가까운, 단순한 팬과 가수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함께했던 수많은 순간들과 추억들 속에서, 우리 사이에 단단한 신뢰가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관계를 특별히 여긴 건 나 혼자만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애정을 쏟고 의미를 부여한 것도, 관계를 특별하게 여기고 붙잡은 것도 결국 나 혼자뿐이었다.


그 사람의 곁을 지키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아주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키고 싶었고, 누구보다 특별한 팬이 되기를 바랐다. 그의 곁을 지키는 일이, 어느새 내 일상보다 더 중요해져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가 멋진 사람이니까, 그를 선택한 나 자신도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내 모습 자체가, 그 당시 내 자존감의 원천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감정을 빌려 스스로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땐 정말로 그게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그는 내게 그 자리에 있으라고 부탁한 적 없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그의 곁을 지키려 애썼고, 그래서 혼자 상처받고, 혼자 노력했고, 결국 혼자 무너졌다.
머리로는 떠날 때가 다가온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마음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보낸 마음이 무관심과 외로움으로 되돌아온 순간, 금이 간 마음은 완전히 부서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게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마음이 나를 아프게 만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이 감정을 애써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니라, 습관처럼 남겨진 의무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워하는 마음에 잠식되기 전에,

그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모두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면,

내 마음부터 지켜야 했다.


상처 난 마음을 겨우 수습하고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거센 감정이 몰아치기 전, 태풍의 눈과도 같은 고요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