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미친 헌신

우리는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by 렌토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지금은 팬덤의 시대.

그 팬덤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아낌없이 지갑을 열고, 가능한 모든 스케줄에 참석하며, 최애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여 공유한다.

이 기록들은 새로운 팬의 유입을 만들고, 기존 팬을 붙잡으며, 팬덤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때로는 아티스트 본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팬덤의 중심.

나는 그 사람의 코어팬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의 모든 순간이 그에게 닿아 있었다. 힘겨운 일상을 버티는 이유도, 살아가는 이유도 모두 그의 무대 아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마치 처음부터 내 자리였던 듯,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그 사람의 객석 1열 중앙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랑은 언제나 그렇게 시작된다.

말도 안 되게 갑작스럽게 찾아오고,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무대 위의 그는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목소리, 눈빛, 기타를 덮는 손가락 하나까지 전부 다 마음의 위안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믿었다.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더 오래 사랑했을 텐데.

그를 늦게 알아보았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슬픔이었다.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우리에게 덕질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삶의 방향을 한 사람에게로 돌려버린 일이었다.

시간을 바치고, 마음을 다 내보여주고, 모든 감정을 한 사람을 중심으로 느꼈다.


우리는 재지 않았다.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은 넘쳐 헌신이 되었다


내 생계는 어떻게든 되겠지 내버려 두며 그의 생계를 먼저 걱정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일이든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내 시간과 돈, 에너지의 흐름이 모두 ‘그의 성공’을 향해 있었다. 나의 하루는 그의 하루와 함께 흘렀고, 내 일정보다 그의 일정이 먼저였다. 공연, 굿즈, 선물을 결제할 때 가격을 따지지 않았다. 퇴근하고 공연장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온다. 3~4시간 자고 다시 출근한 뒤 퇴근하고 또 그에게 달려간다.


인생이 실시간으로 망해가는 걸 느끼면서도

무대 위의 그를 마주하면 그 모든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졌다.

그가 빛날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소모되어도 괜찮았다.



화면 속, 우리의 시간


10년 동안 집착에 가까운 기록을 했다.

눈부신 그의 순간을 단 일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빛을 나 혼자만 보긴 아까워서 영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 영상을 보고 공연장을 찾아와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화면 속에는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시간도 함께 담겨 있었다.

나의 기록은 그의 모든 순간에 늘 내가 곁을 지켰다는 존재의 증명이자, 사랑의 흔적이었다.


그 사람의 청춘은 곧 나의 청춘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남긴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그 시간 속 ‘나’였다.

내가 있었던 그 자리, 그 순간.

나는 그 세상의 일부였고, 그게 내 전부였다.



선을 지키는 추종자의 품격


어느 공연장을 가도 늘 있는 얼굴이 되고 싶었다.

객석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면, 이전까지의 고생은 모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 사람 뒤에 항상 우리가 든든하게 서 있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 사람의 자존감이 되고 싶었다.


내가 그 사람의 얼굴이라 믿었다.

화가 나는 상황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공연장에서도 다른 관객에게 배려를 잊지 않으며 자리를 지켰다.

나의 태도 하나가 그의 품격을 결정한다고 믿었고, 그의 평판을 해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와 조금 더 가까운 거리감을 유지할 때도, 선은 확실히 지켰다. 공사 구분은 철저히 했고, 그에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지키는 방식이자, 나의 진심이었다.



그저 빛나기만 해 주길


이건 가장 중요한 사실이자, 이 관계의 가장 특별한 부분이다.

팬은 이 일방적인 사랑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사랑을 주는 것만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보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이 진심을 바탕으로 더 성장하고,

다른 걱정 없이 본업에만 집중할 수 있길 바랐다.

더 환한 얼굴로 많은 사람들의 등불이 되고,

우리의 믿음이 그를 지켜주길 소망했다.


그의 의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무대에서 빛나기’


그는 몰랐을 것이다.

당연한 얼굴이 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그 자리를 지켰는지.

하지만 괜찮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니까.

우리의 사랑은,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만하고 완전했다.




우리가 그를 사랑했던 방식은 조금 비정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걸 광기라 불렀지만, 우린 그 안에서 살아 있었다.

그를 향한 헌신으로 하루를 버텼고, 그의 웃음 한 번에 모든 걸 구원받았다.

우리는 멈출 수 없었고, 그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이유보다 앞서 있었다.


모든 게 끝난 지금도 이 마음에 딱 하나의 이름을 붙이기가 어렵다.

조건도 이유도 없던 사랑.

그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살아가던 날들.


이 세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찬란하고 미친 헌신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당신을 사랑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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