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의 꿈, 헌신이 헌신짝으로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록입니다.)
퇴근 후 찾아온 짧은 자유시간.
무심코 숏폼 영상을 넘기던 중, 손이 멈췄다.
익숙한 얼굴, 나를 차단한 나의 구 최애였다.
화면을 넘기려다 다시 멈췄다.
... 저거, 내가 사준 옷인데?
여러 브랜드를 다 살피며 핏과 어깨선, 원단 재질까지 꼼꼼하게 따져서 고른 옷이었다.
비쌌지만 아깝진 않았다. 무대에서 딱 한 번만 입고 나와 준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될 것 같았다.
그땐 몰랐다.
그 옷을 선물한 지 몇 달 후, 내가 탈덕하게 될 줄은.
그리고 또 몇 달 후, 그 사람이 그 옷을 아무 일 없다는 듯 입고 무대에 오를 거라는 걸.
시작은 사소한 연락이었다.
공연 영상을 부탁하는 DM.
그 한 줄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 최애한테 디엠이 오다니.
난 정말로 성덕인가 봐!
몇 번의 대화가 지나자, 그는 자연스럽게 개인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내 최애의 프로젝트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있다니.
이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고민할 것도 없이 당장 하겠다고 대답했다.
뭐든 시켜만 달라고, 기꺼이 다 하겠다고 외쳤다.
처음에는 의견을 구하는 정도였다.
로고 디자인, 가사 분위기, 단어 몇 개 번역 정도.
하지만 점점 ‘요청’은 ‘업무‘가 되어갔다.
자잘한 서류 처리나 행정적 업무도 내 몫이 되었다.
가사 통번역까지 넘겨받았을 때는 이미 빠져나오기 늦은 상태였다. 회사와 무관한 개인 작업이라 비용 얘기를 꺼내기 어려웠고, 결국 모든 걸 내 사비로 해결해야 했다.
물론 그때는 마냥 좋았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자체가 도파민이었고 짜릿한 희열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고마웠고, 그렇게라도 곁에 있을 수 있어서 벅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회의, 일방적인 결과 번복,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과도한 업무 요구 등.
점점 내 생업이 흔들렸다. 업무 중에도 메시지나 전화가 쏟아졌고, 새벽에 메신저를 보내는 일은 너무 흔해서 이상하지도 않을 정도였다.
더 이상 감당이 어려워지자,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야겠다고 결심했다.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그는 많이 아쉬워하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했고,
그렇게 잘 끝난 줄 알았다.
나랑 프로젝트를 함께 도왔던 다른 팬이 그 사람의 소속사와 마찰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어른으로서, 그 친구를 조금 더 배려해 줄 수 없겠냐는 완곡한 부탁이었다.
1이 사라졌다.
답장은 없었다.
하루, 이틀.
메시지는 읽씹당했고,
나는 차단당했다.
본인이 필요할 땐 밤낮없이 연락하던 사람이
내가 한마디 건넸다고 나를 차단?
그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그는 내 노력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본인의 일을 내가 대신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한테 좋다고 내 돈까지 써가며 스스로 부려진 거였다.
몇 달이 지나고, 잠잠해진 마음과 일상을 되찾은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영상, 그리고 그 옷.
나를 차단하고 반년이 지난 지금,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그 옷은, 그저 옷일 뿐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골랐는지,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그에게 기억되지 않았다.
내 노력, 내 정성도 모두 다 옷장에 무심히 걸려있는 티셔츠,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 사실이,
기막히도록 분했다.
억울하고 서럽지만, 이제는 안다.
그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다.
진심을 헤아릴 능력도,
진심을 담아낼 그릇도 없는 인간.
내 마지막 선물은 그 옷이 아니라,
다시는 그의 세계에 발 들이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마음이 이용가치로 판단되는 자리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 그는 마음을 다뤄본 적 없어서 정녕 귀하고 소중한 게 무엇인지 끝내 깨닫지 못했다.
내 마음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그가 감당할 자격이 없었다.
사람을 필요에 따라 계산적으로 고르고,
자기를 위한 도구인 양 소비하는 사람에게
내 시간과 정성은 지나치게 과분했다.
작고 하찮은 그의 세계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왔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