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기대는 순간, 무대는 멈춘다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타인의 노력을 ‘고작 릴스 15초’로 폄하하던 그의 태도는 본업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볍게 소비하는 대중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수천 번을 듣고, 수백 번을 보고, 무대 위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 전부 기억하는 코어팬만이 느낄 수 있는 서늘한 균열.
나는 알 수 있었다.
갈수록 추락하는 곡의 완성도,
뻔하고 울림 없는 가사,
관객의 눈 대신 모니터에만 고정된 시선.
겉보기에 큰 사고만 없다면 그만이라는 안일함은 어느 순간부터 무대 위에 노골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맹신이 그 나태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순한 실수였다면 애정으로 얼마든지 감싸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티스트의 나태함까지 내가 책임질 이유는 없다.
나는 팬이기 이전에,
최선의 무대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는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팬은 구매자인 동시에 잠재적 후원자이다.
금전적 후원만이 아니었다.
관객석을 지키는 팬을 보며 가수가 얻는 그 찰나의 위안을 위해서, 팬은 몸을 갈아 넣어 정신적인 후원을 기꺼이 자처한다.
우리는 서로를 쌍방으로 지탱해 주는 관계이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
나의 이 작은 보탬이 당신을 더 오래 지켜볼 수 있는 동력이 되기를,
그것만이 바라는 전부였다.
그런 우리에게 돌아온 건
수년간 계속되는 ‘박제된 셋리스트’였다.
연차가 쌓이고 공연이 안정 궤도에 오를수록 페스티벌이나 행사에서 어느 정도는 일정한 패턴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중성을 고려해야 하는 업계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셋리스트는 물론이고, 멘트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유지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것은 ‘안정’이 아닌 ‘태만’이었으며,
무대 위에서 돈을 버는 자의 ‘직무유기’였다.
내가 가지 못했던 지방 행사가 있던 어느 날,
친구의 물음에 나는 거침없이 예상 곡 리스트를 써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은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단 세 곡의 순서만 빼고 올 클리어.
그 순간, 나는 남아있던 일말의 희망마저 버리고 말았다.
보지도 않은 공연을 완벽히 예측해 낸 내 모습이 서글펐다. 동시에, 팬이 다음 무대를 기대하지 않게 만드는 그의 안일함이 경멸스러웠다.
포기가 분노로 바뀐 결정적인 순간도 있었다.
“이 곡은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연습도 안 했습니다.”
연습 없이도 척척 맞는 호흡을 과시하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멘트는 내 마음에 비수로 꽂혔다.
그 곡은 수많은 밤을 견디게 해 준, 나의 ’최애곡‘이었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 정도로 아끼지 않는 노래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잦은 실수보다 더 한심했던 건,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얼굴이었다.
연습 없이도 잘 해낸다는 그 착각이,
당신의 가치를 소비하는 소비자 앞에서 내뱉을 자랑인가.
그리고 그걸 팬들이 정말로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깎아먹는 아티스트를 지탱해 줄 팬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올 달콤한 결과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후원자를 자처한 것이었다.
노력을 생략한 채 무대 위에 쉽게 오르도록 돕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더 이상 이 사람에게서 정서적 만족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던 그때, 나는 이별의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남은 시간을 세어나갔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많다.
하지만 재능이 실력의 지속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 차이를 가르는 건 실력이 아닌 태도에서 온다.
당신은 끝내 그걸 배우지 못했고,
나는 너무 늦게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