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서랍을 닫으며. 이제, 다 괜찮다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실체가 드러난 후 며칠이 지나고, 나는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상자를 꺼내왔다. 사진과 이름이 적힌 티켓들이 대부분이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방치만 했던 그 애물단지를, 드디어 정리할 명분이 생겼다.
물건들을 하나씩 들춰보다 보니 10년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처음 사인을 받던 날 손을 덜덜 떨면서 내밀었던 응원 슬로건, 1박 2일 콘서트 때 받았던 이름표, 기념일 케이크 양초에 불을 붙이고 남았던 까맣게 그을린 성냥 한 개비까지.
자잘한 것들을 참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건 당연했다. 그 모든 게 내 청춘이 깃든 조각이었으니까.
100여 장의 티켓, 150번이 넘는 만남.
사인을 받은 티켓도 수십 장.
가족보다 친구보다 더 자주 본 사이였는데도,
그는 끝까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인생을 걸며 매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에게 마지막으로 건넸던 7장짜리 편지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펜으로 죽죽 그어버리고 구기고 다시 썼던 편지지 뭉치들이.
완성된 편지는 이미 오래전에 내 손을 떠났지만, 내 진심이 그에게 닿았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아니, 알게 된대도 이제는 상관없다.
마음이 식어서 떠났지만, 그래도 나중에 꺼내볼 추억으로는 간직하고 싶었던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다.
10년간 쏟아부은 진심이 기만당했음을 알게 된 순간,
더 이상 추억으로도 남겨둘 수 없었다.
물건들을 전부 꺼내고 난 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새 집에 이사를 오게 되면 전시해 두려고 일부러 비워둔 공간이었다. 열심히 모아둔 사진과 포스터를 한쪽 벽면에 가득 붙이고, CD도 잘 보이는 한가운데 놓을 계획이었다. 몇 번이나 구상하고 또 구상했던 공간이었는데.
이 귀한 공간을 그런 누추한 사람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 단 한 뼘도.
앞으로 이곳은 더 가치 있는 기억들로 채워나갈 것이다.
티켓과 사진을 찢어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CD는 케이스와 내용물을 분리했다.
가득 찬 종량제 봉투를 묶어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봉투를 던져 넣고 돌아서니, 남아있던 미련도 다 떠나보낸 듯 홀가분했다.
마음을 털어내는 것보다 물건을 버리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물건들 안에 그때의 내가 남아있어서, 그래서 버리기 어려웠던 걸까.
집에 돌아와 텅 빈 방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이곳을 어떤 걸로 새롭게 채울지,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후회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내 선택을 믿는다.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기에, 이제는 정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