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소 거리의 중심은 콜로나 광장이다. 이 광장은 콜로나 리오네(구)에 자리 잡고 있다. 콜로나 리오네는 코르소 거리를 중심으로 해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다. 길 오른쪽은 몬스 핀키우스라고 불린 핀키오 언덕 방향이며, 왼쪽은 평지인 마르스 평원이다. 언덕 쪽에는 귀족이 도무스라는 호화 저택을 짓고 살았다. 콜로나 리오네의 왼쪽 끝은 판테온이며, 오른쪽 끝은 베르니니 분수가 있는 바르베리니 광장이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이후 로마의 중앙 부분인 콜로나 리오네에는 개발 바람이 불었다. 특히 도무스가 많았던 북쪽 부분이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그 결과 이 부분은 콜로나 리오네에서 떨어져 나가 루도비시 루오네로 독립했다.
콜로나 광장은 거의 직사각형이다. 북쪽에는 치기 궁전이 있다.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관으로 이용됐으며, 지금은 이탈리아 정부 건물이다. 동쪽에는 19세기에 만든 쇼핑 건물인 갤러리아 콜로나가 있다. 2003년 이후 갤러리아 알베르토 소르디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쪽은 페라졸리 궁전 측면이다. 이전에는 교황청 우체국이 있던 건물이다. 서쪽은 베데킨드 궁전이다. 베이이에서 가져온 기둥으로 만든 열주 회랑이 있는 건물이다.
콜로나 광장 한가운데에는 원형 기둥이 하나 서 있다.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이다. 로마 제정 오현제 시대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임 161~180년)가 마르코마니, 콰디, 사르마티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기둥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은 라틴어로는 ‘콜룸나 켄테나리아 디보룸 마르키 에트 파우스티나이’다. 도리아 양식의 기둥이며 나선형 부조가 기둥을 감싸고 있다. 이 기둥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전쟁 승리를 기념해 만들었으며, 트라야누스 기둥을 모델로 해서 제작했다.
콜로나라는 이름은 이 기둥에서 유래했다. 이탈리아어로 ‘기둥’을 콜로나라고 부른다. 콜로나 리오네를 상징하는 문장은 은색 기둥 3개로 이뤄져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에는 기둥을 세운 유래, 연도 등을 새긴 헌정사가 새겨져 있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기에 이 헌정사는 파괴돼 버렸다. 그래서 이 기둥이 황제 재임 기간 중에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180년 그가 죽은 뒤에 건설됐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기둥 인근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기둥이 193년에 완성됐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 기둥이 176~193년 사이에 건설됐다고 추정한다.
원래 기둥 꼭대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이 조각상은 16세기에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성 베드로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의 지시로 만든 동상이었다. 트라야누스 기둥 꼭대기에 세운 성 베드로 청동상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세운 것이었다.
‘철인 황제’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 시대를 마감한 황제였다. 그를 끝으로 로마의 전성기인 팍스 로마나는 막을 내렸고, 그의 아들인 코모두스 황제 시대부터 로마는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의 위치는 하드리아누스 신전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신전 사이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신전은 황제의 아들이었던 코모두스가 죽은 뒤 신으로 승격된 아버지에게 바친 신전이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광장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베데킨드 궁전 자리가 신전 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이 세워진 곳은 제정 시대에 아우구스투스 등 여러 황제를 화장하던 장소 근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 몸체의 높이는 29,6m에 이른다. 기단 부분은 10.1m다. 그래서 기둥의 총 높이는 39.7m다. 기단 부분 3m는 땅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1589년 복원공사 때 땅위로 다시 올라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은 지름 3.7m의 카라라 대리석 27~28개로 만들었다.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 190~200개를 설치하려고 대리석 가운데 부분은 파냈다. 기둥 바깥에 붙은 부조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계단으로 빛이 들어가게 했다.
1세기에서 2세기 초까지 로마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의 노력 덕분에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긴 평화를 누렸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는 평화로웠지만 실제로는 ‘폭풍 전야’나 마찬가지였다. 재임 기간 내내 로마 제국을 순방한 하드리아누스와는 달리 피우스는 이탈리아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피우스는 갈리아, 게르마니아는 물론 어느 지역에서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각 속주 총독에게 군단 지휘권을 넘겨주고 수도 로마를 다스리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 때문에 로마의 적은 힘을 비축하고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즉위해 루키우스 베루스와 공동 통치를 하던 161~166년 동쪽의 숙적 파르티아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전쟁을 선언했다. 로마는 승리를 거뒀지만 큰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파르티아에서 돌아온 군대와 함께 역병이 로마를 덮친 것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성이 안토니우스였기 때문에 이 역병을 안토니우스 역병이라고 불렀다. 또 역병 퇴치법을 알아낸 의사 아일리우스 갈레누스의 이름을 따 갈레누스 역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홍역이나 천연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병은 165~180년 사이 15년 동안 로마를 괴롭혔다. 이 기간 동안 로마 제국 전역에서 700만~8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도 역병 때문에 죽었다.
비슷한 시기에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대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비스와 강 어귀에서 살던 고트 족이 남동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북쪽과 동쪽에 살던 여러 게르마니아 부족이 압박을 받고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갈리아와 다뉴브 강을 넘어 로마 국경을 침범하게 됐다.
고트 족의 대이동이 무엇 때문에 시작됐는지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어찌 됐든 고트 족에 밀린 다양한 게르마니아 부족은 로마 제국 국경선 곳곳을 넘었다. 이 중에서 마르코마니 족과 콰디 족은 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이 동시에 로마로 쳐들어가기로 공모했다는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대군을 이끌고 직접 전선에 나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72년 마르코마니 족을, 174년 콰디 족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이듬해에는 사마르티아 족을 누르고 평화 조약을 맺어 전쟁을 끝냈다. 그는 176년 로마로 돌아가 두 차례에 걸쳐 개선식을 거행했다. 첫 번째는 콰디 족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두 번째는 사마르티아 족을 누른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그는 개선식을 마친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 건립을 시작했다.
콰디 족과 마르코마니 족은 177년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출정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델이 된 인물이었다. 전쟁은 로마에 유리하게 진행됐다. 게르마니아 족은 멀리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 중이던 180년 3월 17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판노니나의 시르미움 근처에 설치한 군 숙영지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세르비아의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지경이다. 사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신으로 승격됐으며 유해는 로마로 돌아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장됐다. 410년 로마를 침공한 서고트 족이 영묘에 있던 모든 유해 항아리를 테베레 강에 버리는 바람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해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은 선황이었던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에서 승리한 뒤 만든 트라야누스 기둥을 모방해 만들었다. 부조의 조각은 트라야누스 기둥보다 섬세하지 못해서 햇빛으로 명암이 생길 때에 잘 볼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의 나선형 부조는 황제가 치른 전쟁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카르눈툼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다뉴브 강을 건너는 장면으로 부조는 시작한다.
카르눈툼은 로마 군단의 성채가 있던 곳이었다. 서기 50년에는 판노니아 군단 사령부가 이곳에 설치됐다. 1세기 이후에는 판노니아 고지 수도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인구는 5만여 명으로 매우 큰 도시였다. 오스트리아 빈과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사이에 있는 카르눈툼 고고학 공원에 당시 유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 페트로넬 카르눈툼과 바트 도이치 알텐부르크 인근이다.
부조는 두 차례 전쟁을 설명하고 있다. 정확한 연대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마르코마니 족과 콰디 족을 상대로 한 172~173년의 전쟁을 묘사한 부분이 아래쪽 절반으로 추정된다. 황제가 174~175년 사마르티아 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쟁을 묘사한 부분은 위쪽 절반이다.
부조에는 ‘콰디 족 영토에서 일어난 비의 기적’이라는 일화가 새겨져 있다. 로마군이 콰디 병사들에게 포위돼 전멸 위기에 몰렸을 때 엄청난 폭우가 내려 로마군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중세 시대에는 돈을 내면 기둥에 올라갈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제법 인기를 끌었는지 기둥 입장 관리권을 경매로 팔기도 했다. 지금은 기둥에 올라갈 수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 앞에는 자그마한 분수가 있다. 1575~77년 유명한 분수 건축가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하고 로코 로시가 만든 피아자 콜로나 분수다.
교황 비오 4세(재임 1559~65년)와 비오 5세(재임 1566~72년)는 고대 로마 시대 수로 아쿠아 비르고를 복원해 아쿠아 베르지네를 완성했다. 두 교황의 의지와 노력 덕분에 수로는 옛 샘과 다시 연결돼 원래 수질을 되찾게 됐다. 이어 로마 전역에 아쿠아 비르고에 연결되는 소규모 지하 수도관이 만들어져 시내 곳곳의 분수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됐다. 두 교황의 뒤를 이은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는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고친 뒤 자신의 수도사 시절 이름을 붙여 아쿠아 펠리차라고 불렀다.
아쿠아 베르지네의 물은 처음에는 트레비 분수로 흘러갔다. 이어 산 세바스티아노첼 언덕 언저리의 물 저장고 두 곳에 들어갔다가 상수도관을 통해 콘도티 거리, 코르소 거리와 베네치아 광장,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 앞까지 흘러갔다.
아쿠아 베르지네를 정비한 교황청은 1570년 11월 4일 ‘샘 위원회’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을 추기경만으로 구성한 이 위원회의 목적은 하나였다.
‘로마에 분수를 만들자!’
위원회는 아쿠아 베르지네를 이용해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로마의 주요 지점에 새로운 공공 분수를 만들기로 했다. 주로 로마의 북서쪽인 옛 마르스 평원 지역이었다. 당시에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당시 위원회가 고른 분수 설치 장소는 포폴로 광장, 콜로나 광장 등 열 곳이었다.
궁전, 저택, 교회를 만들 때처럼 분수 건설에 필요한 석재는 먼 산에 있는 채석장에서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이나 시내에 산재한 고대 로마 공중목욕탕에서 뜯어오는 게 간편하고 쉬웠다.
위원회에서 계획했던 분수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포폴로 광장의 분수였다. 이 분수는 1572년에 완공됐다. 2년 뒤에는 나보나 광장에 일부 분수가 건설됐다. 콜로나 광장 분수는 1575년 공사를 시작해 2년 뒤 완성됐다.
분수 건설에서 가장 명성을 날린 사람은 제노바 출신의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였다. 그는 16세기 후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공사를 총괄 감독해 돔을 완성하기도 했고, 로마 곳곳에 수많은 교회, 저택, 궁전을 지은 건축가였다. 얼마나 많은 분수를 건설했던지 포르타는 공식 분수 건축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모두 14개에 이르는 분수를 만들었다.
당시 건설된 다른 분수처럼 피아자 콜로나 분수도 로마인에게 깨끗한 식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로마인은 테베레 강의 오염된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지아코모의 원래 계획은 콜로나 광장 분수에 작은 동굴을 만든 뒤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바다의 신 마르포리오의 조각상을 분수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동굴 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분수가 보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 만들어진 분수는 단순했다. 분수의 팔각형 수조는 그리스 키오스 섬에서 가져온 분홍색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지아코모는 성 베드로 대성당 출입구의 틀도 이 대리석을 사용해 제작했다.
지아코모는 수조 주변에 사자 머리 16개를 덧붙였다. 가운데 발판에는 둥근 석재 물통(바스크)을 설치했다. 물은 이 물통을 지나 수조로 들어갔다. 1830년 건축가 알레산드로 스토키는 원래 중앙에 있던 물통을 제거하고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현재 수조를 새로 설치했다. 그는 여기에 조개껍질로 꼬리를 둘러싼 돌고래가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조각을 수조 끝에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