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 코르소(3)-도리아 팜필리 궁전

by leo


포폴로 광장에서 시작한 코르소 거리가 베네치아 광장으로 빠져나오면 플레비시트 거리와 직각으로 만나게 된다. 두 거리의 모퉁이에 엄청나게 큰 저택이 있다. 지금은 도리아 팜필리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는 도리아 팜필리 궁전이다. 로마의 개인 소유 갤러리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도리아 팜필리 갤러리의 전시품 중 최고 걸작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다. 이 그림은 도리아 팜필리 궁전이 생기기 전에 그려졌지만, 넓게 보면 그림에서 궁전의 역사가 시작한다.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심복이자 연인으로 알려진 올림피아 마이달키니가 벨라스케스에 의뢰해 만든 것이다. 올림피아는 인노첸시오 10세의 형수였다.

올림피아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인노첸시오 10세에게는 조카인 카밀로 팜필리였다. 그는 어머니와 삼촌의 불륜 관계를 미워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1647년 알도브란디니 가문의 딸인 올림피아 보르게세와 결혼했다. 카밀로는 첫 번째, 올림피아는 두 번째 결혼이었다.


올림피아 보르게세는 카밀로와 결혼하면서 지참금으로 수많은 그림과 프라스카티 등에 있는 여러 채의 저택, 코르소 거리에 있는 광활한 토지, 그리고 알도브란디니 궁전을 가져갔다. 그녀의 재산은 이후 상속을 통해 팜필리 가문으로 넘어가게 됐다.


카밀로 부부는 1654년부터 알도브란디니 궁전에서 살았다. 그들은 저택을 대규모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웃에 있던 집들과 수도원을 사들여 부수고 새 건물을 늘렸다. 예수회 측이 그들의 행동에 불쾌한 뜻을 전했지만 교황의 조카인 카밀로를 막을 수는 없었다.


카밀로가 1666년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두 아들 지오반니와 베네데토가 저택 확장 사업을 이어갔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도리아 팜필리 저택의 틀이 마련됐다.


1760년 팜필리 가문은 아들을 낳지 못해 대가 끊기고 말았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은 카밀로와 올림피아 보르게세의 막내딸인 안나 팜필리와 제노바 출신의 귀족인 남편 지오반니 안드레아 4세 도리아 란디 왕자였다.


지오반니는 대가 끊긴 처가의 명맥을 이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그의 성에 팜필리 가문의 성을 붙여 부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도리아 팜필리 란디라는 새로운 가문의 이름이 탄생했다.


도리아 팜필리 궁전은 1767년 안드레아 도리아 팜필리와 사르디니아 왕조의 후손인 카르기나노 왕자 루이 빅토르의 결혼을 앞두고 재건축됐다.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는 1849년 이 궁전을 독립운동 본부로 사용했다.


이 무렵 도리아 팜필리 궁전에는 엄청나게 많은 미술품이 보관돼 있었다. 16세기 도리아 가문, 팜필리 가문, 란디 가문, 알도브란디니 가문이 결혼이나 상속 등을 통해 모은 그림, 가구, 조각상 등이었다. 여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임 1644~55년)가 수집해 조카 카밀리오 팜필리에게 물려준 그림과 가구도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외에도 티티아노, 라파엘로, 카르바지오 등 대가들의 작품도 적지 않다.


도리아 팜필리 궁전을 갤러리로 바꾼 사람은 도리아 팜필리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유일한 후손이었던 오리에타 포그손 도리아 팜필리이었다.


오리에타는 필리포 도리아 팜필리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간호사였다. 아버지 필리포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던 도중 사고로 다쳤을 때 간호해주던 여인이었다.


아버지 필리포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오리에타는 파시스트 카드를 만들지 못해 어릴 때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필리포가 무솔리니를 지지하는 깃발을 흔들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파시스트를 지지하는 군중이 도리아 팜필리 궁전에 몰려와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오리에타는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히기도 했다.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는 아픔도 맛봤다.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한 이후에야 겨우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혁명을 꿈꾸던 노동자 계급이 로마를 휩쓸고 다니던 때여서 오리에타는 금발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어머니와 함께 트라스테베레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오리에타는 헤어졌던 아버지를 그곳에서 우연히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필리포는 당시 독일의 나치가 사령부로 사용하던 트라스테베레의 빌라 도리아 팜필리를 폭파시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살다시피 했던 곳이어서 지하 터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일이 전쟁에서 항복하는 바람에 빌라 도리아 팔필리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필리포 가족은 전쟁이 끝난 뒤 도리아 팜필리 궁전에서 다시 살 수 있게 됐다. 이 궁전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아직 로마의 상황이 불안한 때여서 오리에타는 안전을 위해 아드리아 해의 도시 안코나로 갔다. 오리에타는 그곳에서 당시 해군 장교였으며 미래의 남편인 영국인 프랑크 포그슨을 만났다. 미국에서 유학을 가서 석유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포그슨은 오리에타의 귀족 신분과 엄청난 재산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이브 때 포그슨을 로마의 집으로 초대했다.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고 ‘코르소 거리 304번지’라는 주소만 적어 주었다. 로마에 간 포그슨이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가문도 제법 부자였지만 도리아 팜필리 가문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Doria_Pamphilj_Court_yard (2).jpeg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4년 뒤였다. 오리에타가 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고생하던 아버지를 돌봐야했기 때문이었다.


포그슨과 오리에타는 필리포가 세상을 떠난 후인 1958년 결혼했다. 포그슨은 장인의 유언을 받아들여 성에 도리아 팜필리를 덧붙였다. 그의 이름은 프랑크 포그슨 도리아 팜필리가 됐다.


오리에타는 작고한 부친에게서 모든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았다. 코르소 거리의 도리아 팜필리 궁전과 나보나 광장의 성 아그네스 성당, 제노바의 여러 저택은 물론 아풀리아에 있는 성, 포르토피노에 있는 13세기 궁전 등이었다.


부부는 상속세 등을 해결하느라 나보나 광장의 성당 등은 팔아야 했다. 또 트라스테베레의 야니쿨룸 언덕에 있는 22만 평 규모의 빌라 도리아 팜필리도 이탈리아 정부에 넘겨줘야 했다.


Michelangelo_Merisi_da_Caravaggio_-_Rest_on_Flight_to_Egypt_-_WGA04096.jpg


부부는 이후 조상의 유산을 지키면서 복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수십 년 동안 대대적 복구 작업을 벌여 도리아 팜필리 궁전의 많은 방을 덮고 있던 먼지 종이를 치워버렸다. 그리고 1996년 도리아 팜필리 궁전을 대중에게 개방했다.


도리아 팜필리 궁전의 방은 무려 1천 개를 넘는다. 로마에서 규모로는 3대 궁전에 포함될 정도다. 면적만 놓고 보면 성 베드로 대성당의 3분의 2에 이르고, 콜로세움 면적과 비슷하다. 입장료만 내면 갤러리를 둘러볼 수 있다. 국립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게 단점이다. 갤러리에서는 화려한 미술품을 배경으로 바로크와 르네상스 음악 연주회, 그리고 패션쇼도 수시로 열린다.


부부는 1960년대 초 영국 고아 두 명을 입양했다. 조너선 도리아 팜필리와 게신느 도리아 팜필리였다. 도리아 팜필리 가문에서는 400년 전부터 아들과 딸을 하나씩 입양하는 게 관례였다. 1998년 포그슨, 2000년 오리에타가 죽은 뒤 모든 재산은 두 남매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두 입양아는 부모의 뜻과는 달리 재산 분쟁을 빚었다. 게신느는 이탈리아 예술 전문가와 결혼해 네 딸을 두었다. 조나선은 동성애자였다. 그는 정식결혼하지 않고 대리모를 통해 두 아이를 낳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이탈리아에서 대리모 출산은 불법이었다. 그래서 게신느는 조나선의 두 아이에게 상속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소송을 진행했다. 분쟁의 대상이 된 재산은 15억 달러 정도였다. 게신느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Galleria-Doria-Pamphilj-Sala-da-ballo.jpg from 도리아 팜필리 궁전 홈페이지


“대리모가 언젠가 두 아이를 이용해 재산을 빼앗아 갈 수 있다.”


조나선은 여기에 맞서 이렇게 주장했다.


“고아였던 우리가 도리아 팜필리 가문에 입양돼 엄청난 행운을 누렸듯이 두 아이도 똑같은 운명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도리아 팜필리 가문의 정식적 유산이다.”


법원은 조너선의 손을 들어줬다. 두 사람은 법원 판결에 승복했다. 하지만 앞으로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또다시 점화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