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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12. 2020

비아 코르소(4)-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


도리아 팜필 궁전 옆에는 작은 성당이 하나 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이다. 규모, 그리고 건축물의 미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눈길을 끌만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 장소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은 로마에 간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2년 동안 머물렀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기를 기다리면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는데, 한 건물의 지하에 갇혀 있었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의 지하실이 바로 그곳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성 누가가 이곳에서 사도 바울과 이야기를 나눈 뒤 글을 정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누가가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 초상화를 그렸다는 전설도 전한다. 이곳에는 실제로 성모 마리아 그림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13세기 그림으로 본다. 어쨌든 성모 마리아 그림은 많은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전설도 있다. 성 베드로와 리모게스의 첫 주교였던 사도 마르시알이 포로 로마노에 있던 감옥 툴리아눔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사도 바울과 함께 이곳에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다. 성 베드로가 방문자들에게 세례를 주려고 했을 때 기적처럼 우물이 솟아올랐다는 전설도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성 베드로는 1세기 사람이었던 반면 성 마르시알은 3세기에 살았던 인물이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전하는 다른 성당이 로마에 있다. 바로 테베레 강 인근 폰테 시스토 다리와 폰테 가리발디 다리 사이에 있는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이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은 방을 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판을 기다리면서 로마 최초의 기독교인을 모아 가르쳤다.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은 사도 바울이 신도들을 가르쳤던 장소에 지었다고 한다. 그가 살았다고 하는 방은 여전히 보존돼 있다. 


출처가 불분명한 2세기 자료에는 사도 바울이 모임을 갖기 위해 곡물저장고를 빌렸다고 돼 있다. 1978~82년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 뒤편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곡물저장고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


사도 바울의 직업은 가죽 천막 제조업자였다. 테베레 강을 따라 가죽 무두장이들이 일했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천막 제조업자인 바울이 이곳에서  살았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이 성당이 처음 만들어진 게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4세기 무렵 교황 실베스터 1세가 사도 바울이 살던 방을 바꿔 만든 예배당을 교회로 건설했다고 한다. 첫  기록은 1186년에 나온다. 현재 성당 건물은 18세기에 지은 것이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교회 자리에는 원래 1세기 하드리아우스 황제 시대에 만든 다층 건축물이 서 있었다. 그 건축물이 인술라였는지 아니면 공공건물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인슐라는 1층에는 상업용 공간, 2층 이상에는 주택을 넣은 주상복합건물이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인술라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현재 교회가 있는 곳은 기둥을 세운 폭 28m 정도의 공간의 일부분이다. 이곳에는 석회암 기둥 네 줄이 비아 라타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천장은 원래 10m 높이였다. 그래서 원래 창고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는다. 3세기 무렵 건물 중간 5.5m 지점에 천장을 넣어 1개 층을 두 개로 나눴다. 또 각 층 기둥 사이에 벽돌 벽을 쌓아 방을 여러 개로 나눴다. 마치 작은 가게를 넣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의 기원은 디아코니아에서 시작한다. 디아코니아는 현대적 용어로 따지면 사회봉사센터였다. 이곳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 같은 생활필수품을 나눠주었다. 이런 일을 맡은 사람을 디아코누스라고 불렀다. ‘하인’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단어다. 대부분 디아코니아는 나중에 가정교회인 티툴루스로 발전했다. 

이곳에 처음 디아코니아를 만들었을 때 여러 방 중에서 하나는 애프스(교회에서 반원형으로 움푹하게 들어간 부분)를 만들어 작은 예배당으로 이용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 기독교인이 처음 예배를 드린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그들은 지하 통로를 통해 예배당으로 오갔다. 


언제 디아코니아가 됐는지 연도는 알 수 없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 건립 연도는 4세기로 추정된다. 그런데 증거가 없다. 교회 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프레스코 그림은 대개 7~11세기 작품이다. 일부 팔림프세스트와 다른 문서 조각을 보면 6세기라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팔림프세스트는 원래의 글을  바탕으로 새로 쓴 고대 문서를 말한다.


17세기 문서를 보면 교황 세르지오 1세(재임 687~701년) 시기를 거론한다. 그는 순교한 성 아가피투스를 이 교회에 모셨다고 한다. 로마 원로원 의원 알베리크의 누이 테오도라의 남편인 테오필락트가 706년에 성당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됐든 이 건물이 성당으로 처음 사용됐을 때에는 사도 바울과 성 누가에게 봉헌한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무렵 이 성당은 비잔틴 수도원이 됐다. 비잔틴 제국에서 성상파괴를 피해 달아난 난민 수도사들이 이곳에 살았다. 지하 프레스코 그램에는 비잔틴의 영향이 남아 있다. ‘에페수스의 일곱 잠꾸러기’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250년 무렵 로마 황제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에페수스 외곽 동굴에 숨어 살았던 일곱 형제에 대한 전설을 담고 있다. 


이곳에 제대로 된 성당 건물이 지어진 것은 11세기 무렵이었다. 그 이유는 홍수였다. 비아 라타, 현재의 코르소 거리는 고대 로마 시대에 리미니까지 이어지는 비아 플라미니아의 시내 부분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도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도로 표면이 5m 정도 낮았다. 테베레 강보다 높지 않았다.


비아 라타의 가장 큰 문제는 테베레 강 범람이었다. 수시로 홍수가 나서 이 거리에 있는 많은 건물은 늘 물에 잠겼다. 여러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1049년 교황 레오 9세는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 기반을 더 높여 새로 지었다. 물론 다른 성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에 원래 있었던 작은 예배당을 포함해 옛 수도원의 일부분은 지하로 바뀌어 보존됐다.


비잔틴 수도사들은 10세기 무렵 성당을 떠났다. 성당은 15세기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됐다. 성당 제단 위에 걸린 성모 마리아 그림의 높은 인기 덕분이었다. 1408년 성모 마리아의 유령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성당은 1491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지시에 따라 새로 지어졌다. 재건축 과정에서 교회 출입문을 바꾸기 위해 아르쿠스 노부스(노부스 개선문)을 없애버렸다. 교회 재건축을 담당한 추기경은 로드리고 드 보리아였다. 그는 나중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는 사람이다. 1580년에는 교회에 탑이 덧붙여졌다.


아르쿠스 노부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헌정 이유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먼저 293년 데케날리아를 맞아 황제에게 헌정했다는 주장이 있다. 데케날리아는 10년마다 황제가 주최한 루디(경기대회)였다. 이 축제의 유래는 BC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시작한다. 원로원은 그에게 종신 최고 권력을 부여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10년 동안만 받겠다고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10년이 지나면 축제를 열어 모든 권력을 시민의 손에 돌려줬다. 시민들의 그의 겸손한 행동을 칭찬하면서 즉시 10년 동안의 권력을 그에게 다시 맡겼다. 이것이 나중에 다른 황제들의 시대에 데케날리아라는 축제로 바뀌었다. 

두 번째는 303~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공동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아르쿠스 노부스(새 개선문)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이 거리에 이미 클라우디우스 개선문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639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교회를 새로 지으라고 지시했다. 교황은 사도 바울과 성 베드로의 전설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교회 지하 공간에 특히 신경 써서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교황은 1661년 지하 예배당을 다시 봉헌했다. 예배당에는 코시모 판첼리가 만들어 대리석 부조로 장식한 새 제단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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