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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14. 2020

포폴로 광장(1)

광장 조성 역사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코르소 거리 북쪽 끝에는 한가운데에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 광장이 보인다. 웅장한 장식을 갖춘 커다란 문도 하나 서 있다. 바로 피아자 포폴로(포폴로 광장)와 포르타 델 포폴로(포폴로 문)이다.


문과 광장 중에서 먼저 생긴 것은 문이었다. 포폴로 문은 원래 3세기 군인황제 시대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만들 때 설치한 문이었다. 나중에 호노리우스 황제가 성문을 반원형으로 새로 고쳐 만들었다. 


15세기 말에는 교황 식스토 4세(재임 1471~84년)가 호노리우스의 성문을 부수고 문을 재건했다고 전해진다. 16세기 중반에는 교황 비오 4세(재임 1559~65년)가 건축가 나니 디 바치오 비지오에게 문을 새로 고치라고 지시했다. 그의 뜻은 이런 것이었다.


“포폴로 광장을 통해 로마에 첫 걸음을 내딛는 순례자에게 깊은 인상을 줄 관문을 만드시오.” 


포폴로 문은 중세 시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서유럽에서 온 순례자와 여행객들이 로마에 들어오려면 이 문을 거쳐야 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거쳐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도 있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설치는 무슬림 해적에 붙잡혀 노예로 끌려갈 위험이 컸다. 


포폴로 문은 아우렐리아누스 시대에는 ‘플라미니아 가도의 출발점’이라는 뜻에서 포르타 플라미니아로 불렸지만 나중에 포르타 델 포폴로로 바뀌었다. 



포폴로 문은 1655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프로테스탄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 로마에 망명했을 때 통과한 문이기도 했다. 


당시 북유럽의 강국이었던 스웨덴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는 1632년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가톨릭 병사가 쏜 흉탄을 가슴에 맞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그녀에게 가톨릭은 사실상 원수와 같은 종교였던 셈이다. 


그런데 크리스티나는 왕 자리에 오르기 이전부터 가톨릭 교리에 마음이 끌렸다. 고민하던 그녀는 왕 자리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했다. 그래서 스웨덴을 22년간 통치한 뒤 1655년 왕위를 샤를 구스타프에게 넘겨주고 퇴위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중심국가인 스웨덴 여왕이 개종을 위해 로마에 온다고 하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임 1655~67년)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여왕을 환영하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 당대 최고 건축가 베르니니에게 포폴로 문을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여왕은 새로 고친 포폴로 문을 통해 로마에 입성했다. 성대한 환영에 감명 받아서였는지 여왕은 이후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 


베르니니는 성문에 ‘Felici fausto ingressui’라는 라틴어 문구를 새겼다. 크리스티나 여왕을 환영한다는 뜻의 ‘행복하고 축복받은 도착을 위해’라는 내용이다. 그는 또 교황의 기분을 살려주기 위해 교황 가문을 상징하는 참나무 가지와 스웨덴 왕가의 상징인 밀 이삭도 새겨놓았다. 


중세 시대에 포폴로 문을 지나면 지금처럼 넓게 정비된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작고 지저분한 공터만 보일 뿐이었다. 로마 시내로 이어지는 길은 코르소 거리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좁고 더러운 골목길 수준이었다. 지금 포폴로 광장에서 뻗어나가는 비아 디 리페타 거리와 비아 델 바부이노 거리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아 디 리페타 거리는 16세기 초 교황 레오 10세(재임 1517~19년)의 지시로 건설됐다. 당시에는 교황의 이름을 따 비아 레오니아라고 불렀다. 비아 델 바부이노 거리는 교황 클레멘스 7세(재임 1523~34년)의 지시 덕분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비아 클레멘티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525년 성년(聖年·주빌리)을 맞아 로마에 몰려든 순례자가 너무 많아 비아 코르소가 너무 붐볐기 때문에 이 길을 만든 것이었다. 


현재의 둥근 포폴로 광장은 19세기에 조성됐다. 1811~22년 건축가 주세페 발라디에르가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꾸몄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곳은 비아 플라미니아가 가운데를 지나가고 주변은 좁은 사다리꼴 모양의 공터였다. 


포폴로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오벨리스크다. 정식 이름은 ‘오벨리스코 플라미노’이다. 원래 BC 1300년 무렵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BC 10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 정벌을 기념하는 뜻에서 로마로 가져와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워놓았던 것을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가 현재 위치로 옮겼다. 역시 이집트에서 가져온 사자상 4마리가 오벨리스크를 옆에서 지키고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포폴로 광장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서 유래한다. 포폴로 문을 마주보고 섰을 때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다. 이 성당은 지역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 건설했다. 


성당에 포폴로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나온다. 하나는 ‘포폴로’라는 단어가 ‘백성’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성당이 건설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거지가 형성됐다. 그래서 포폴로라는 이름이 성당에 붙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포플러 나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은 재미있는 전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자리는 원래 제정 시대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의 무덤이었다고 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고 전설에 따른 것이다. 16세기 말 수사였던 지아코로 알베리치가 글로 써서 남긴 것을 17세기 수사 암브로기오 란두치가 책에 기록한 내용이다.


‘네로는 68년 에스파냐에서 갈바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로마에서 도망쳤다. 원로원도 등을 돌려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고 근위대도 갈바를 지지하기로 뜻을 모은 상황이었다. 


네로는 로마에서 6km 정도 떨어진 외곽 지역에 숨었다. 그는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외롭게 자살하고 말았다. 아무도 그를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에 묻어주려 하지 않았다. 무덤에 묻히기는커녕 테베레 강에 내버려져 물고기 밥이 될 판이었다. 


이때 네로의 어릴 적 유모가 용감하게 그의 시신을 화장해 네로가 속한 도미티아누스 씨족의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그의 묘지가 정확히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르스 평원을 내려다보는 핀피아누스 언덕이었다는 사실만 알려졌다. 오늘날 포폴로 광장 한쪽 구석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네로 묘지 근처에서 포플러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중에 나무가 커지면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네로가 묻힌 곳이 포플러나무 근처래. 나무는 네로의 정령이라는구먼.” 


사람들은 밤에 또는 혼자서 광장에 다니기를 꺼렸다. 네로의 정령이 악마들을 모아 광장에 나타나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죽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광장에 사람이 다니지 않게 되자 로마에 어려움이 닥쳤다. 로마 외곽에서 생산한 농산물이나 각종 물자를 이곳을 통해 수송해 와야 하는데 사람들이 통행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황 파스칼 2세(재임 1099~1118년)는 신도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사흘간 단식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날 지쳐 쓰러진 그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네로의 정령과 악마들로부터 포폴로 광장을 구하는 상세한 방법을 일러 주었다. 


1099년 사순절의 세 번째 일요일 다음 화요일에 교황은 모든 사제와 로마인을 모아 행진을 시작했다. 머리에 십자가를 높이 올려들고 비아 플라미니아를 따라 광장까지 걸어갔다. 그는 네로의 정령을 쫓아내기 위해 광장에서 퇴마 의식을 거행했다. 의식 마지막에는 십자가로 포플러나무를 뿌리까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에서 엄청난 괴음이 터져 나오더니 많은 악마가 튀어나와 곳곳으로 달아났다. 이모습을 본 교황은 신도들에게 땅을 파라고 했다.


“성모 마리아께서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파라고 하셨소.”


“유골이 있습니다. 네로 황제가 아닐까요?”


“유골을 테베레 강에 버리도록 하시오.” 


교황은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큰 돌을 하나 가져다 놓고 예배를 드렸다. 돌은 임시로 만든 예배당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는 첫 예배를 드리고 사흘 만에 간이 예배당을 하나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다.


이후 광장에 네로 정령이 나타나거나 악마를 데리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성모 마리아에게 예배당을 바친 자리에 정령이나 악마가 함부로 나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 교회가 생긴 것은 1542~47년 교황 바오로 3세 때였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은 123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재임 1227~41년) 때 봉헌됐다. 그는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던 성모 마리아 그림을 이 성당으로 옮겼다. 그림은 지금 성당의 주제단 위에 걸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성 누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전설이 전한다.


1230년 로마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이어 엄청난 역병이 번져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역병을 퇴치할 방안을 고민하던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꿈을 꾸었다.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라테라노 대성당의 산크타 산크토룸 예배당에 있는 나의 그림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으로 옮기시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오.”


교황은 다음 날 추기경들과 성직자, 모든 로마 시민을 라테라노 대성당에 모이게 했다. 거기서 신성한 예배의식을 거행한 뒤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으로 옮겼다. 


추기경들과 성직자, 모든 로마 시민은 그림 뒤를 따라가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성모 마리아 그림이 새 보금자리에 안착하자마자 기적처럼 로마에서 역병은 사라졌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순례자가 기적을 낳은 성모 마리아 그림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 성당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들이 만든 눈부신 작품 여러 점이 숨겨져 있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성 베드로’, 베르니니가 만든 조각상 ‘다니엘’ 등이다. 지금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 있는 라파엘로의 ‘교황 율리우스 2세 초상화’도 원래 이 성당에 걸기 위해 그린 것이었다. 


성당 바닥에는 많은 묘지가 설치돼 있다. 바닥을 따라가는 복도는 훌륭한 장례 미술품으로 가득 차 있다. 11세기 말부터 이 성당은 교황청 사제, 귀족은 물론 르네상스 시대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명 인사의 안식처로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15~19세기의 빼어난 장례 미술품과 무덤이 교회를 가득 메우게 된 것이다.


치기 예배당은 건물 자체가 훌륭한 예술품이다. 16세기 은행가 아고스티노 치기는 당시 최고 건축가이자 화가였던 라파엘로에게 이 예배당에 ‘천지창조’ 모자이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라파엘로는 모자이크 완성 직전 세상을 떠났다. 이 예배당에는 또 르네상스 시대 유명 조각가 로렌제토가 만든 『구약성서』의 선지자 요나와 엘리야의 조각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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