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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17. 2020

포폴로 광장(2)

쌍둥이 성당 미라콜리와 몬테산토의 역사



포폴로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오벨리스크 뒤쪽에 서 있는 쌍둥이 성당이다. 두 곳을 마주보고 섰을 때 오른쪽 성당이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고  왼쪽 성당이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몬테산토의 성모마리아) 성당이다. 


나란히 서 있지만 두 성당의 주소는 다르다. 미라콜리 성당 주소는 캄포 마르지오 리오네 비아 델 코르소 528이다. 몬테산토 성당은 캄포 마르지오 리오네 비아 델 바부이노 197이다. 몬테산토 성당은 로마의 ‘예술인 성당’이다. 

1655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임 1655~67년)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오기로 한 크리스티나 여왕을 환영하기 위해 포폴로 문을 재건했다. 여왕을 영접하러 간 교황은 포폴로 광장이 전체적으로 너무 썰렁하다는 걸 알고 실망했다. 포폴로 문을 지나면 오벨리스크가 하나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황량한 풍경이 나타날 뿐이었다. 


알렉산데르 7세는 세 거리가 갈라지는 지점에 쌍둥이 교회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포폴로 문을 지나 로마에 들어오는 사람을 환영하는 뜻에서 광장에 기념이 될 만한 배경 건물을 세우자는 게 그의 뜻이었다. 그렇게 하면 광장의 경치가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두 성당을 짓기 위한 초석은 1662년 추기경 지롤라모 가스탈디가 놓았다. 그는 성당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대가로 개인 재산을 건설비로 내놓았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17세기 로마를 대표하는 바로크 건축가 카를로 라인달디였다. 로마의 4대 메이저 성당 중 한 곳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건축에도 참여한 인물이었다.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공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여기서 다시 아름다운 전설이 등장한다. 포폴로 광장 인근에는 당시 빈민들이 살던 거주지가 밀집해 있었다. 이곳에 가난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공사가 재개되지 않자 그녀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러 해 뒤 여인은 나이가 들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죽기 전에 교황청에 저금한 돈을 들고 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 돈은 제가 평생 모든 재산입니다. 겨우 150스쿠디에 불과합니다. 적은 돈이지만 성당을 짓는 데 보태주십시오.”


여인의 이야기에 감동한 추기경 가스탈디는 교황 클레멘스 10세(재임 1670~76년)를 찾아갔다.


“제가 성당 공사를 다시 추진하겠습니다. 1675년 성년이 되기 전에 성당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교황은 추기경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가스탈디는 그때부터 끊이지 않고 1677년까지 공사를 이어갔다. 성당은 1678년 완성됐고, 가스탈디가 죽기 4년 전인 1681년 봉헌식을 치를 수 있었다. 쌍둥이 성당은 이미 8년 전에 완성된 상태였다.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


미라콜리는 ‘기적’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성당 제단 위에 걸린 그림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해서 ‘기적의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됐다. 


포폴로 광장에서 서쪽 테베레 강 근처에 아치형 벽감(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었다. 이곳에 성모 마리아 그림이 걸려 있었다. 누가 언제 그렸고, 왜 여기에 걸어놓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325년 한 여인이 실수로 테베레 강에 아기를 떨어뜨렸다. 여인은 성모 마리아 그림으로 달려가 울부짖으며 기도를 드렸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이 일이 발생한 연도는 1525년이라고 한다.


“성모 마리아님! 저는 수영을 못 합니다. 물에 빠진 아기를 구해주십시오.”


여인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놀랍게도 아기는 강변으로 밀려나와 목숨을 건졌다. 고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테베레 강에 떠내려가다 강변으로 밀려나와 늑대 루파의 젖을 먹고 목숨을 건진 일과 똑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여인은 살아난 아기를 안고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뜨렸다.


“성모 마리아 그림에 기도를 드렸더니 테베레 강에 빠진 아기를 구해주셨어요.”


소문은 삽시간에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이후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여인, 병에서 낫기를 바라는 환자, 큰돈을 벌려는 사업가, 관직에 오르려는 청년 등 많은 로마인은 예배당에 몰려 성모 마리아 그림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이곳에 예배당이 건설됐다. 장소는 지금의 비아 안젤로 브루네티 거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라콜리 성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오른쪽 골목인 비아 디 리페타 거리로 들어가 100m 정도 걸어가면 직각으로 지나가는 비아 안젤로 브루네티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예배당에 있던 그림은 나중에 미라콜리 성당으로 옮겨졌다. 

예배당은 1515년 산 자코모 데글리 인쿠라빌리 병원을 운영하는 종교단체에 넘어갔다. 특이하게도 이 병원은 성병인 매독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곳이었다. 코르소 거리에 위치한 이 병원 자리에는 지금 산 자코모 인 아우구스타 성당이 있다. 예배당은 1628년에는 ‘성 프란체스코 제3수도회’로 넘어갔다. 


1530년 테베레 강이 범람해 예배당은 물바다로 변했다. 16세기에 홍수는 로마의 골칫거리였다. 이 때문에 1590년 성모 마리아 그림은 산 자코모 예배당으로 옮겨졌고, 예배당 자리에는 모작품이 걸렸다. 이 때문에 지금 숭배를 받는 성모 마리아 그림은 두 개가 됐다. 하나는 미라콜리 성당에, 다른 하나는 산 자코모 성당에 걸려 있다.


미라콜리 성당은 완공 이후 실제 예배를 드리는 장소라기보다는 기념비적인 건물로 역할을 수행했다. 


1793년에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교회 소속인 ‘성체회’에서 이 성당을 관리했다. 이때에는 단순히 예배당이었다. 1815년에는 ‘성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 회’에 관리권이 넘어갔다. 베네치아 광장 인근 산 그레고리오 타우마투르고 성당에 근거지를 둔 종교단체였다. 지금 이 성당은 사라지고 없다.


1915년 ‘베타람 예수 성심회’가 관리권을 얻은 이후에야 미라콜리 성당은 목회 기능을 얻게 됐다. 이 종교단체는 미라콜리 성당을 안젤로 구스토데 성당의 로마 본부로 사용했다. 나중에 안젤로 구스토데 성당이 없어지자 미라콜리 성당으로 본부를 이전한 뒤 인근의 비아 안젤로 브루네티 거리에 수도원을 세웠다. 미라콜리 성당의 관리권은 지금도 성심회가 계속 보유하고 있다.


대충 보면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은 몬테산테 성당과 똑같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점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먼저 이 성당은 원형이지만 몬테산테 성당은 타원형이다.


미라콜리 성당은 열쇠구멍을 닮았다. U자 모양 애프스를 가지고 있는데다 네 개의 측면 예배당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두 개는 세로로, 나머지 둘은 가로로 놓여 있다.


돔 모양도 다르다. 미라콜리 성당의 돔은 8각형인데 몬테산테 성당의 돔은 12각형이다. 대충 보면 돔이 같은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잘 세어보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돔은 물고기 비늘 모양의 회색 점판암 슬레이트로 덮여 있다. 미라콜리 성당 돔에는 각 면마다 거의 정사각형인 창문이 달려 있다. 여기로 빛이 환하게 들어와 성당을 밝게 비추어준다.


두 성당 뒤쪽에 서 있는 종탑은 바로크 양식을 잘 보여준다. 형태는 꽤 다르다. 미라콜리 성당의 디자인은 17세기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스타일이다. 

정면 모양은 거의 똑같다. 그래서 두 성당이 똑같은 모양이라는 착각을 준다. 두 성당의 정면에는 열주가 세워져 있다. 정면 위에는 삼각형 페디먼트가 달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두 성당에 사용된 열주는 원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지을 계획이었던 종탑에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것이라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 종탑 계획이 무산되자 이곳에 세웠다는 이야기다.


돔 주변에는 석상 10개가 세워져 있다. 8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인 8명을 새긴 석상이다. 성모 마리아 그림이 있던 예배당을 관리했던 성 프란체스코 제3수도회 관련 성인들이다. 베르니니 학파의 조각가로서 지랄로모 라이날디의 지도를 받은 젊은이들이 이 석상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성당 내부 주제단 위에는 테베레 강에 빠진 아기를 살린 성모 마리아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은 애디쿨레라고 불리는 작은 건조물 안에 들어가 있다. 애디쿨레는 검은색 코린트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 4개로 이뤄져 있다. 



바실리카 디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 성당


몬테산토 성당 건설은 16세기 ‘카르멜라이트 수도회’ 개혁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카르멜라이트 수도회는 제1차 십자가 원정 이후 12세기 무렵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로마가톨릭 은둔자 모임이었다. 이들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인 카르멜 산(가르멜 산)에 살았다. 아랍어로는 마르 엘리아스 산이었다. 그래서 카르멜라이트 수도회라는 이름을 얻었다. 


‘가톨릭쉐어닷컴’이라는 종교 사이트에 따르면 카르멜라이트 수도회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수도한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엘리야의 삶에서 영감을 얻은 사람들이 이 산에서 기도와 명상의 삶을 이어갔다. 이들은 산의 여러 동굴에 살면서 스스로 ‘은둔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 은둔자들은 카르멜 산에 예배당을 하나 지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첫 예배당이었다.


수도회가 만들어진 것은 13세기 초였다. 당시 이탈리아에 알베르투스라는 사제가 있었다. 그는 종교법학자이면서 보비오와 베르첼리 주교였으며, 교황 클레멘스 3세의 외교관 역할도 맡았다. 1204~1205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를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그곳에서 교황 대리인 역할을 맡게 했다. 

알베르투스는 1209년 카르멜 산에서 살던 수도사들을 이끌어 카르멜라이트 수도회 창립에 앞장섰다. 그는 ‘성 알베르투스의 카르멜라이트 규칙’이라고 불리는 수도회 규정도 만들었다. 


예루살렘이 무슬림의 손에 들어간 이후 카르멜라이트 수도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탈리아 등 유럽 도시를 떠돌면서 탁발 수도사로 변신했다. 처음에는 엄격한 옛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문명화된 도시에서 그들의 원래 규정은 너무 엄격했다.


1432년 수도회는 이전의 생활방식을 상당히 완화하는 방안에 대해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 규정 완화는 수도회 내에서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원래의 엄격한 방식을 유지하자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단체는 1560년 탄생한 스페인의 ‘맨발의 카르멜라이트 회’였다. 그들은 나중에는 별개의 수도회로 발전했다. 다른 곳에서도 크든 작든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만투아, 시칠리아의 몬테산토에서 그런 움직임이 돋보였다.


1618년 칸타니아 출신의 수사 데시데리오 플라카가 마지막으로 새로운 카르멜라이트 수도회를 만들었다. 그는 성 알베르투스가 만든 원래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메시나 외곽에 수도원을 차렸다. 신성한 힘을 가졌다고 숭앙받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모신 곳이었다. 플라카가 만든 수도회는 ‘몬테산토의 카르멜라이트‘ 또는 ‘카르멜리타니 델 프리모 이스티투토’라고 불렸다. 


이 수도회는 1640년 교황으로부터 로마에 수도원을 세워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포폴로 문 근처에 정착했다. 현재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 성당 자리 또는 그 근처였다. 처음에는 살던 집의 방 하나를 작은 예배당으로 만들어 수도원을 시작했다. 이곳이 발전해 추기경 가스탈디가 지은 성당으로 변한 것이었다.


성당 설계에는 당대 최고 건축가 겸 조각가 베르니니가 깊이 관여했다. 원래 몬테산토 성당은 미라콜리 성당처럼 원형으로 지으려고 했다. 이때 베르니니가 모양을 타원형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 성당 부지는 미라콜리 성당보다 좁습니다. 원형으로 짓기는 어렵습니다.”


부지가 좁았던 것이 정말 성당 모양을 바꾼 이유였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는 다른 이유 두 가지를 거론한다. 


“타원형으로 지으면 예배당을 두 개 더 넣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수도사들이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제단은 총 7개로 늘어나게 된다.”


“베르니니는 똑같은 원형 성당 두 개를 나란히 지으면 재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는 원형, 나머지 하나는 타원형으로 하는 게 나을 거라고 봤다.”


교황 레오 12세(재임 1823~29년)는 카르멜라이트 수도회에서 성당 관리권을 박탈한 뒤 산타 마리아 레지나 코엘리(천국의 여왕 성모 마리아)에게 성당을 다시 봉헌했다. 지금의 몬테산테 성당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교구의 교구목사관이다. 

몬테산토 성당에서 출발하는 비아 델 바부이노 거리는 18세기 스페인계단이 만들어진 뒤에는 많은 예술가가 모여 활동하는 구역으로 발전했다. 19세기에는 예술가 거리로 명성을 높이게 됐다. 성공을 꿈꾸는 예술가들은 스페인계단을 야외 전시관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어 후원자를 얻기를 기대했다. 


스페인계단 일대에는 지역 성당이 없었다. 유일한 성당이던 산타타나시오 아 비아 델 바부이노 성당은 그리스 추방자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몬테산토 성당은 예술가들이 가는 지역 성당 역할을 맡게 됐다.


예술인 성당이라는 역할은 20세기까지도 이어졌다. 1953년 유명한 예술평론가 몬시뇨르 에니오 프란시아는 매주 일요일 이 성당에서 ‘예술인들을 위한 미사’를 시작했다. 이 전통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래서 이 성당은 ‘예술인의 성당’이라는 뜻인 ‘치에사 데글리 아티스티’라는 이름을 얻었다. 


20세기 말 몬테산토 성당의 상황은 매우 나빠졌다. 10~20년 안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로마시는 보수작업을 시작해 2016년 공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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