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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성 베드로 대성당(1)

초대 교황의 무덤을 찾아서



로마에는 4대 바실리카 마이오르라는 게 있다. 이른바 ‘메이저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 바실리카 마이오르다. 네 곳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만 교황청의 주권구역인 바티칸 시국 영토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나머지 셋은 이탈리아 영토에 위치하고 있지만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외국대사관처럼 치외법권 적용을 받는다.


바실리카 마이오르 제도는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에 의해 도입됐다. 그는 ‘최고 신앙 보고’라는 칙령을 발표해 5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뜻하는 성년(聖年) 제도를 만들었다. 원래는 ‘노예와 죄수가 자유를 얻고, 모든 빚은 탕감되고, 하나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유대교의 전통이었다. 보니파시오 8세가 천명한 성년은 유대교 전통과 조금 달랐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성년에 완벽하게 죄를 회개하고 고해해야 합니다, 로마를 방문해서 세계에 기독교를 퍼뜨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무덤인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을 순례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성년이었던 1350년 교황 클레멘스 6세(재임 1342~52년)는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성당 명단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포함시켰다. 그는 “매일 세 대성당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라”고 신도들에게 촉구했다. 그 다음 성년이었던 1390년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도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역대 교황들은 “성년에 4대 성당을 방문하는 것은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중대한 조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마이오르 네 곳 중에서 중요성이나 명성을 놓고 볼 때 으뜸가는 성당이다. 기독교를 세계적 종교로 발전시킨 성 베드로가 묻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종교적으로 위대할 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아름다운 건물이다. 르네상스가 기독교와 손을 잡고 인류사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엄청난 업적이다.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브라만테, 마데르노 같은 거장들이 설계하고 건축하고 조각한 건축물이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불굴의 기념물일 뿐만 아니라 신을 찬양하는 건축학적 찬송가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는다. 르네상스의 향기를 맡아보기 위해 이곳에 가는 사람도 많지만,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기독교의 성지를 순례하는 감격을 누리려고 들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둥근 열주로 둘러싸인 성 베드로 광장을 지나가야 한다. 엉뚱한 소리 같지만 광장은 세상에서 가장 큰 해시계다. 실제 성 베드로 광장에 가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전망대에 올라가거나 드론을 이용해 공중에서 사진을 찍으면 광장은 정말 거대한 해시계처럼 보인다.


물론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성 베드로 광장을 시계처럼 만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보니 시계 모양을 이루게 됐을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것조차도 신의 깊은 뜻일지 모른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30만 명을 넘는 신들을 모신 이교도의 제국이었던 고대 로마의 방향을 바꾼 기독교의 핵심 성소다. 유피테르 신으로 상징되는 고대 로마의 시계는 멈추고 성 베드로로 상징되는 기독교의 시계가 돌아가는 곳이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잘 살펴보면 성모 마리아의 따스한 품처럼 대리석 열주 회랑으로 둘러싸인 성 베드로 광장은 시계의 원판처럼 둥글게 생겼다. 그렇다면 시계바늘은?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높이 25m의 4천500년 전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다.


여행이 목적이든 순례가 목적이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대부분 관람객은 오벨리스크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단순히 기념사진을 찍는 배경으로만 이용할 뿐이다. 오벨리스크에 어떤 역사적, 종교적 의미가 담겨있는지, 바늘처럼 생긴 이 건축물이 기독교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오벨리스크와 성 베드로 대성당은 잘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이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의 신전 입구에는 대개 오벨리스크 한 쌍, 즉 두 개를 세워놓는 게 일상적이었다. 왜 기독교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앞의 광장 한가운데에 이교도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를 가져다 놓은 것일까?


놀랍게도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의 순교 장면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여서 성스러운 존재라고 기독교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벨리스크가 이곳에 서 있게 된 것은 성 베드로가 로마에 가기 훨씬 오래 전부터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건설되기 수백 년 전이었다.


오벨리스크는 밧줄에 묶여 처형장으로 끌려오던 성 베드로의 모습은 물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그의 얼굴도 지켜볼 수 있었다.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에 시달리던 성 베드로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오벨리스크였는지도 모른다. 오벨리스크의 뾰족한 끝이 가리키던 곳이 천국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가 숨진 곳 인근에 몰래 묻히는 모습은 물론 매일 밤 기독교도들이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장면도 목격했을 것이다.


오벨리스크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성 베드로의 눈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가 목격했다는 성 베드로의 최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성 베드로 순교와 그 이후 2천 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알아보려면 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역사는 뜻밖에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 이어 제정 로마의 3대 황제였던 칼리굴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칼리굴라는 고대 로마 초대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자였다. 아버지는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맹활약해 로마인의 사랑을 받았던 게르마니쿠스였다.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인 아그리피나였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칼리굴라는 어릴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시리아에서 병에 걸려 30대 초반에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칼리굴라의 인생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2대 황제 티베리우스와 사이가 나빴던 어머니는 벤토테네 섬에 유배됐다가 병들어 죽고 말았다. 큰형 네로 카이사르는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폰차 섬에 갇혀 있다 죽었다.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황궁 지하실에 투옥됐다가 목숨을 잃었다.


부모형제를 모두 잃은 칼리굴라는 외할아버지 드루수스의 형 즉 외종조부인 티베리우스와 함께 카프리 섬의 별장에서 살게 됐다. 티베리우스가 세상을 떠난 서기 37년 칼리굴라는 로마의 황제 자리에 앉았다. 세상 경험이 부족했던 그에게는 제국을 통치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로마인들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로마인들이 좋아하는 오락을 마음껏 제공해 인기 있는 황제가 되기로 했다.  


칼리굴라는 특히 전차경주를 매우 좋아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펼쳐지는 전차경주의 엄청난 속도전은 선황 티베리우스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던 그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짜릿한 쾌감을 주었다. 칼리굴라에게는 좋아하는 전차경주 팀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마구간에서 열리는 그 팀의 파티에도 참석해 기수들과 술잔을 나눌 정도였다.


칼리굴라는 전차를 직접 몰아보고 싶었지만 경주에 출전할 기량은 갖고 있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는 혼자서 마음껏 전차를 몰 수 있는 개인용 경기장을 짓기로 했다. 장소는 테베레 강 건너편 서쪽에 있었던 아게르 바티카누스 즉 바티카누스 평원이었다. 땅 주인은 티베리우스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였다. 이곳에 그녀의 별장이 있었다.


바티카누스라는 이름은 에트루리아인이 모셨던 바티카누스(또는 바기타누스) 신에게서 나온 명칭이었다. 바티카누스는 출산의 신이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 말을 하는 순간, 즉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신이었다. 라틴어로 ‘운다’는 단어가 바티카누스와 비슷한 ‘바기투스’였다. 이 평원에는 바티카누스의 신전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칼리굴라가 전차경기장을 건설한 바티카누스는 당시에는 로마 시내에서 멀리 벗어난 외곽이었다. 왕정이나 공화정 초기에는 외적이 로마로 쳐들어오는 걸 감시하던 역할을 했던 야니쿨룸 언덕 인근이었다. 로마로 몰려온 적군이 강을 건너 공격하기에 앞서 진지를 설치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칼리굴라가 건설한 전차경기장의 길이는 161m였다. 일부에서는 무려 500m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가 로마 시내 대신 외곽에 경기장을 지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로마 시내에는 전차경기장을 새로 지을 땅이 없었다. 또 인기에 신경을 쓰느라 시민들의 눈치를 많이 봤던 그로서는 시내 한복판에 사설 경기장을 만들 배짱이 모자랐을 것이다.



칼리굴라가 경기장을 지은 곳은 아게르 바티카누스 즉 바티카누스 평원이었다. 이곳의 이름은 에트루리아인이 모셨던 바티카누스(또는 바기타누스) 신에게서 나온 명칭이었다. 바티카누스는 출산의 신이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 말을 하는 순간, 즉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신이었다. 라틴어로 ‘운다’는 단어가 바티카누스와 비슷한 ‘바기투스’였다. 이 평원에는 바티카누스의 신전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칼리굴라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전차경기장에 세웠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운 전례를 모방한 것이었다. 지금 대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다.


칼리굴라는 오벨리스크를 절단하지 않고 통째로 운반할 수 있는 초대형 선박을 만들어 오벨리스크를 이송했다. 전나무로 만든 선박의 무게는 무려 800t에 이르렀다. 중앙 돛대도 엄청 굵어서 선원 네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둘러쌀 수 있을 정도였다. 배 길이는 오늘날 항공모함과 비슷한 105m, 너비는 20m였다. 배는 6층이었다. 선원은 700~800명 정도였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뒤를 이은 제5대 네로 황제는 칼리굴라가 지은 전차경기장을 고쳐 시민들에게 오락장으로 개방했다. 사람들은 이 경기장을 칼리굴라-네로 경기장이라고 불렀다.


네로는 이곳에서 이색 행사를 열었다. 바로 육상대회였다. 대회 참가자는 지도 계층인 원로원 의원들과 제 2계급인 기사계급이었다. 일반 시민들은 관중으로 경기를 구경하게 했다. 나이가 들어 운동을 하지 않아 살이 찐 의원들이 달리기를 하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지만, 일반 시민들이 깔깔 웃으면서 재미있게 보기에는 충분했다.


네로 황제는 큰 궁지에 몰렸다.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 또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라는 저택을 지을 부지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로마 시민들 사이에 퍼진 게 이유였다.


그는 탈출구를 기독교에서 찾았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멸망을 꿈꾸면서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몰아세운 뒤 수백 명을 붙잡아 처형했다. 1~2세기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고 역사학자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사람들의 도움도, 황제의 자비도, 신을 달래려는 모든 노력도 불이 누군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소문을 잠재우지 못했다. 네로는 소문을 없애기 위해 가장 끔찍한 처벌을 내릴 희생양을 선택하기로 했다. 당시 로마인에게서 혐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인이었다. 처음에 일부가 붙잡혀 죄를 자백했다. 이어 더 많은 사람이 붙잡혔다. 그들의 혐의는 방화가 아니었다. 다른 로마인을 향한 반감이 죄목이었다. 그들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끌려 나가 개들에게 물어 뜯겨 산산조각 났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했고, 해가 져 어두워지면 밤을 밝히려고 산 채 화형 당했다. 기독교인이 본보기 처벌을 받았다는 연민이 로마인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광기를 위해 처형당했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은 기독교도 처형 장소를 콜로세움이라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네로 전차경기장’으로도 불렸던 이곳이 바로 순교의 현장이었다. 당시 로마 대화재 때문에 대전차경기장(치르쿠스 막시무스) 등 큰 시설이 대부분 소실되는 바람에 처형에 이용할 만한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네로는 로마 외곽 먼 곳에 있는 칼리굴라-네로 전차경기장을 기독교도 탄압 장소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시기도 바로 이 때였다. 그의 죽음을 다룬 최초의 기록은 96년 로마 주교였던 클레멘스가 그리스 코린트의 한 교회에 보낸 편지였다. ‘베드로는 부당한 시기질투 때문에 한두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고역을 겪어야 했다.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영광의 장소를 향해 떠났다.’


카라바지오 '십자가에 못박히는 베드로' at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2~3세기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기독교 작가인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전갈 우화』란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성 베드로의 순교는 네로가 기독교도들을 처형할 때 일어났다. 기독교도 처형은 네로 대전차경기장 근처에 있는 황제의 정원에서 벌어졌다.’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그리스의 기독교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팜필이 남긴 기록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가 로마에 왔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 


팜필은 그보다 이전 시대에 살았던 신학자 오리겐으로부터 이런 정보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부터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런 내용은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뒤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든 죽으면 무덤을 갖게 하는 게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다. 순교자는 세상을 버린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묻힐 수 있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소유한 땅이었으며, 도시 밖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도로 주변이었다.


성 베드로는 바티칸 인근이던 비아 코르넬리아에 묻혔다. 당시 비아 코르넬리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기독교도는 물론 이교도도 묻히던 곳이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지하 납골소에 만들어졌다.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가야 하는 곳이었다. 시신은 석관에 넣어 납골소 가운데에 모셨다. 라틴어로 성서를 번역한 성 제롬은 392년에 저술한 그의 저서 『현인열전』에 ‘성 베드로는 로마 영광의 길 근처 바티칸에 묻혔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고 적었다.


처음에 성 베드로가 묻힌 자리에 ‘바위’라는 뜻의 베드로 이름에서 착안해서 큰 붉은 바위 하나를 놓아 그의 무덤임을 표시했다. 교황 아나클레토(재임 79~90/92년)는 나중에 바위를 치우고 기념물을 지었다. 서너 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이었다. 초대 교황 성 베드로로부터 역대 교황의 일대기를 담은 『교황들의 책』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성 베드로의 무덤에는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기독교 박해가 이어지는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순례자들은 성인의 무덤에서 예배를 드리다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혀가기도 했다.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363년 저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세 가지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예배의 장소가 됐다. 물론 비밀리였지만.’


성 베드로의 유해는 200년가량 지하 납골소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었다. 망자가 묻힌 곳은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게 고대 로마 풍습이었던 덕분이다. 258년 군인황제 시대에 상황은 돌변했다. 군인 출신으로 야만족을 물리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무덤을 보호하는 풍습의 특권에서 기독교인을 제외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기독교인은 로마에 묻힐 자격이 없으며, 불손한 기독교인의 무덤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성 베드로의 유해가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기독교도들은 비밀리에 성 베드로의 유해를 빼내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베 깊숙한 곳에 숨겼다. 성인의 유해를 옮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기독교도들은 유해가 원래 무덤에 그대로 있다고 믿었다. 세월이 흘러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탄압이 시들해졌을 때에야 성 베드로의 유해는 바티칸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바티카누스에 성당을 짓게 된 것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였다. 로마를 통일하고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는 성 베드로를 기리는 성당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바티카누스의 칼리굴라-네로 전차경주장 일대에 교회를 짓겠다는 것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는 318~322년 사이에 시작됐다. 완공까지는 40여 년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총 길이가 110m 정도였던 대성당은 3천~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교황들의 책』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 베드로의 원래 무덤에 덧붙인 관의 장식이 묘사돼 있다. ‘석관은 구리로 덮여 있다. 각 면의 길이는 152㎝다. 석관 위에는 무게 68㎏인 황금 십자가가 놓여 있다. 십자가에는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헬레나 아우구스타, 황제의 영광으로 빛나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적혀 있다.’


공사 도중에 난처한 일이 생겼다. 바로 아나클레토가 만든 예배당 때문이었다. 예배당은 기독교도들의 마음에 가장 중요한 성소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대성당을 만들려면 예배당을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예배당은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만들어진 최초의 성소’라는 상징적 의미가 컸기 때문에 기독교도들은 철거에 반대했다. 할 수 없이 예배당을 그대로 둔 채 대성당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성당은 아주 희한하면서 독특한 모양이 돼버렸다. 이후 여러 차례 대성당을 증축, 개축할 때도 이 모양은 유지됐다.


그 때문에 생각하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겼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지하 납골소로 가는 게 매우 어려워진 것이었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하 납골소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렸다. 결국 아무도 그곳에 갈 수 없게 됐다. 1900년 교황 레오 13세(재임 1878~1903년)가 추기경들의 뜻을 모아 납골소를 찾아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어쨌든 성 베드로 대성당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로 성장했다. 9세기부터는 교황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역대 교황들은 나중에 새 대성당이 지어진 뒤에도 대관식을 계속 진행했다. 1963년 바오로 6세(재임 1963~78년)가 폐지한 이후에야 교황 대관식은 없어졌다.


대성당이 완공된 뒤 내부에 교황들의 무덤도 연이어 만들어졌다. 초대교황 베드로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교황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대성당에 묻힌 교황은 5세기 대 레오 1세(재임 440~461년)였다.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황들은 안마당, 예배당은 물론 중랑까지 뜯어내고 그들의 무덤을 마련했다. 이 무덤들은 나중에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들 때 대부분 부서져 없어지고 말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846년 사라센족의 로마 침입 때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해 일부 성당은 야만족의 침입이 거셌던 3세기 말 군인황제였던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 주변에 세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바깥에 있었다. 외적이 쳐들어올 경우 약탈을 피할 수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등에는 값비싼 예배용품과 순교자, 성인 등의 유해를 담은 성 유물함 등이 넘쳐났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사라센족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손쉽게 약탈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14세기 무렵 황폐해졌다. 교황이 아비뇽 유수 때문에 로마를 떠나 프랑스에 감금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거나 새로 지어야 했지만 이 일을 추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5세기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가 페로 타푸르가 1436~39년 7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여행한 다음에 쓴 『여행과 모험』이라는 책에 당시 대성당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엄청나게 크다. 지붕은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하지만 관리 상태는 매우 부실하고 지저분하다. 많은 곳이 부식됐다. 로마는 크기에 비해 인구가 무척 적다. 거의 내버려진 도시처럼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큰 건물 잔해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공기는 정말 나빠 사람의 건강에 큰 해를 줄 정도다.’ 


서둘러 수리하지 않으면 무너질 판이었지만 황폐해졌든 부서졌든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자체만으로 성소였다. 여기에 손을 댄다는 것은 신성성을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기독교도들은 생각했다. 아무도 대성당을 고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세상에는 늘 고정관념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재임 1447~55년)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로 했다. 그는 콜로세움을 해체해 대성당 수리 작업에 사용할 자재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콜로세움에서 수레 2천522대 분량의 석재가 뜯겨져 대성당 앞으로 옮겨졌다. 지금 콜로세움 내부가 엉망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니콜라오 5세의 지시였다.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 때문에 니콜라오 5세는 죽을 때까지 대성당 수리 작업을 착공하지 못했다.


50여 년 뒤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3년)는 니콜라오 5세보다 더 획기적인 방안을 발표했다. 그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겠다고 했다.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반대했지만 교황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대성당을 부수는 것보다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 대성하의 유해를 모신 성당을 엉망으로 놔두는 게 더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했다.


율리오 2세는 새 대성당을 짓기 위한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여러 가지 설계안이 참가했다. 설계도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공모전에서 이탈리아 출신 르네상스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공사는 마침내 1506년에 시작됐다. 이후 여러 교황이 대를 이어 조금씩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비가 모자라 면죄부를 발행하는 바람에 반발을 사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공사는 계속 진행됐다. 마침내 성 베드로 대성당은 착공 120년 만인 1626년 완공됐다. 봉헌식은 우르바노 8세(재임 1623~44년)가 11월 18일에 거행했다.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된 이후에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역대 교황은 무덤을 확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오 11세(재임 1940~49년)도 무덤을 찾는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그는 성 베드로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을 후원해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를 발굴하게 했다. 그 결과 5~12m 깊이에 있던 제정 로마 시대의 공동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차례 발굴  조사에서  많은 뼈가 발견됐다. 그러나 발굴조사단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어느 것인지, 뼈 가운데 어느 것이 성 베드로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교황은 결국 1950년 12월 힘 빠진 목소리로 “어느 게 베드로의 뼈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교황은 안전을 이유로 뼈를 비밀 장소에 보관했다.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뼈가 발견됐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1968년 마르게리타 과르두치라는 여성 인류학자가 뼈를 우연히 발견하고 연구를 다시 진행했다. 그 결과 비오 11세 때 발견한 뼈는 남성의 것이라는 게 확인됐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1세기 무렵에 살았던 61세 전후의 남성이라는 것이었다. 과르두치는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했다. 교황은 바로 조사 내용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이 뼈는 “성 베드로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성 베드로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는 다시 비밀 공간에 안치됐다. 일부 성직자 외에는 아무도 그걸 볼 수 없었다. 뼈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2013년 11월 24일이었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사상 처음 뼈 6개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스카비라는 지하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리 교황청에 희망 날짜와 설명을 듣고 싶은 언어를 정해 신청하면 이곳을 둘러볼 수 있다.


 

글을 마치기 전에 성 베드로 대광장의 시계 바늘인 오벨리스크로 돌아가 보자. 오벨리스크는 성자의 죽음을 목격한 유일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오벨리스크를 성스러운 장소로 우러러본다.


오벨리스크는 처음에는 옛 자리 즉 옛 성 베드로 대성당 바깥에 서 있었다.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는 ‘순교의 목격자’를 방치할 수 없다며 오벨리스크를 100m 쯤 옮겨 광장 한복판에 세우게 했다. 오벨리스크를 옮기는 데에는 13개월이나 걸렸다.


중세까지만 해도 오벨리스크는 많은 기독교인의 숭배를 받았다. 스페인 여행가 페로 타푸르는 『여행과 모험』에 직접 본 오벨리스크를 상세히 묘사한 글을 남겼다. ‘성 베드로 대성당 인근에는 석재로 만든 높은 탑이 하나 서 있다. 구리로 만든 세 다리로 버티고 선 삼각형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탑을 아주 성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탑을 지날 때에는 마치 땅바닥에 붙어 기어가듯이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옛날에는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금으로 도금한 공이 하나 달려 있었다. 공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해가 들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칼리굴라가 전차경기장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였다는 내용이었다. 오벨리스크는 중세 시대에는 ‘카이사르의 바늘’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오벨리스크를 광장 한가운데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는 공사 도중 공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공은 지금은 캄피돌리오 광장의 콘세르바토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공이 달려 있던 꼭대기에는 대신 십자가가 설치됐다. 그러자 다른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공에 예수의 유해가 들어 있었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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