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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성 베드로 대성당(2)

2025년에 다시 성문(聖門)이 열리면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출입문이 다섯 개 있다. 문은 제각각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입구를 마주보고 섰을 때 맨 왼쪽은 ‘죽음의 문’이다.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열리면 장례행렬이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다음은 ‘선악의 문’이다. 1970~7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문이다. 문의 오른쪽 부조는 선을, 왼쪽 부조는 악을 상징한다.


세 번째이면서 가운데 문은 ‘필라레테 문’이다. 다섯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문을 만든 안토니오 아베룰리노의 별명이 필라레테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네 번째는 1965년에 만든 ‘성례의 문’이다. 성당으로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문의 오른쪽 부조를 보면 천사가 세례, 견진성사, 보속(고해 신부가 정해주는 속죄 행위)을 거행하고 있다. 왼쪽 부조에서는 성체성사, 결혼, 신품성사, 병자성사를 거행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성스러운 문’ 즉 성문(聖門)이다. 또는 ‘대사면의 문’이라고 부른다. 이 문은 25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 즉 성년(聖年)에만 열린다. 성년을 영어로 ‘Holy Year’ 또는 ‘Jubilee’라고 한다. 성문과 성년을 설명하려면 로마의 4대 메이저 대성당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문과 성년은 로마의 4대 메이저 대성당에만 존재하는 제도이고 시설이다.


바실리카 마이오르에 포함된 네 성당은 평소에는 모르타르나 시멘트를 발라 성문을 안쪽으로 잠가 놓는다. 교황이 지정하는 성년에만 순례자들에게 개방한다. 순례자들은 이 문을 통과하면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 


성년 첫날인 1월 1일 교황은 은으로 만든 망치로 성문을 똑똑 두들긴다. 그러면 문이 열려 누구나 지나갈 수 있다. 성경에 ‘나는 문이니 누구든 나를 통해 들어오면 안전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자비를 통해 안전을 얻는다는 뜻이다. 성문은 성년 마지막 날 교황이 직접 닫는다. 성문은 1975년과 2000년에 열렸다. 다음에 문이 열리는 해는 2025년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면 꼭 보아야 하는 작품이 있다. 입구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작품이다. 뜻밖에 성모 마리아는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비통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낮잠을 자는 아들이 깨기를 차분하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화와 사랑이 넘쳐난다. 


성모 마리아는 젊은 아들을 둔 50대 노파가 아니라 20대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동료 조각가에게 “성모의 순수성과 순결성을 상징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평소 존경했던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성모 마리아를 젊게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신곡에 보면 “성모여, 당신 아들의 딸이시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이 구절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다른 설명도 있다. 성모의 젊음, 차분한 표정, 그리고 침착한 자세는 관람객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다 큰 예수가 아니라 어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거꾸로 숨을 거둔 성인 예수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미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설명이다. 현대적 분석도 있다. 예수는 실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묘사돼 있는데, 이는 엄마의 품에서 숨진 예수의 나약한 인간적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피에타는 원래 로마에 가 있던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레스가 미켈란젤로에게 부탁해 제작했다. 처음에는 추기경의 장례 예배당에 놓여 있었지만, 18세기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져 현재 위치에 놓이게 됐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주제로 여러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곳의 피에타가 가장 먼저 제작한 것이다. 원래 피에타는 프랑스에서 주로 다룬 주제였으며, 이탈리아 조각가들은 크게 선호하지 않았다. 


피에타는 방탄 유리벽으로 보호를 받고 있어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다.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조각은 피에타가 유일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972년 헝가리 출신의  라즐로 토스가 피에타를 부수는 반달리즘을 저지른 이후부터였다. 


사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관람객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작품은 피에타가 아니라 발다키노다. 성당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면 앞을 가로막는 웅장한 청동 작품이다. 높이가 30m, 무게가 37t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 구조물이다. 엄청나게 큰 대성당과 그 안을 걷고 있는 조그마한 인간. 그 중간 크기인 발다키노는 인간과 신의 중재 역할을 상징한다. 


발다키노는 일종의 천개, 순 우리말로 ‘닫집’이다. 미사를 올리는 제단이나 교황의 옥좌, 또는 교황이 나들이를 갈 때 타고 다니는 마차 의자 부분이 비나 눈을 맞지 않고 먼지에 시달리지 않도록 위를 가려주는 지붕이다. 시보리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세 시대 로마 성당에서는 시보리움을 설치하는 게 일반적인 유행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를 만든 사람은 로렌조 베르니니다. 그에게 제작을 의뢰한 사람은 교황 우르바노 8세였다. 교황이 베르니니를 좋아했던 것은 그의 예술성이 뛰어났던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예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우르바노 8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55세에 교황이 됐다. 로마 출신이 아니어서 교황청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그는 교황으로서 기반을 다지고 가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예술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베르니니는 우르바노 8세를 위해 발다키노를 다양하게 꾸몄다. 곳곳에 그를 위한 흔적을 남겼다. 기둥이 서 있는 받침대에는 그의 문양을 새겼다. 교황의 조카와 새로 태어난 아들 얼굴도 새겨 넣었다. 발다키노를 떠받치고 있는 네 기둥은 꼬여 있다. 흔히 ‘솔로몬의 기둥’이라고 부르는 양식이다. 그가 이 양식을 택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묶여 있었던 기둥이 바로 이런 양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솔로몬의 기둥은 우르바노 8세의 상징인 올리브 잎이 휘감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올리브 잎이 아니라 포도나무 잎이다. 당시에는 교회에 세우는 조각물에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포도나무 잎을 새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베르니니는 포도나무 잎을 교묘하게 조작해서 올리브 잎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솔로몬의 기둥에는 또 당시 유행이던 나비 대신 ‘바르베리니 벌’이라는 것을 새겼다. 당시 벌은 ‘성하’의 고귀함, 훌륭함을 상징하던 곤충이었다. 성하는 교황 같은 고위 종교 지도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베르니니는 솔로몬의 기둥 맨 꼭대기에는 ‘바르베리니의 태양’을 장식했다. 


발다키노를 만든 이유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성 베드로 무덤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을 가진 발다키노에 우르바노 8세와 그의 집안인 바르베리니 가문의 여러 가지 흔적을 남긴 것은 ‘바르베리니-우르바노-발다키노-성 베드로’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바르베리니 가문의 위대성을 고양시키려는 이유에서였다. 


비록 우르바노 8세와 그 가문의 영광을 빛낼 필요성에서 출발한 작품이었다 하더라도 발다키노의 예술성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로마 성당의 시보리움은 흰색 대리석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베르니니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채택했다. 전체 구조는 교황이 행진할 때 이용하는 마차나 가마의 가리개에서 영감을 얻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나와 광장 오른쪽 열주 회랑 뒤로 돌아가면 성문이 나타난다. 성문을 지나기 이전은 바티칸시국 땅이고, 성문을 지나면 이탈리아 땅이다. 성문에는 긴 성벽이 연결돼 있다. 그 아래에는 차 두어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도로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성벽 주변을 ‘외곽’이라는 뜻인 보르고라고 불렀다. 


겉모습은 평범하고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성벽이지만, 실제로는 건립한 지 1천 년을 넘는 긴 역사를 가진 숨겨진 보물이다. 이 성벽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800m 길이의 비밀 통행로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교황청에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때 교황이 피난하는 통로다. 이름은 파세토 디 보르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단순히 파세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작은 통로’라는 뜻이다.


파세토의 역사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830년과 846년 두 차례에 걸쳐 사라센 해적의 침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마 시내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성로마제국 로타르 1세는 교황 레오 4세(847~855년)에게 성벽을 지으라고 했다. 


공사를 서두른 덕분에 성벽은 850년께 완공됐다. 성벽의 길이는 3㎞에 이르렀고, 모두 44개의 감시탑이 세워졌다. 이곳에 파세토를 덧붙인 사람은 교황 니콜라오 3세(재임 1277~80년)였다. 바티칸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면 외국 군대가 쳐들어올 경우 대피 통로로 삼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교황이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달아나는 사건은 역사상 두 차례 일어났다. 두 번 모두 유럽의 군대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욕심이었다. 교황의 지나친 권력 욕심과 교황을 누르고 세속 권력을 키우려는 유럽 지배자들의 욕심이 맞부딪힌 게 원인이었다.  


첫 사례는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였다. 그는 교회와 평신도, 평범한 성직자보다는 가족, 측근을 먼저 생각했다. 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해 많은 성직자와 로마인에게서 빈축을 샀다. 그는 피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열일곱 살 아들 케사레를 발렌시아 대주교로 서임했다. 다른 아들 지오바니에게는 가문의 고향인 스페인 간디아의 공작 작위를 하사했다. 추기경 자리 열두 개를 새로 만들어 숨겨둔 연인의 오빠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드 1세를 중심으로 하는 반대세력이 알렉산데르 6세와 마찰을 빚게 됐다. 교황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가 가담해 반 교황 연합을 형성했다. 



궁지에 몰린 교황은 프랑스의 샤를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지원군을 보내주면 나폴리 왕국을 프랑스 영토로 만들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샤를 8세는 총 병력 2만 5천 명의 대군을 파견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교황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병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교황은 이번에는 거꾸로 나폴리 왕국에게 연합군을 꾸려 프랑스에 맞서라고 지시했다. 그에게는 이런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앞뒤를 재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단지 눈앞에 닥친 위기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급해진 교황은 여러 도시에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에도 도와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교항이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은 곧바로 샤를 8세에게 전해졌다. 화가 난 그는 피렌체를 점령하자마자 바로 로마로 진격했다. 프랑스 군대는 12월 로마에 입성했다. 교황 선거에 출마했다가 알렉산데르에 밀려 낙선한 델리 로베레 등 프랑스를 지지하는 추기경들도 그들을 따라왔다. 


프랑스 군이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로마 시내 곳곳에서는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고 비명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교황은 파세토를 통해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빠져나가 산탄젤로 성에 숨었다.  


샤를 8세는 교황을 궁지로 몰아넣은 뒤 나폴리로 진격했다. 막강 전력을 자랑한 프랑스 군은 나폴리를 손쉽게 점령했다. 그가 로마와 피렌체, 나폴리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여러 나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 샤를 8세를 막는 일은 유럽 여러 나라의 공통 관심사가 됐다. 당시 이탈리아 최대 도시였던 베니스와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스페인이 손을 잡고 연합군을 구성했다. 위기감을 느낀 샤를 3세는 로마는 물론 나폴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파세토로 달아난 두 번째 교황은 1527년 클레멘스 7세(재임 1523~34년)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가장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럽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교황은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의 거짓말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두 사람은 교황의 말만 믿고 계속 전쟁을 벌였다. 유럽의 여러 지역이 황폐해졌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카를 5세는 뒤늦게야 교황의 교활한 책략을 깨달았다. 분노한 그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의 군대를 괴멸시킨 뒤 스페인 주둔 병력을 곧바로 이탈리아로 보냈다. 독일에 있던 병력도 파견했다. 규모는 무려 3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 독일에서 온 병사들은 클레멘스 7세를 극도로 싫어했다. 교황이 이간질을 일삼아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로마에 가면 교황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요하네스 긴델버그 '로마 약탈' at  개인 소장


카를 5세의 군대는 1527년 5월 5일 저녁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로마 일대에는 안개가 짙게 끼었다. 불과 2~3m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된 로마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행군했다. 


교황은 처음에는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대성당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대성당 한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앉아 쳐들어오는 황제의 병사들에게 호통을 칠 생각이었다. 그때 황제의 병사들이 대성당 인근 성 스프리토 병원에 몰려가 환자까지 죽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물론 대성당 계단에서 황제 군대와 맞서 싸우는 스위스 근위대의 대포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교황은 유일하게 곁에 남아 있던 한 추기경의 권고를 받아들여 결국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다. 달아나는 교황의 비참한 모습을 담은 기록이 남아 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불타오르는 로마의 잔혹한 풍경을 보고, 또 연이어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쏟았다.’ 


교황이 달아날 동안 스위스 근위대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 앞에서 카를 5세의 병사들을 맞아 끝까지 싸웠다. 단 한 명도 달아나지 않았다. 근위대 병사 1천527명 중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42명에 불과했다. 교황청은 그들의 충성과 용기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후 스위스 근위대 선발 시험을 해마다 5월 6일에 실시한다.


카를 5세의 병사들 중에는 개신교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가톨릭이었다. 이런 병사들이 분노와 욕심에 눈이 멀어 성 베드로 대성당뿐만 아니라 로마를 약탈하고 불태운 것이다. 이들은 추기경이나 사제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귀족이든 아니든 여자들은 모두 성폭행했다. 


카를 5세의 군대가 쳐들어가기 전에 5만여 명이었던 로마 인구는 불과 수개 월 사이에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대다수는 목숨을 구하려고 로마에서 먼 곳으로 달아났지만 살해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한 역사학자는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 족, 450년 겐세리크가 이끄는 반달 족은 물론 여러 차례 다른 야만족도 로마를 침략했다. 하지만 카를 5세의 군대는 어느 야만족보다도 끔찍하게 로마를 약탈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로마 주민들이 살해당하고, 여자들이 군인들의 노리개가 되고, 교회와 궁전이 약탈당해도 교황은 산탄젤로 성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안전만 챙길 수 있었을 뿐 신도들을 구할 수 있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성 안에 갇힌 죄수 같은 신세였다. 


로마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베네치아, 피렌체에서 군대를 보냈다. 우르비노 공작이 긴급히 새로 모집한 스위스 근위대도 로마를 구하러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카를 5세의 대군에 맞설 수 없었다. 게다가 우르비노 공작은 교황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 교황이 아니라 로마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교황이 산탄젤로 성에 틀어박혀 목숨만 챙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우르비노 공작은 군대를 돌려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교황은 일곱 달 동안이나 산탄젤로 성에 닫혀 있었다. 그는 나중에는 행상으로 변장해 시종 두어 명만 거느리고 산탄젤로 성을 빠져 나가 오르비에토로 달아났다. 로마를 점령한 황제군은 아홉 달 동안 머무르며 행패를 부렸다. 시체가 부패한 탓에 시내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로마를 떠나야 했다. 클레멘스 7세는 1534년 56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로마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많은 사람이 교황청으로 몰려가 정말 교황이 죽었는지를 확인했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교황의 묘를 습격했다. 한번은 교황의 묘가 완전히 파헤쳐졌고, 그의 시신에 칼이 꽂히기도 했다. 


교황의 조카였지만 로마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추기경 이폴리토 데 메디치가 자제를 호소하지 않았다면 그의 시신은 갈고리에 꿰인 채 로마 시내로 끌려 다닐 형편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처럼 테베레 강에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매일 밤 무장한 군인들이 그의 묘를 지켜야 했다.  


클레멘스 7세가 파세토를 통해 달아나는 일이 벌어진 이후 파세토의 문은 굳게 닫혀 버렸다. 아무도 파세토를 재건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상태는 매우 나빠지게 됐다. 파세토가 다시 깔끔해진 것은 지난 2000년 교황이 새 천년 시작을 축하하면서 보수, 수리를 지시한 덕분이었다. 


파세토는 평소에는 문을 닫고 대중 접근을 막는다. 다만 여름철 일정기간에만 소수의 그룹 투어 신청자에게 부분적으로 탐사를 허용한다. 파세토 열쇠는 스위스 근위대가 보관한다. 만일의 경우가 다시 발생해 교황이 또 대피해야 할 경우 스위스 근위대가 문을 열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바티칸의 포르타 산타나에서 시작한 파세토는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다. 골목길은 라르고 델 콜로나토 즉 콜로나토 광장과 코리도리 거리, 보르고 안젤로 거리로 이어진다. 파세토는 보르고 안젤로 거리 끝에 있는 피아자 피아 즉 피아 광장을 건너 작은 숲을 지난 뒤 산탄젤로 성으로 들어간다. 종점은 산탄젤로 성 정면이 아니라 왼쪽 뒷부분이다. 


파세토는 성벽 사이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에는 다소 좁다. 지붕을 덮어씌운 탓에 밖에서는 파세토 안을 보기 힘들다. 하지만 안에서는 곳곳에 만들어진 틈을 통해 테베레 강은 물론 도로로 달리는 차와 인도로 걷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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