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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라테라노 대성당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



로마의 4대 바실리카 마이오르(메이저 대성당)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인정받는 성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교황청인 바티칸이 바로 인근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식을 놓고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네 성당 중에서 순위가 가장 높은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다. 바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정식명칭은 ‘최고의 성 구세주와 성 세례자 요한 및 복음서저자 사도 요한의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줄여서 라테라노 대성당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로마는 물론 서구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성당이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는 13년 먼저 지어졌다. 한마디로 로마인들이 개인 저택의 지하실이나 카타콤베가 아니라 제대로 된 예배당에서 최초로 기도를 드린 공간이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곳은 14세기까지만 해도 1천 년 이상 교황의 처소 역할을 했다. 



이같은 중요성을 입증하듯 라테라노 대성당의 입구 양쪽에는 긴 글이 붙어 있다. ‘옴니움 우르비스 에트 오르비스 에클레시아룸 마테르 에트 카푸트.’ 사전을 꺼내 번역해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로마와 세계 모든 성당의 수도이며 어머니.’ 


이것이 무슨 뜻인지 깊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글자 그대로다. 서방 가톨릭 성당 중에서 ‘어머니 성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이곳은 아직도 로마교구 대성당이며 로마가톨릭 교황의 주교좌성당이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가 1300년 ‘최고 신앙 보고’라는 칙령을 발표해 5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뜻하는 성년(聖年) 제도를 만들고 4대 메이저 대성당 제도의 출발을 알린 곳도 라테라노 대성당이었다. 바티칸으로 처소를 옮긴 역대 교황이 19세기까지 취임식을 거행한 장소도 이곳이었다. 여기에서는 종교 공의회도 다섯 차례나 열렸다.


라테라노 대성당 정면에는 또라틴어로 ‘교황 클레멘스 12세, 5년째에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세례자 요한과 복음서저자 사도 요한의 영광을 위해’라고 적혀 있다. 이 글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헌됐다가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세례자 요한 등에게 공동 봉헌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라테라노 대성당이 형식적으로는 최고의 메이저 대성당이지만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물론 여행객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두는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교황이 거주하는 바티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왜 교황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빼앗기게 된 것일까? 어쩌다 찾아오는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 않은 한적한 성소로 전락한 것일까? 거기에는 과연 어떤 역사가 담겨 있을까?


라테라노 대성당의 역사를 알아보려면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 대성당 일대는 고대 로마 시대에는 라테라누스 씨족의 땅이었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라테라누스 씨족은 평민으로서 최초의 집정관이 된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는 10번이나 호민관을 지내기도 한 평민의 수호자였다. 


라테라누스가 집정관으로 당선되자 원로원 귀족들은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에 반발한 평민들은 군 복무 등 모든 의무를 거부하는 이른바 ‘제2의 성산 철수’로 맞섰다. 이렇게 로마에 큰 파장을 일으킬 만큼 평민의 집정관 선출은 정치적,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이런 영광을 얻을 정도로 라테라누스는 당시 로마 평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정치인이었다. 


라테라누스 가문은 제정 시대에는 집정관 등을 여러 명 배출해 명문 가문으로 성장했지만 네로 황제 시대에 몰락하고 말았다. 집정관 당선자였던 플라우티우스 라테라누스가황제를 몰아내려는 ‘피소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기소 당했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라테라누스 가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버렸다. 


사라지는 듯했던 라테라누스 가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등극에 도움을 준 어릴 적 친구였던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에게 네로가 빼앗아 간 라테라누스 가문의 재산 중 일부를 돌려주었다. 이후 이 지역은 라테라누스 가문의 이름을 붙여 라테라노라고 부르게 됐다. 


라테라누스 가문은 라테라노 지역에 큰 저택 즉 도무스를 갖고 있었다. 이 가문의 저택 외에 귀족들의 대형 궁전도 적지 않았다. 현재 라테라노 대성당 뒤편에 있는 비아 데이 라테라니 거리가 궁전들이 몰려 있던 곳이었다. 일부 황제 가족도 이곳에서 살았다. 


1959년 라테라노 궁전 뒤에 있는 산 지오반니 병원 지하에서 대형 도무스 흔적이 발견됐다.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현제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가 살았던 곳으로 밝혀졌다. 결국 이곳은 부자들이나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황제의 가족도 모여 사는 부촌이었던 셈이다. 


라테라노 대성당 앞에는 원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카피톨리노 언덕의 캄피돌리오 광장에 서 있는 기마상이다. 중세 사람들은 이 기마상을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착각했다. 그래서 기마상을 콘스탄티누스 기마상이라는 뜻인 카발루스 콘스탄티니라고 불렀다. 라테라노 대성당 인근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머니의 사저가 있었고, 대성당 앞에 황제의 기마상이 서 있었다면 당시 이곳은 단순한 부촌을 넘어 매우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라테라누스 가문 저택의 원래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월이 흘러 나중에는 도무스 파우스타라고 불렸다. 라테라노 대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 인근에서 납으로 만든 수도관이 발견됐는데, 여기에 도무스 파우스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문서 기록을 볼 경우 도무스 파우스타라는 이름은 4세기 아프리카 누미디아 밀레비스의 주교였던 기독교 역사학자 성 옵타투스가 작성한 책에 처음 나온다. 여기에는 ‘313년 교황 밀티아데스가 라테라노에 있는 도무스 파우스타에서 가톨릭의 대 회의를 열었다’고 돼 있다.

 

베르나르도 벨로토 '라테라노 광장 풍경' at 개인 소장


여러 역사학자들은 ‘사두정치 때 서방의 황제였던 막스미니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가 이 궁전의 주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파우스타는 어렸을 때 로마를 떠난 이후에는 로마에서 산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옵타투스의 기록에 나오는 도무스 파우스타가 정말 라테라노에 있던 저택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 기록에 따르면 파우스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결혼한 뒤 도무스 파우스타를 결혼지참금으로 가지고 갔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파우스타의 오빠인 막센티우스를 누르고 로마 제국의 통일 황제가 된 이후 저택을 당시 교황 밀티아데스(재임 310~314년)에게 선물했다. 파우스타가 정말 남편에게 저택을 넘겨준 것인지,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선물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에서는 황제가 교황에게 대 회의를 열도록 장소를 빌려준 것뿐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콘스탄티누스가 도무스 파우스타를 밀티아데스에게 선물’한 이후부터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재임 1305~1314년)가 아비뇽에 갇혀 살게 될 때까지 역대 교황은 도무스 데이(신의 궁전)라고 불리게 된 도무스 파우스타에서 거주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꺾고 승리를 거둬 로마를 통일한 뒤 곧바로 라테라노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도 직접 공사장에서 돌을 나르며 공사 진행에 힘을 보탰다. 이런 공적에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지금도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이 서 있다. 


라테라노 대성당이 생기기 전까지 로마에는 봉헌된 예배장소가 한 곳도 없었다. 당시에 소규모 예배는 개인 주택에서, 대규모 예배는 상업적 건물을 빌려 치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처지의 로마에 서방 세계에서는 처음 라테라노 대성당이 건설됐으니 ‘세계 성당의 어머니’라는 평가를 받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라테라노 대성당을 지었다는 사실은 성 옵타투스가 남긴 문서에 적혀 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막센티우스를 누르고 로마에 입성한 직후 기마 근위대 기지와 도무스 파우스타를 교황 밀티아데스에게 선물해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9일에 정문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성 옵타투스의 기록처럼 라테라노 대성당을 신축할 당시 라테라노 일대에는 기마 근위대 기지가 있었다. 원래 네로 황제 시대에 부유한 귀족이 지은 대저택이 있던 곳이었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저택을 허물고 카스트라 노바 에퀴툼 싱굴라리움이라는 새 기마 근위대 기지를 세운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꺾고 로마로 들어간 뒤 기마 근위대를 폐지하고 기지를 없애버렸다. 이탈리아 출신 기독교 전문 고고학자인 엔리코 조시가 1934~38년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신도석 지하에 깔끔한 상태의 카스트라 노바가 존재하고 있었다. 


막센티우스에게 충성했던 근위대 기지 자리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세운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다. 기독교가 볼 때 로마제국 황제는 이교도의 수장이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에 상주한 마지막 로마제국 황제였다. 근위대 기지에 대성당을 세움으로써 한편으로는 라이벌의 근거지를 없애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교도 황제의 기반을 무너뜨려 기독교의 승리를 완벽하게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두 번째는 세월이 흐른 이후 기독교에서 내놓은 해석이다. 


로마의 첫 대성당을 라테라노에 지은 것은 다른 의미도 갖고 있었다. 라테라노는 당시에는 로마 외곽 지역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처음부터 우대하려 했다면 로마 시내 한복판인 마르스 평원이나 포로 로마노 등에 대성당을 지어야 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로마를 평정한 콘스탄티누스였다 하더라도 시내 한복판에 기독교 성소를 세웠다가는 큰 반발에 부닥칠 우려가 적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여전히 이교도가 절대다수인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로마에 처음 대성당을 지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임 314~335년) 시대이던 318년 11월 9일 완공돼 봉헌식을 치렀다. 4세기 종교 역사가인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의 역사』에서 ‘라테라노 대성당 건립 이후 모든 기독교도가 숭앙하면서 예배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 도시에서 봉헌 축제가 열렸고, 신도들이 새로 지은 집을 축성하는 행사는 새 대성당에서 진행됐다. 주교들이 모였고, 외국인들도 몰려들었고, 사람들 사이의 상호 사랑이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조화로 뭉쳤다’라고 적었다. 


라테라도 대성당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헌한 성소였다. 이곳을 세례자 요한에게 다시 봉헌한 사람은 10세기 교황 세르지오 3세(재임 904~911년)였다. 그는 라테라노 대성당에 세례당을 추가했다. 원래는 대형 욕장이 있던 곳이었다. 교황은 세례당 완공을 축하하는 뜻에서 대성당을 세례자 요한에게 바치는 봉헌식을 다시 열었던 것이다. 12세기 교황 루치오 2세(재임 1144~45년)는 여기에 덧붙여 『요한복음』을 쓴 성 요한에게 성당을 바치는 봉헌식을 재차 거행했다. 


로마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였던 라테라도 대성당은 14세기 초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가 그 원인이었다. 아비뇽 유수는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재앙 그 자체였다. 교황이 아비뇽에 갇혀버리자 대성당을 관리하는 다른 성직자들도 모두 함께 떠나버렸다. 교황이 로마를 버린 사이 로마 시민들과 대성당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당시 로마의 인구가 얼마나 크게 줄었던지 2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08년 6월 6일 라테라노 대성당에 큰 불이 났다. 사흘 동안 이어진 불로 신도석 지붕과 도무스 데이가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아비뇽에 있던 교황 클레멘스 5세(재임 1305~14년)는 이 소식을 듣고도 재건 계획을 세우거나 로마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343년에는 폭풍이 몰아쳤고, 1347년에는 지진이 발생해 대성당을 덮었다. 


설상가상으로 1360년에는 다시 불이 나 대성당을 붕괴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교황 우르바노 5세(1362~70년)가 1364년 시에나의 건축가 지오바니 디 스테파노에게 라테라노 대성당 재건축을 지시했지만 과거의 모습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그레고리오 11세(1370~78년)가 아비뇽 유수를 끝내고 로마로 돌아왔지만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성당의 위상을 더욱 떨어뜨리는 일에 불과했다. 그는 과거 교황의 처소였던 라테라노 궁전에서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교황은 일단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 거처를 마련했다. 나중에는 지금의 테르미니 역 근처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다 마침내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곁에 있던 바티칸 궁전으로 침소를 다시 옮겼다. 


이후 역대 교황은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만약 교황이 아비뇽 유수 때문에 로마를 떠나지 않고, 이후 두 차례 불이 나지 않았다면 지금 로마 가톨릭 교황청은 라테라도 대성당에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테라노 대성당의 본격적인 재건 작업은 16세기에 시작됐다. 교황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는 아끼던 건축가 도미니코 폰타나에게 라테라노 대성당 복구 작업을 맡겼다. 폰타나는 기존에 있던 라테라노 대성당 건물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그는 대성당 앞에 너른 광장을 조성했고, 광장에는 거대한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만들고, 투트모스 4세가 테베의 카르낙 사원에 세운 오벨리스크였다. 무게가 무려 455t이어서 현재 제대로 서 있는 오벨리스크 중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 원래 콘스탄티누스의 둘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가 대전차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운 것이지만 폰타나가 새로 만든 광장으로 옮겼다. 


라테라노 대성당 재건 사업은 식스투스 5세 이후에도 이어졌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임 1644~55년)는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게 라테라노 대성당을 리모델링하라고 지시했다. 보로미니는 대성당에 벽감 12개를 마련한 뒤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하는 석상 12개를 만들어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예산 등의 문제 때문에 그는 석상을 끝내 제작하지 못했다. 


석상을 만들어 세운 사람은 교황 클레멘스 11세(재임 1700~21년)였다. 그는 라테라노 대성당의 벽감이 빈 사실을 알고는 추기경 팜필에게 ‘실물보다 큰 12사도 석상 12개를 만들어 채우라’고 지시했다. 석상 스케치는 당시 교황이 가장 아꼈던 화가 카를로 마라타가 그렸다. 


교황은 스케치를 각 조각가에게 넘겨주고는 그대로 만들게 했다. 조각가 12명 중 11명은 교황의 지시를 이행했지만 피에르 르 고르스만은 예술가의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교황의 허가를 얻어 직접 스케치를 해서 자신만의 석상을 만들었다.

 


교황 클레멘스 12세(재임 1730~40년)는 더 대담하고 야심에 찬 재건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대성당의 새 정면을 만들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다. 모두 23개 작품이 응모했는데,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의 작품을 내놓았다. 심사위원단은 이탈리아의 수학자이며 건축가인 알레산드로 갈릴레이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새 정면은 1735년 완공됐다. 오늘날 우리가 대성당에 가면 볼 수 있는 바로 그 모습이다. 대성당 정면에 ‘교황 클레멘스 12세, 5년째에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세례자 요한과 복음서저자 사도 요한의 영광을 위해’라는 글을 새긴 것도 바로 이때였다.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교황의 무덤 6개가 있다. 알렉산데르 3세, 세르지오 4세, 클레멘스 12세, 마르티노 5세, 인노첸시오 3세, 레오 13세다. 이들 외에도 다른 교황들을 묻은 무덤 12개가 더 있었지만 1308년과 1361년에 발생한 화재로 모두 파괴돼 버렸다. 교황청은 신분을 확인할 수 없게 된 교황들의 유해를 발굴해 공동묘지에 함께 매장했다. 


라테라노 대성당 앞 라테라노 궁전에서 길을 건너가면 산크타 산크토룸이라는 예배당이 나온다. ‘성스러운 계단’인 스칼라 산크타가 있는 곳이다. 나무로 둘러싼 28개의 하얀 레바논산 대리석 계단이다. 중세 전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의 저택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기 위해 힘들게 내려왔던 계단이다. 예수가 수난을 상징하는 발자국을 남긴 곳이어서 성스러운 계단으로 받아들여진다. 두 번째, 열한 번째, 스물여덟 번째 계단에 묻은 얼룩은 예수의 핏자국이라는 주장이 있어 특히 숭배를 받는다. 


중세 전설에 따르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친모 성 헬레나가 아들에게 부탁해 326년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 계단을 가지고 왔다. 당시에는 ‘빌라도의 계단’이라는 뜻인 스칼라 필라티로 불렸다. 원래는 성 실베스터 예배당 근처 복도에 설치돼 있었지만 식스토 5세가 라테라노 대성당을 완전히 부수고 재건축할 때 예배당을 새로 만들어 계단을 옮겼다고 한다. 


스칼라 산크타가 과연 진짜 빌라도 저택의 계단이었는지, 과연 헬레나가 아들에게 부탁해서 로마로 가져온 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왜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예수의 계단을 가져가지 않고 이곳에 갖다놓았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헬레나의 전설은 중세에 들어서야 생겨났다는 점에서 이때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스칼라 필라티는 교황의 거처가 된 라테라노 궁전을 새로 꾸밀 때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하기 위해 주변의 고대 로마 시대 도무스에서 뜯어온 계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 ‘필라티’는 라틴어로 빌라도를 뜻하기도 있지만 ‘투창으로 무장한’이라는 뜻도 있다. 당시 예배당 앞 계단에서 창을 든 병사들이 경비를 섰는데, 이 때문에 스칼라 필라티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어쨌든 스칼라 산크타가 예수의 수난을 담고 있는 계단이라는 이야기가 퍼지자 순례자가 몰려들었다. 다들 예수의 수난을 따라 하기 위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작자 미상의 1960년대 사진


16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마틴 루터도 1510년 무릎으로 계단을 오른 적이 있다. 그는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외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영혼이 연옥에 가지 않는다고 믿었다. 루터는 계단 끝까지 올라간 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작가 찰스 디킨스도 1845년 스칼라 산크타를 방문한 뒤 ‘내 인생에서 오늘처럼 웃기고 불쾌한 경험은 한 적이 없었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순례자들을 보고는 ‘외양적 형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었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가 계단을 오르내렸던지 대리석이 닳기 시작했다. 그래서 교황 베네딕토 13세(재임 1724~30년)는 대리석 계단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뒤집어씌우게 했다. 일부에서는 베네딕토 13세의 선임이었던 인노첸시오 13세(재임 1721~24년) 때 나무를 씌웠다고 주장한다. 


2019년 4월 라테라노 대성당 측은 나무 덮개를 벗겨냈다. 21세기 들어 다시 순례자들이 너무 몰려 나무 덮개조차 닳아 보수 공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대리석 계단의 거의 300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대성당 측은 나무 덮개를 벗겨내고 공사를 진행한 4~7월 석 달 동안 한시적으로 순례자들이 대리석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를 수 있게 허용했다. 이것도 또한 300년 만이었다. 공사를 마친 뒤 다시 나무 덮개가 씌워졌고, 언제 다시 대리석 계단이 공개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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