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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8월 로마에 눈이 내리면



4세기 중엽 로마에 지오반니 파트리지오라는 부유한 귀족이 살았다.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던 그는 죽은 뒤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자식이 없어 별 즐거움을 모르고 매일 시무룩하게 살던 그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내일 눈이 내리는 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짓도록 하세요.”


잠에서 깬 지오반니는 반신반의했다. 꿈을 꾼 그날은 8월 중순이었다. 원래 로마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는데다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눈이 올 리가 만무했다. 그는 이른바 개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일 때문에 에스퀼리노 언덕 꼭대기로 올라간 지오반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성령으로 충만했음을 느낀 그는 서둘러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였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바쳐 성당을 지었다.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에서 열차를 타고 달리다 종점인 테르미니 역에 내린다. 역을 등지고 왼쪽으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웅장한 성당 하나가 보인다. 로마의 4대 메이저 성당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다. 지오반니가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아 지었다는 바로 그 성당이다.


이 성당은 찾는 관광객이 그렇게 많지 않은 곳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깊은 의미를 가진 성소다. 서방 세계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성당이기 때문이다. 로마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한 성당이 26곳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그래서 ‘가장 크다’는 뜻인 마조레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눈이 내린 곳에 지었다’는 전설 때문에 산타 마리아 델라 네베(눈의 성모 마리아)라고 불렸다.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의 구유 일부를 얻은 뒤에는 산타 마리아 델 프레페세(구유의 성모 마리아)라고 불리기도 했다. 종국적으로는 로마의 26개 산타 마리아 성당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해서 마조레, 영어로 메이저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성당이 세워진 장소는 원래 고대 로마의 여신 키벨레 신전이 있던 곳이었다. 키벨레는 아나톨리아 지역의 여신이었다. 그리스에서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 또는 데메테르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로마에서는 ‘위대한 어머니 신’이라는 마그나 마테르로 숭앙받았다. 


1931~33년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 현재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애프스 밑에서 오푸스 비타툼이 나왔다. 오푸스 비타툼은 고대 로마 말기이던 4세기 무렵 도입된 건축기법이었다. 발굴 당시 전문가들은 ‘리베리오가 건설한 대성당의 일부’라고 추정했다. 키벨레 신전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었다.


30여 년 뒤인 1966~71년 새 발굴조사 결과 고대 로마 전성기였던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다른 건물이 발견됐다. 성당은 아니었다. 건물은 큰 정원과 열주 회랑, 그리고 부속실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가로 37m 세로 30m 크기였으며 지하 6m 깊이에 파묻혀 있었다. 


금석학적 자료에 따르면 이 건물은 네라티우스 가문의 복합주택 중 하나인 것으로 추정됐다. 네라티우스 가문은 평민 출신 귀족이었다. 이런 건물이 발견된 점으로 봤을 때 대성당 자리에는 키벨레 신전 외에 여러 건축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건설 시기는 고대 서적에 따라 다르게 추정한다. 역대 교황의 역사를 담은 책인 『폰티피칼레 로마눔』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라고 불리는 리베리오 대성당은 교황 리베리오(재임 352~366년) 시절에 건설됐다. 식스토 3세(재임 432~440년)가 보수하고 확장했다’라고 적었다.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 서적인 『브레바리움 로마눔』은 그 시기를 100년 정도 늦춘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로 공표된 이후 교황 식스토 3세가 에스퀼리노 언덕에 ‘성스러운 신의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성당을 하나 지었다는 것이었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브레바리움 로마눔』의 손을 들어준다. 5세기 초 공사를 시작해 식스토 3세 때에 완공됐다는 것이다. 이 무렵 로마제국 전역에서 성모 마리아의 인기가 매우 높아져 곳곳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하는 성당을 짓는 바람이 불었다는 이야기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내부는 5세기에 처음 건설했을 때의 기본 구조를 아직도 갖고 있다. 다만 외부는 18세기에 새로 건설해 많이 바뀌었다. 유일하게 초기 기독교 대성당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외부 부분은 명층이다. 고딕식 교회에서 높은 창이 일렬로 달린 부분이다. 


대성당에서 가장 오래 된 부분인 신도석은 아테네 산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다른 성당이나 고대 로마 건축물에서 뜯어온 기둥일 것으로 추정한다. 신도석 양측 모자이크는 5세기에 만들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에서는 최초로 성서를 연속으로 표현한 모자이크다. 왼쪽 모자이크에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른쪽 모자이크에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대부분은 원본이지만 일부는 세월 탓에 훼손돼 16세기에 새로 만들었다. 


대성당에는 ‘교황의 연단’이라고 해서 교황만 사용할 수 있는 연단이 있다. 교황이 특별 허가를 하사한 사제도 이용할 수 있다. 교황은 매년 8월 15일 성모 승천 축일에 여기서 대형 미사를 연다. 연단에는 반암 항아리가 하나 있다. 『마태복음』을 쓴 성 마태 등 여러 성인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


연단 아래에는 무릎을 꿇은 비오 9세(재임 1846~78년)의 조각상이 새겨진 고해성사석이 있다. 옆에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히에로니무스가 묻혔다는 동굴 모양의 베들레헴 지하묘지가 있다.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의 동굴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동굴 어딘가에는 예수가 태어난 구유 조각도 있다고 전해진다. 구유 조각은 7세기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곳에서 탈출한 기독교 난민이 로마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구유와 성 히에로니무스의 유해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구유 조각과 성 히에로니무스의 유해 외에 다른 성 유물도 여럿 있었다. 이 중에서 14세기에 만든 십자가 모양 성 유물함에 들어 있는 성 십자가 조각은 아직도 대성당에 보관돼 있다. 11세기 책으로 알려진 『로마의 경이』에는 ‘성모 마리아의 모유와 주 예수의 피 또한 크리스탈 컵에 담겨 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성 유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화려한 장식을 가진 성 파올리나 예배당이다. ‘로마 백성의 건강 또는 구원’이라는 뜻의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로 알려진 성모 마리아 성화 덕분에 유명한 곳이다. 대부분 학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설명하지만, 전설이 전하는 이야기는 다르다. 『누가복음』을 쓴 성 누가가 그렸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자 성모 마리아는 개인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겨 사도 요한의 집에 갔다. 성모 마리아는 성 누가에게 초상화를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성 누가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성모 마리아가 들려주는 예수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나중에 『누가복음』에 담았다. 


4세기 무렵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갔다가 성화를 발견했다. 그녀는 다른 성 유물과 함께 성화를 챙겨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어머니가 가지고 온 성화를 보관하기 위해 성당을 건설했다. 성 헬레나는 나중에 로마에 갈 때 성화도 가지고 갔다.


『폰티피칼레 로마눔』에 따르면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는 처음에는 라테라노 대성당에 걸려 있다 나중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책에는 ‘리베리오(재임 352~366년)는 교황청 예배당에 걸려 있어 여러 사람으로부터 공경 받던 그림 한 점을 골라 새 성당에 걸었다. 이 그림은 성 헬레나가 로마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다. 


성화는 처음에는 대성당 세례당의 입구 문 위에 걸려 있었다. 1240년 무렵부터 여러 공식 문서에 레기나 카엘리(하늘의 여왕)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대성당의 신도석으로 옮겨졌고, 13세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이동식 예배당에 보관됐다. 파올리나 예배당의 제단에 안치된 것은 1613년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걸기 위해 12세기에 성화를 그린 것이라고 추정한다. 신도들에게 큰 인기를 끌자 ‘성 누가가 그렸고, 로마의 역병을 퇴치한 기적을 이뤘다’는 전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신도석과 복도의 천장은 판테온처럼 뚫려 있었다. 이곳에 지금처럼 천장을 덮어 씌운 사람은 교황 갈리스토 3세(재임 1455~58년)였다. 그와 같은 보르기아 가문 출신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장을 금으로 도금했다.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2세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이 신대륙의 잉카제국에서 약탈해 교황에게 선물한 황금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잉카제국의 눈물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천장을 적신 셈이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교황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 시대에 크게 변모하게 된다. 그는 추기경 시절 때부터 대성당 증축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의 무덤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르네상스 후기 건축가 겸 조각가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대성당의 성체 예배당 규모를 두 배로 키우라고 지시했다. 


폰타나는 예배당의 웅장한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당시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셉티조디움을 해체해서 얻은 대리석을 공사에 사용했다. 쓰고 남은 대리석은 피아자 델 포폴로(포폴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와 코르소 거리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아우스 원주의 기단으로 활용했다. 


셉티조디움은 203년 로마 제정 시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만든 신전이었다. 태양과 달 외에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태양계에 있는 일곱 항성과 위성의 신을 모신 곳이었다. 셉티조디움이라는 이름은 ‘일곱 태양의 신전’을 의미했다.



식스토 5세가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결과물은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이었다. 그의 소망대로 지금 이곳에는 아주 정교하게 만든 그의 무덤이 있다. 시스티나는 ‘식스토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을 뜻하는 말이다. 라틴어로는 식스티눔, 이탈리아어로는 시스티나, 영어로는 시스틴이다. 특히 식스토 4세와 5세를 이렇게 불렀다. 따라서 시스티나 예배당은 식스토 예배당이라는 뜻이다. 


예배당 바로 앞에는 17세기 로마 최고의 건축가 겸 조각가였던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와 그 가족의 무덤이 있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와 보르게세 미술관에 보관돼 있는 조각 ‘아폴로와 다프네’ 등을 만든 사람이다. 


베르니니는 교황 우르바노 8세(1623~44년) 시절부터 여러 교황의 호의를 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지나친 특혜를 받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애프스를 새로 지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비용이 엄청난데다 새 애프스를 지으려면 옛 모자이크를 모두 파괴해야 한다는 점이 알려지는 바람에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사 결국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베르니니가 1680년 11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로마인들은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장례식은 아주 조촐하게 치러졌고, 그는 대성당에 있던 조촐한 부모 무덤 옆에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묻혔다. 일부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자고 제안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무덤에는 주인이 누구라고 소개하는 간단한 명문조차 붙어있지 않다. 다만 베르니니 가문의 무덤이라는 명문만 바닥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대성당에 가는 사람 중에 베르니니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식스토 5세는 당시에는 로마 시내에서 떨어져 있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접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도로를 건설했다. 먼저 대성당에서 포로 로마노 인근까지 연결되는 비아 파이니스페르나를 건설했다.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손쉽게 갈 수 있는 비아 메룰라나는 물론 스페인광장에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까지 이어지는 스트라다 펠리체도 깔았다.


교황은 에스퀼리노 광장에 길을 내기 위해 원래 그곳에 있던 성 누가 성당을 허물어버렸다. 성당은 원래 로마 화가 조합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를 그린 사람이 누가였기 때문에 화가 조합은 누가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었다. 교황은 화가들에게 포로 로마노에 있는 산타 마르티나 성당을 사무실로 이용하라고 했다. 


대성당 북서쪽 앞에는 널찍한 에스퀼리노 광장을 만들었고, 광장에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도 하나 세웠다. 오벨리스크는 1519년 무너지는 바람에 세 조각으로 부러져 있었다. 영묘에는 오벨리스크가 두 개 있었는데 나머지 하나는 퀴리날레 광장으로 옮겼다. 


대성당 동남쪽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광장에는 콜로나 델라 파체(평화의 원주)가 세워져 있다. 원래 포로 로마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앞에 세워져 있던 것을 1614년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가 교황 바오로 5세(재임 1605~21년)의 명령을 받아 옮겨놓았다. 


원주는 그리스 파로스 섬에서 캐낸 거대한 대리석 하나로 만든 것이다. 이랑 무늬가 있는 게 특징이다. 원주에는 교황이 보르게세 가문 출신임을 상징하는 독수리 두 마리와 용 두 마리가 대좌를 장식하고 있다. 원주 꼭대기에는 무원죄잉태설을 상징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20세기 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큰 위기를 맞았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신도석 천장이 썩어 들어갔다. 신도석 측면 벽의 유리창 틀도 썩어 물이 새는 바람에 벽은 물론 그 앞에 붙어 있는 5세기 모자이크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탈리아 정부는 성당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일이 위험하다고 경고할 정도가 됐다. 


원인은 대성당 행정부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사제단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있었다. 사제단은 대성당 재산을 낭비한데다 대성당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다. 엄청난 재앙이 닥쳤다는 보고를 받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임 1978~2005년)는 대성당 수사신부로 일하고 있던 웨일스 출신의 딜윈 루이스를 공위 주교좌 참사회장으로 임명했다. 그에게 대성당 복원 총감독을 맡긴 것이었다. 


대성당 복원 사업에는 200억 원 가량이 투입됐다. 루이스는 여러 곳에 손을 벌려 복원 사업비를 모금했다. 또 대성당의 종교적, 행정적 업무를 크게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성격이 급해 화를 잘 냈다. 결과적으로 이런 성격이 대성당의 상황을 바로잡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종신 임기에만 의존해 빈둥거리던 사람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대성당을 제 궤도로 돌려놓았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2000년 눈을 감았다. 



로마 4대 메이저 성당인 만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도 성스러운 문인 성문(聖門)이 있다. 2001년 12월 요한 바오로 2세가 축복을 내린 청동 문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문에 붙어 있는 패널의 부조 내용이다. 주 패널은 부활한 예수가 성모 마리아 앞에 나타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한 뒤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부조의 오른쪽 부분은 ‘토리노의 수의’에 새겨진 형상을 보고 만든 예수를 담고 있다. 토리노의 수의는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에 16세기부터 보관돼 온 아마포다. 여기에는 사람 모습 같은 것이 보인다. 기독교는 예수의 모습이 각인된 것이라고 믿는다. 


반대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새겨져 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의 그림을 보고 만든 부조 조각이다. 윗부분에는 성수태고지 장면을, 다른 쪽에는 성령강림절을 묘사하고 있다. 왼쪽 아래 부분에는 성모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선포한 에페수스 공의회 장면이, 오른쪽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를 교호의 어머니로 선언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장면이 담겨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는 해마다 8월 5일에 대형 미사가 열린다. 미사 도중 돔에 달려 있는 등불에서 장미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며 떨어진다. 지오반니 파트리지오의 꿈에 모습을 드러내 하얀 눈이 내린다고 예언하면서 대성당을 지으라고 명령한 성모 마리아의 전설을 상징하는 행사다. 최근에는 장미 꽃잎 대신 달리아 꽃잎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꽃잎이 더 작아서 많이 하늘거리고, 위에서 아래로 바로 떨어져 내리는 효과를 내기에 좋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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