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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제국의 수도에 기독교 전한 성인의 순교



고대 로마 시대에 전차경주가 열렸던 키르쿠스 막시무스 인근의 지하철 치르코 마시모 역 앞으로 큰 도로가 지나간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였던 아벤티노 언덕에서 이름을 딴 비아 아벤티노 거리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4㎞ 정도 내려가면 오스티엔스라는 지역이 나온다. 서민이나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T’자 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성당이 하나 있다. 이름도 재미있다. ‘바실리카 디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번역하면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이다. 도대체 무슨 성당이기에 이렇게 희한한 이름을 붙인 것일까?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은 만만히 볼 곳이 아니다. 라테라노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과 함께 로마의 4대 메이저 대성당에 포함된 곳이다. 규모로 보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곳이다. 당연히 그 위상이 엄청난 성당이다. 


4세기 무렵 처음 만들어진 이곳은 성 바오로에게 헌정한 성당이다. 그가 순교한 장소가 로마 성 밖이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규모로 보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성소다. 성 바오로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어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더 나아가 예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도로 맹활약한 인물이다. 그의 일생과 관련한 내용은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상세하게 나타난다. 

1900년대 성경카드

<사도행전>은 ‘60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도착한 이후 가택연금 돼 2년을 보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그가 로마에서 무슨 일을 하다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성 바오로는 그리스에서 전도 활동을 벌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 ‘왕을 자처한다’는 이유로 기소 당했다. 


위기에 몰린 성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 소지자임을 이용해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겠다’고 주장했다. 고대 로마에서 로마 시민권 소지자는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황제에게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려달라고 항소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 덕분에 성 바오로는 로마로 끌려가 재판을 기다리는 3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예수의 말씀을 전파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기독교가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성 바오로는 64년 네로 황제 시대에 발생한 대화재 이후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순교를 정확히 설명하면 ‘처형당했다’고 후세에 기록이 ‘정리’된 것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성 바오로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이후 죽을 때까지 3년의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내용은 없다. 


성 바오로가 순교한 해는 65년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네로의 집권 마지막 해였던 68년 2월 22일이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는 네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했다’는 기록도 있고, ‘네로가 성 바오로를 직접 죽였다’는 전설도 있다. ‘네로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한 행정관이 참수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성 바오로가 어디서 처형당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후세에 ‘세 분수 수도원’으로 번역할 수 있는 트레 폰타네 수도원으로 ‘정리’됐다. 비아 라우렌티나(라우렌티나 가도)에 있는 아쿠아 살비아 근처였다. 이 수도원은 포로 로마노에서 12㎞나 떨어진 먼 곳이다. 사형수를 그 먼 곳까지 데리고 가서 죽인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지금은 자동차 덕분에 12㎞라고 해도 10분이면 갈 수 있지만, 1세기에는 함부로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전설에 따르면 성 바오로가 참수당한 뒤 그의 머리가 세 번 땅에서 튀었다. 그때마다 샘이 하나씩 생겼다. 그것이 ‘세 분수’ 즉 트레 폰타네가 됐다. 이곳은 오늘날 ‘산 파올로 알레 트레 폰타네(성 바오로의 세 분수)’로 알려져 있다. 성 바오로의 목에서 피 대신 우유가 솟아올랐다는 전설도 있다. 


바티칸에서 순교한 성 베드로도 그랬지만 성 바오로가 순교한 뒤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갖게 하는 게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다. 유족들은 순교자가 세상을 버린 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시신을 묻었다. 이것도 당시 풍습이었다. 대부분 기독교도 소유의 부지였으며, 도시 밖으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이었다. 


성 바오로가 묻힌 땅의 주인은 루키나였다. 당시 그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루키나가 단순히 다른 후원자에게 무덤용으로 땅을 팔았을 수도 있다. 그의 무덤에는 ‘추억의 방’이라는 뜻인 추모시설 셀라 메모리아가 생겼다. 


성 바오로의 유해는 200년가량 지하 납골소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었다. 망자가 묻힌 곳은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게 고대 로마 풍습이었다. 하지만 258년 군인황제 시대에 상황은 돌변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무덤을 보호하는 풍습의 특권에서 기독교를 제외한다는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도들은 비밀리에 성 바오로의 유해를 빼내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베에 숨겼다. 세월이 흘러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탄압이 시들해졌을 때에야 유해는 비아 오스티아나로 되돌아갔다.


초대 교황 성 베드로부터 15세기까지 역대 교황들의 전기를 모은 『교황 연대기』에 따르면 성 바오로의 무덤 위에는 처음에 아주 작은 성당이 만들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건설을 시작해 324년 11월 18일에 완공한 성당이었다. 위치는 비아 라우렌티나 가도와 비아 오스티엔시스 가도가 만나는 접경지였다. 


4세기 말 발렌티니아누스 2세, 테오도시우스 1세,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기존의 성당을 없애고 더 큰 대성당을 새로 지었다. 새 대성당 건설의 핵심은 성 바오로의 무덤과 기존의 작은 성당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당을 지나던 고대 로마 시대 길의 방향이 바뀌어버렸다. 


새 대성당 봉헌식은 390년 교황 시리치오(재임 384~399년) 시대에 열렸다. 준공식은 395년 호노리우스 황제 시대에 이뤄졌다. 로마 속주 타라코넨시스 출신의 기독교 시인 프루덴티우스는 대성당 외관을 ‘도금한 청동타일을 붙인 지붕으로 덮였다’고 설명했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은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큰 피해를 입었다. 가장 큰 고비는 8세기 무렵 랑고바르드 족과 이슬람 해적의 침입이었다. 이탈리아 북부에 롬바르드 왕국을 세운 랑고바르드 족은 739~773년 사이 여러 차례 대성당을 약탈했다. 843년에는 이슬람 해적이 테베레 강을 타고 올라와 역시 성당을 약탈했다. 


연이은 약탈로 대성당이 큰 피해를 입자 교황청은 883년 성벽과 성탑을 쌓았다. 덕분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생겼다. 사람들은 성벽 건설을 주도한 교황 요한 8세(872~882년)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마을에 ‘요한의 도시’라는 뜻인 요하니폴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벽은 이후 대성당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083~84년 로마로 쳐들어온 동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침공 때 대성당이 약탈당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1305~78년 교황이 프랑스에 끌려간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교황 거주지였던 라테라노 대성당이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은 반면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은 반사이익을 얻었다. 이곳의 수도원장이 교황 직무대리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대성당과 수도원은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됐다. 


오늘날 로마에 가면 볼 수 있는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은 19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축을 하게 된 이유는 1823년 7월 15~16일 발생한 끔찍한 대화재였다. 지붕으로 연결되는 구간에서 수리 공사를 하던 일꾼이 화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게 화재의 원인이었다. 


대성당은 완전히 붕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큰 피해를 입었다. 신도석 천장이 내려앉았고, 불길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신도석 대리석 기둥은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생석회가 될 정도였다. 신전을 떠받치고 있던 반암 대리석은 아예 무너져 내렸다.


당시 교황이던 비오 7세(재임 1800~23년)는 성밖 성 바오로 대성당을 무척 아꼈다 그런데 불이 발생했을 당시 그는 중병이 들어 병석에 누워 있었다. 화재 사건이 줄 충격을 걱정한 교황청 궁무장관 콘살비 추기경은 교황에게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교황은 화재 소식을 알지 못한 채 7월 20일 눈을 감았다.


넉 달 뒤인 11월 18일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2세(재임 1823~29년)는 대성당 재건을 시작했다. 교황은 쥬세페 발라디에르를 주 건축가로 임명했다. 발라디에르는 현대적 분위기를 담은 혁신적 안을 내놓았다. 대성당의 트렌셉트(십자가형 교회의 좌우 날개 부분)를 주요 부분으로 삼고, 신도석은 고대 신전처럼 지붕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청 안팎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전통을 무시한 설계는 전혀 성스럽지 못하며 성 바오로에게는 모욕이라는 이야기였다. 발라디에르의 혁신안은 결국 거부당했다. 교황은 대성당을 ‘현대적’으로 짓기보다는 옛날 모습 그대로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공사는 거의 100년이나 걸려 1930년에야 완공될 수 있었다.


공사를 다시 시작한 건축가는 파스쿠알레 벨리였다. 교황청은 공사비 모금 운동을 벌였다. 공사는 1826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런데 벨리는 교황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자이크를 떼어내 다른 곳으로 옮기더니 옛날부터 서 있던 개선문은 허물어버렸다. 열주 회랑과 종탑도 마찬가지였다. 


더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신도석 열주를 아예 뭉개버렸다는 것이었다. 카발리니가 그렸던 프레스코화도 부숴버렸다. 중세에 만든 옛 기념비, 명문 등도 뜯어냈다. 트랜셉트에 있던 스크린 벽과 끝부분의 벽도 허물어버렸다. 차라리 발라디에르에게 공사를 맡기는 게 나을 뻔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벨리는 여기에 거세게 항의했다. 개선문, 열주 회랑, 종탑 등을 다 살리려면 더 많은 돈과 시간이 들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공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신도석 공사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임 1831~46년), 비오 9세(재임 1846~878년) 시대에 빠르게 진행됐다. 덕분에 비오 9세는 1854년에 성당 일부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대성당을 둘러본 예술 사학자들은 벨리가 진행한 공사 결과를 잔인하게 혹평했다. 


“옛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군요. 새 대성당은 마치 기차역같이 돼버렸습니다.”


“새로 지은 신도석은 웅장해 보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보조물이 거의 설치되지 않아 빈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게다가 겨울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추울 겁니다.” 


거꾸로 벨리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1823년 화재가 너무 뜨거워 현관의 청동이 녹을 정도여서 신도석에 남은 게 거의 없었습니다. 건축가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비난과 옹호의 목소리가 서로 다투는 가운데 1860년에는 애프스(교회 끝에 있는 반원형 공간) 뒤편에 있던 예배당 자리에 세운 새 종탑 공사가 끝났다. 1873~84년에는 성당 정면 공사가 진행됐다. 열주 공사는 1890년에 시작돼 1928년에 마무리됐다. 대성당은 착공 100년이 지난 1931년 세례당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완공됐다. 


대성당 복원 사업이 끝나갈 무렵 세계의 종말에 관한 희한한 전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대성당에 복원된 역대 교황의 초상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대성당에는 역대 교황 초상을 모으는 관습이 있었다. 5세기 교황 대 레오 1세(440~461년)의 지시로 시작된 일이었다. 초상은 벽에 그린 프레스코화였다.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그렸다. 초상을 그린 교황도 있었고 안 그린 교황도 있었다. 


대성당 복원작업을 할 때 교황 비오 9세는 역대 교황의 초상을 액자 형태로 복원하라고 지시했다. 이 일을 맡은 예술가는 화가 필리포 아그리콜라였다. 그는 과거 동패에 담겨 있던 모습을 보고 역대 교황의 초상을 대부분 복원했다. 얼굴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경우 임의로 그리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1875년에 끝났다. 


교황의 초상은 성당을 빙 둘러 곳곳에 설치된 벽감에 큰 액자 모자이크로 걸려 있다. 액자의 크기는 똑같고, 창 아래에 일렬종대로 달려 있다. 이제 액자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은 별로 남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의 종말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벽감의 빈 공간이 모두 채워져 교황의 초상을 걸 자리가 없어지면 세계는 종말을 맞는다는 이야기였다. 이 전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교황청은 19세기에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복구공사를 진행하기에 앞서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1~2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됐다. 2000년대 초반에는 바티칸박물관 소속 명문 전문가이자 고고학자인 기오르기오 필리피 팀이 대성당 지하를 다시 조사했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지하의 고대 공동묘지를 발굴했다. 390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대리석 관이 나왔다’고 돼 있다. 석관에는 ‘사도 바오로 순교자’라고 적혀 있어 성 바오로의 유해를 모신 관으로 추정됐다. 


필리피는 지하의 방 입구를 덮고 있는 돌 뚜껑을 들어낸 뒤 석관을 정밀 검사했다. 관에는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하나는 석관 안으로 연결되는 구멍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필리피는 ‘구멍으로 물체를 집어넣어 성 바오로의 유해와 접촉하게 함으로써 이른 바 ‘제2의 유해’를 만들기 위해 뚫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인체를 떼어낸 유해를 사고파는 행위를 금지시킨 뒤 이런 식으로 ‘제2의 유해’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 <사도행전> 19장 11~12절에는 ‘하느님께서 바오로의 손으로 비상한 능력을 행하게 하셨으니 그의 피부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물러갔고 악령이 나갔다’고 돼 있다. 


성 바오로 무덤의 평판은 창살 뒤에 놓여 있다. 방문객이 많지 많다면 교회 관계자에게 들어가 보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들어가볼 수 있다. 평판의 명문에는 라틴어로 ‘사도 바오로 순교’라고 적혀 있다. 명문은 4세기 무렵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벨리가 새로 지은 대성당은 십자가 모양이 아니라 동서 방향으로 T자 모양을 하고 있다. 기본 골격은 벽돌로 쌓았고, 회색 회반죽을 겉에 칠했다. 중앙 신도석 양측 벽에는 작고 둥근 창문 열 개가 달려 있다. 트랜셉트 끝에는 큰 창 3개가 달려 있다. 


대성당에는 열주 회랑이 둘러싼 거대한 내부정원이 있다. 남북으로 길이가 70m에 이른다. 옛 대성당의 내부정원과 같은 모양으로 지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실제로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반박한다. 내부정원 주변은 석회 담장으로 둘러쌌다. 정면에는 코린트식 기둥이 지탱하는 13개의 아치가 만들어져 있다. 


대성당에는 총 150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서쪽 정면에는 기둥이 세 줄로 세워져 있다. 안쪽에는 아치형 채광창 13개가 달려 있다. 채광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을 주는 장면과 열두 사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붙어 있다. 


내부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 바오로 석상이다. 19세기 화재 이후 성당을 복원할 때 만든 것이다. 성 바오로는 그의 머리를 벨 때 사용했던 모양의 칼을 들고 있다. ‘진실의 설교자에게, 이방인들의 스승에게(봉헌하다)’라는 내용이 적힌 명문도 들고 있다. 


내부정원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문은 은세공을 덧붙인 청동으로 만들었다. 옛 정문은 1070년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청동으로 건립했지만 1823년 대화재 때 뜨거운 화염에 녹아버렸다. 1929~31년 만든 새 정문 높이는 7.48m, 너비는 3.35m다. 정문에 새겨진 부조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인생, 사도 생활, 순교를 담고 있다. 


정문을 통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황금색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평소에 깊은 인상을 주는 모자이크이지만, 햇살이 좋은 날이나 경관조명이 비치는 저녁에는 더욱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옛 모자이크는 19세기 대화재 때 애프스 너머 아치로 옮겨졌다. 


정문 페디먼트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 바오로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아래 부분에는 천국의 산에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네 개의 강이 보인다. 네 강은 복음을, 강에서 물을 마시는 열두 마리 양은 12사도를 상징한다. 이곳에 등장하는 도시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다. 가장 아래쪽 부분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지자 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 다니엘을 보여준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에는 ‘성스러운 문’인 성문이 있다. 원래 나무로 만든 성문이 달려 있었지만 2000년 엔리코 만프리니가 청동으로 새로 만들어 설치했다. 성문에는 부조로 여섯 장면이 새겨져 있다. 왼쪽 위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아와 선한 사마리아인, 교황의 자비, 성령강림절에 사도 사이에 있는 성모 마리아, 사도 바오로의 설교와 순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주교단의 설교 임무를 담고 있다. 위에는 라틴어로 ‘평화와 구원의 선물이 영원히 성 바오로의 성전에 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를’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신도석 벽에는 1857~60년 사이 3년 만에 만든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바오로의 생애와 선교 인생을 다룬 내용을 담고 있다. 36개의 판으로 이뤄진 그림은 오른쪽 트랜셉트에서 시작한다. 성 바오로가 처음 등장하는 성 스데반의 순교에서 시작해 바오로의 눈을 뜨게 하는 하나니아스와 바오로의 세례, 다마스쿠스에서 설교하고 피신하는 바오로, 예루살렘 공의회,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 간 바오로, 코린트에 간 바오로, 푸블리우스의 아버지를 치료하는 바오로, 로마에서 기독교도를 만나는 바오로로 이어지다 작별을 고하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및 바오로의 순교로 끝난다.


대성당에는 성 스데반 예배당, 성체 예배당, 성 로렌스 예배당, 성 베네딕토 예배당 등이 있다. 성 스데반 예배당은 성 바오로를 개종하게 만든 초기 기독교 순교자 성 스데반에게 헌정한 예배당이다. 제단에는 성 스데반의 조각상이 있다. 성체 예배당은 애프스의 왼쪽에 있다. 원래는 십자가의 예배당으로 알려졌다. 14세기에 만든 이 예배당의 십자가에는 성 브리지타의 전설이 담겨 있다. 


전설에 따르면 스웨덴 사람인 성 브리지타는 구드마르손과 결혼해 아이 여덟을 낳고 살았다. 그녀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순례를 다녀오던 중 남편을 잃고 말았다. 종교에 몸을 맡기기로 결심한 그녀는 1350년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처음에는 교황으로부터 허가를 얻어 스웨덴에 새 수녀회를 창건할 생각이었다. 당시 교황은 프랑스 아비뇽에 갇혀 있었다. 이 때문에 성 브리지타는 로마에 장기 체류하게 됐다. 그녀는 워낙 선량해서 선행을 많이 해 주변의 로마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됐다. 


성 브리지타는 어느 날 어릴 때 가끔 꾸던 꿈을 다시 꾸게 됐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꿈이었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나를 보거라, 나의 딸아!” 


성 브리지타는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누가 아버지를 이렇게 대접했습니까?” 


예수는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를 멸시하는 자들, 나의 사랑에 무관심한 자들이니라.”


성 브리지타는 수시로 대성당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 그녀가 무릎을 꿇은 곳은 항상 바로 십자가의 예배당이었다. 이곳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전날 꿈 이야기를 되풀이하곤 했다. 놀랍게도 십자가는 그녀의 이야기에 답을 해주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십자가 기단에는 라틴어로 그 내용이 새겨져 있다. ‘성 브리지타는 하늘에 매달려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새겨들었다.’


대성당 입구 오른쪽에는 14~15세기에 만든 성 바오로의 목제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에는 흠집이 많이 생겼다. 조각을 뜯어 가져가려는 순례자들이 만든 흠집이다. 반대편에는 17세기에 만든 성 브리지타 조각상이 있다. 그녀가 십자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담았다. 


유물의 예배당에는 성 바오로가 순교하기 전 며칠 동안 감옥에 있을 때 묶였다는 사슬이 보관돼 있다. 로렌스 예배당은 합창의 예배당이라고도 불린다. 베네딕토 수도사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미사를 올린 곳이 바로 여기였다. 



애프스에서는 13세기 베니스 예술가들이 만든 모자이크가 유명하다. 19세기 대화재에서도 살아남아 눈길을 끈 모자이크이다. 예수가 꽃과 작은 동물이 가득한 들판에 12사도인 베드로, 바울, 누가, 안드레와 함께 서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예수 발밑에는 아주 작은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모자이크를 만들라고 지시한 교황 호노리오 3세(1216~27년)다. 당시에는 교황이 예수와 12사도를 새긴 모자이크나 그림에 함께 등장하는 게 관행적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담긴 건 이례적이었다. 


예수의 발아래에는 수난의 도구들을 새긴 왕관과 보석을 박은 십자가가 놓여 있다. 십자가에는 설교하는 예수를 담은 장면이 새겨졌다. 왕관 옆에는 두 천사가 있고, 영광의 찬가 내용을 담은 두루마리를 나르는 12사도도 보인다. 트랜셉트 오른쪽 끝에는 중세 시대 회랑을 갖춘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의 주요 부분은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꽤 길면서 엄숙해 보이는 3층 건물이다. 이 중세 시대 회랑 남쪽에는 더 큰 회랑이 또 하나 더 있다. 두 수도원 서쪽에도 커다란 정원이 있다. 대성당에서 보면 남쪽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에서는 대성당과 수도원의 관리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대성당은 바티칸에서 임명한 사제가 관리하지만 수도원은 자체적으로 선출한 수도원장이 모든 종교적 업무를 처리한다. 다만 행정 업무는 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도원장은 공식적으로 ‘비카리오 페르 라 파스토랄레’라는 직책을 갖는다. ‘사제 업무를 담당하는 목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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