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왕의 안타까운최후
패권을 장악한 타르퀴니우스는 로마 평민의 사랑을 얻고 싶어 했다. 이전의 여러 왕처럼 그는 다음과 같은 일로서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먼저 타르퀴니우스는 평민 중에서 100명을 골라 귀족으로 발탁해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했다. 모든 사람에게서 전쟁터에서의 용기와 정치적 현명함을 널리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때부터 로마는 이전의 200명 대신 300명의 원로원 의원을 보유하게 됐다.
타르퀴니우스는 이어 영원한 불을 지키는 신성한 베스탈 신녀를 4명에서 6명으로 증원했다. 베스탈 신녀가 참석해 국가 대신 거행하는 희생 제례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4명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었다. 이후 다른 왕들은 타르퀴니우스의 선례를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베스탈 신녀는 6명으로 유지되고 있다.
타르퀴니우스는 순결을 지키지 못한 베스탈 신녀를 폰티피케스가 처벌하는 규정을 처음 고안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직접 이런 결정을 내렸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주장대로 꿈을 꾼 뒤에 이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종교 의례를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시빌 예언서에서 이런 처벌 규정이 발견됐다.
타르퀴니우스의 통치 기간 중 푸블리우스의 딸이며 피아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베스탈 신녀가 순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희생 제례를 치른 사실이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많은 가게와 열주 회랑을 건설해 포로 로마노를 꾸몄다. 그곳은 사법이 행해지던 장소였고, 민회가 열리던 회의장이었다. 그리고 다른 민간 활동도 이뤄졌다. 그는 또 큰 돌을 규칙적으로 쌓아 도시 성벽도 처음 건설했다. 이전에는 임시로 대충 지은 건축물에 불과했다.
또 배수구를 파서 시내에서 모은 모든 물을 테베레 강으로 흘러 보냈다. 글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업적이었다. 로마에서 제국의 위대함이 나타나는 가장 훌륭한 세 가지 업적은 수로와 포장도로, 그리고 배수구 건설이다.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엄청난 비용에서도 그렇다.
타르퀴니우스는 아벤티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키르쿠스 막시무스도 건설했다. 그는 비계를 세워 지붕을 덮은 좌석을 둥글게 건설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관중은 서서 경기를 관람했다. 나무로 만든 관중석은 기둥으로 지탱했다. 그는 관중석을 30개 쿠리아에 배분했다. 각 쿠리아에 특정 구역을 배정한 것이다. 모든 관중은 적당한 장소에 앉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로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감탄할 만한 구조물 중 하나가 됐다. 키르쿠스의 길이는 630m, 폭은 120m 정도였다. 트랙 주변에는 물을 빼내기 위해 운하를 팠다. 운하의 깊이와 폭은 무려 3m였다. 운하 뒤에는 3층 규모의 열주를 세웠다. 가장 낮은 층에는 극장에서처럼 석재 관중석을 건설했다. 나머지 두 층에는 나무 관중석을 설치했다.
긴 열주 회랑 두 개는 짧은 열주 회랑과 양쪽 끝에서 만나게 돼 있었다. 전체 모양은 마치 초승달 같았고, 원형극장처럼 통합된 열주 회랑을 형성했다. 키르쿠스 둘레는 1천440m 정도였고, 총 수용 규모는 15만 석이었다. 키르쿠스의 짧은 쪽은 덮개로 덮여 있지 않았다. 말이 출발하는 지점이었는데 아치 모양이었다. 이곳은 밧줄 하나로 열리게 돼 있었다.
키르쿠스 바깥쪽에는 1층으로 된 다른 열주 회랑이 있었다. 여기에는 가게들이 있었고, 사람들도 살았다. 열주 회랑의 각 가게에는 관객이 들고 날 수 있는 출입구가 있었다. 그래서 수만 명이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유피트르, 유노, 미네르바에게 바치는 신전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사비니 족과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신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전을 짓기로 한 카피톨리노 언덕을 옹벽으로 둘러쌌다. 미리 준비할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어 옹벽과 정상 사이 공간을 많은 흙으로 메워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신전을 건설하기에 충분한 장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는 바람에 신전 기초를 놓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졌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4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세르비우스 툴루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신전의 기초를 놓고 건물 대부분을 건설했다. 그도 신전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그가 쫓겨나고 3년 뒤 집정관이 최종적으로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건물을 짓기 전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타르퀴니우스는 신전을 지을 준비를 하면서 조점관을 불렀다.
“신전 건설 장소와 관련해서 조점을 살펴보시오. 로마에서 어느 장소가 신성한 신전을 봉헌하기에 가장 적당한지를 알아보시오.”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는 언덕, 당시에는 타르페이아, 지금은 카피톨리노라고 불리는 언덕이라는 조점 결과가 나왔다. 타르퀴니우스는 조점관들에게 한 번 더 조점을 살피라고 지시했다.
“언덕의 어느 지점에 기초를 놓아야하는지 알아보시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언덕에는 여러 신과 정령을 모신 많은 제단이 서로 밀집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전을 지으려면 제단 모두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조점관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세워진 제단과 관련해서 각각 조점을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신들이 떠나려고 하면 아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대부분 신과 정령은 제단을 옮기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테르미누스와 유벤타스는 설득당하지 않았고 떠나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제단은 신전 안에 포함됐다. 그 중 하나는 미네르바 사당의 통로에 놓여 있다. 다른 하나는 사당 안쪽 미네르바 신전 근처에 있다. 조점관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어떤 경우에도 로마의 국경이 줄어들거나 로마의 정열이 손상당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조점관의 말은 사실로 이어지고 있다. 두 제단이 옮겨지고 스물네 세대가 흐른 지금도 말이다.
조점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제단들의 위치를 바꾸고 유피테르 신전의 구역을 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언 기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전했다. 그의 이름은 네비우스, 성은 아티우스였다.
네비우스는 점을 보는 사람 중에서 신들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는다고 인정받았다. 이 덕분에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그는 조점기술을 통해 아주 이색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많이 밝혀냈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하나만 설명해보자. 네비우스의 아버지는 아주 작은 농토를 일구던 가난한 사람이었다. 네비우스는 어릴 때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다. 또 돼지를 목초지로 몰고나가 기르기도 했다.
네비우스는 어느 날 돼지를 풀어놓은 뒤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 돼지 몇 마리가 사라진 걸 알게 됐다. 처음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에게 매 맞을 일이 겁났던 것이었다. 그는 근처 농장에 세워진 작은 신전에 갔다. 여러 영웅에게 바친 신전이었다.
“영웅들이시여, 돼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만약 돼지를 찾는다면 농장에서 수확한 포도 중에서 가장 큰 걸 바치겠습니다.”
네비우스는 바로 돼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약속한 대로 영웅들에게 포도를 바치기로 했다. 하지만 곤란한 일이 생겼다. 어느 게 가장 큰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다시 신들에게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때 신성한 정령이 나타나 포도밭을 두 갈래로 나누었다. 하나는 오른쪽,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갈라졌다. 네비우스는 양쪽에 나타난 조짐을 살펴보았다. 그 중 한곳에 새 한 마리가 보였다.
신성한 정령은 새가 나타난 쪽을 다시 둘로 나누었다. 그곳에 또 새가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보니 마지막 포도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고 그곳에 새가 앉아 있었다. 그 포도나무에 엄청나게 큰 포도가 달려 있었다.
네비우스는 포도송이를 영웅들의 신전으로 가져갔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엄청난 크기의 포도송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포도송이를 어디서 구했느냐?”
네비우스는 그에게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점술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아들을 도시로 데려가 점술 기초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맡겼다. 거기서 충분히 기초교육을 받은 뒤에는 에트루리아에서 온 점술사에게 맡겼다.
네비우스는 점술 능력을 타고난데다 에트루리아 점술사로부터 지식을 얻은 덕분에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점술사를 능가하게 됐다. 도시에 사는 조점관들은 그를 공공 조점 행사에 초청하곤 했다. 예언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네비우스의 승낙 없이는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전에 등록한 기사계급 중에서 새로운 부족 3개를 만들어 자기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네비우스만 왕의 생각에 반대했다. 로물루스의 제도를 바꾸는 것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는 네비우스의 반대에 화가 났다. 그래서 그의 실력을 엉터리라고 폭로하고 싶었다. 그를 진실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사기꾼으로 몰고 싶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런 목적을 갖고 네비우스를 포로 로마노의 재판정에 불렀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 모였다.
타르퀴니우스는 어떤 방식으로 네비우스의 조점이 엉터리 예언인지를 폭로할지를 사람들에게 일러주었다. 잠시 후 네비우스가 나타났다. 왕은 아주 반가운 척했다.
“네비우스, 이제 자네 점술의 정확성을 보여줄 때라네. 나는 마음속에 위대한 계획을 갖고 있어. 이것이 가능한지를 알고 싶군. 자네는 조점을 보고 오게.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겠네.”
네비우스는 왕의 지시대로 조점을 보러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왔다.
“아주 우호적인 조짐을 얻었습니다. 왕의 계획은 충분히 실현 가능합니다.”
타르퀴니우스는 껄껄 웃으며 면도날과 숫돌을 가슴에서 꺼냈다.
“네비우스, 우리를 속이고 신의 뜻에 대해 거짓말을 한 자네의 혐의는 유죄로군. 감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단언했으니 말일세. 내가 면도날로 숫돌을 내려치면 숫돌을 반으로 쪼갤 수 있는지를 물으려고 했지.”
재판정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네비우스는 그들의 야유와 비웃음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 면도날로 숫돌을 쳐보시오. 원하는 대로. 그러면 숫돌은 금세 갈라질 거요.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으리다.”
타르퀴니우스는 네비우스의 당당한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면도날로 숫돌을 내리쳤다. 면도날은 숫돌을 그대로 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숫돌을 잡고 있던 그의 손까지 베었다. 타르퀴니우스뿐만 아니라 이 놀랍고도 불가능한 일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은 경탄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타르퀴니우스는 네비우스의 실력을 비웃으려고 했던 걸 부끄러워했다. 그는 네비우스의 호의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 신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로군요.”
타르퀴니우스가 네비우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했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포로 로마노에 세운 청동상이 있었다. 영원히 그를 기억하자는 뜻이었다. 이 동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신성한 돼지나무 근처의 원로원 건물 앞에 서 있다. 이 동상은 사람 크기보다 조금 작다. 머리는 망토로 덮여 있다.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제단 아래에는 숫돌과 면도날이 묻혀 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푸테알(우물)이라고 부른다.
타르퀴니우스는 여든 살에 이르자 전쟁을 그만 두고 싶었다. 그는 이 무렵 선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두 아들이 저지른 반역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들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왕을 강제 퇴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를 쫓아내면 왕 자리가 그들에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안쿠스의 두 아들은 왕 자리를 원래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왕이었으니 아들인 그들이 왕 자리를 물려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로마 시민들이 왕 자리를 그들에게 줄 거라고 믿었다. 이런 기대가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달아날 곳이 없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늘은 그들이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는 걸 바라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가 부족의 수를 늘리려 할 때 네비우스는 그 계획에 반대했다. 그런데 숫돌 사건 이후 최고의 명성을 얻었고 어떤 로마인보다 큰 권력을 잡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같은 직업을 가진 라이벌의 질투 때문일 수도 있고, 적이나 다른 불운의 질투 때문일 수도 있다.
로마인은 그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면서 많은 사람을 의심했다. 마르키우스의 두 아들은 군중들의 동요를 인지하고는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책임은 왕 타르퀴니우스에게 있다.”
이들은 이런 주장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없으면서 다만 그럴 듯한 두 가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왕은 불법적으로 법을 많이 고치려고 했습니다. 이전에 했던 것처럼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을 때 네비우스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를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하지 않을 행동입니다.”
안쿠스의 두 아들은 귀족과 평민 중에서 지지자를 모았다. 그들에게 돈을 아낌없이 뿌렸다. 그들은 타르퀴니우스를 수시로 비난했다.
“오염된 왕이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거나 왕권을 더럽히는 걸 시민들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 자는 로마인이 아닙니다. 국적도 없이 나타난 신참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이런 말을 함부로 내뱉으면서 많은 평민의 마음에 불꽃을 일으켰다. 타르퀴니우스가 변명하러 포로 로마노에 오면 불결한 왕으로 몰아붙여 쫓아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을 뒤집을 만큼 강한지지 세력을 갖지 못했다. 또 시민들에게 타르퀴니우스를 왕위에서 쫓아내자고 설득할 만한 힘도 갖고 있지 못했다.
타르퀴니우스는 강력한 방어력으로 온갖 비방중상을 물리쳤다. 그리고 당시 평민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위 툴리우스도 로마인에게 평상심을 되찾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쿠스의 두 아들은 비방과 중상만 일삼는 사악한 사람으로 몰리게 됐다. 그들은 큰 모욕을 당한 채 포로 로마노를 떠나야 했다.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는 데 실패한 안쿠스의 두 아들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왕과 화해를 모색했다. 왕은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호의를 생각해서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관대하게 용서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뉘우치는 모습만으로도 성급한 성격을 고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안쿠스의 두 아들은 3년 동안이나 ‘우호’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느 날 아주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자 그들은 다시 반역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여러 공모자 중에서 가장 무모한 두 청년에게 낫을 주었다. 그리고 한낮에 왕의 집으로 보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야 하는지 일일이 일러주었다.
두 젊은이는 왕의 집 근처에 가자 마치 서로 큰 상처를 주고받은 것처럼 헐뜯으며 싸웠다. 심지어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두 젊은이는 목소리를 높여 왕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안쿠스와 뜻을 같이 하는 공모자들은 시골사람처럼 꾸민 채 주변에 서 있었다. 이들은 각각 두 젊은이 편을 들면서 서로 한탄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타르퀴니우스는 두 젊은이를 데려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왜 싸우는지를 물었다. 두 젊은이는 염소 때문에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 마치 시골사람이 싸우는 것처럼 동시에 소리쳤고 동시에 열정적으로 몸짓을 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두 젊은이는 사람들의 조롱이 계획을 실천할 기회가 왔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왕에게 달려들어 낫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리고는 문으로 빠져나가 도망쳤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도망가던 두 젊은이를 쫓아가 붙잡았다. 둘은 고문을 당한 끝에 음모를 꾸민 사람들의 이름을 불었다. 그들은 결국 당연한 처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