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조사와 사회 구조 개편
툴리우스는 왕이 되자마자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공공용지를 나누어주었다. 이어 개인 간 거래는 물론 불법행위와 관련된 법을 정비했다. 무려 50개 정도였다.
툴리우스는 비미날레 언덕과 에스퀼리노 언덕을 로마에 포함시켰다. 둘 다 제법 넓은 언덕이었다. 그는 두 언덕을 집이 없던 로마인에게 나눠줘 집을 짓게 했다. 그도 그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에스퀼리노에서 가장 좋은 위치였다.
툴리우스는 로마의 영역을 넓힌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조점을 살핀 뒤 법에 따라 종교 의식을 거행하고 두 언덕을 기존의 다섯 언덕에 덧붙였다. 이후 로마 확대 작업은 더 진행되지 않았다. 신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거주지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고 성벽 밖에 있었다. 그래서 적이 쳐들어올 경우 쉽게 약탈당했다.
외곽지역만 보고 로마의 규모를 판단한다면 자료 부족 때문에 오해를 할 우려가 크다. 어디까지가 로마인지, 어디에서 로마가 끝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로마가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성벽으로 로마를 측정하려 한다면, 여러 곳에서 성벽을 둘러싼 건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 구조물 흔적을 잘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는 다른 도시들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툴리우스는 성벽을 쌓아 일곱 언덕을 둘러싼 뒤 도시를 네 구역으로 나눴다. 각 구역의 명칭은 언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첫 번째 구역은 팔라티노, 두 번째 구역은 수부라, 세 번째 구역은 퀴리날레, 네 번째 구역은 에스퀼리노였다. 이렇게 해서 이전에는 세 부족이었던 로마는 네 부족을 포함하게 됐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네 지역에 사는 시민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처럼 다른 지역에 주소를 가져서는 안 된다. 다른 지역에 등록해도 안 된다. 군역이나 군사적 목적의 세금 납부, 모든 시민들이 국가에 내야 하는 봉사는 앞으로 세 부족이 아니라 네 부족 기준으로 이뤄진다.”
툴리우스는 각 구역에 부족장 같은 사령관을 임명했다. 그에게는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잘 숙지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렇게 명령했다.
“거리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거리에 영웅에게 바치는 사원을 건설해야 한다. 그곳에 영웅의 조각상을 세워야 한다.”
툴리우스는 해마다 영웅들에게 바치는 희생 제례 거행을 의무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법에 따라 각 가정은 영웅에게 꿀떡을 바쳐야 했다. 각 사원의 희생 제례를 거행하는 사람을 돕거나 희생 제례에 참가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노예가 봉사하는 게 영웅에게는 더 기쁜 일로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지금도 이런 행사를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매년 사투르날리아 며칠 뒤에 거행하고 있다. ‘거리’라는 뜻인 콤피티에서 이름을 따 이 행사를 콤피탈리아라고 부른다. 로마인은 지금도 이 희생 제례와 관련한 옛 전통을 지킨다. 그들은 노예에게 일을 맡겨 영웅들을 달랜다. 행사 기간 동안에는 노예라는 표시를 제거한다.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게 좀 더 순종하게 하고,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생각을 덜 하게 만들려는 취지에서다.
파비우스에 따르면 툴리우스는 나라를 전체적으로 26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는 이 지역들을 부족이라고 불렀다. 원래의 네 부족과 합쳐 툴리우스 시절에는 모두 30개 부족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BC 2세기 학자 베니노이수에 따르면 툴리우스는 나라를 31개 구역으로 나눴다. 여기에 4개 부족을 더해 35개 부족으로 늘어났고, 이 상태가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이다. 카토는 나라를 나눈 수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툴리우스는 나라를 나눈 후 높은 언덕 여러 곳에 농부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만큼 넓은 피난처 여러 곳을 만들었다. 이곳을 그리스어로 ‘언덕’이라는 뜻의 ‘파기’라고 불렀다. 적이 기습공격을 하면 농부들은 모두 이곳으로 피신해 밤을 보냈다.
파기에는 감독관이 있었다. 그는 이곳으로 피신한 농부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농부들이 삶을 꾸려가는 토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시골사람들에게 무기를 들게 하거나, 세금을 거둬야 할 경우 감독관은 직접 사람들을 불러 모으거나 직접 돈을 징수했다.
농부의 수를 쉽게 계산하기 위해서 툴리우스는 각 감독관에게 지역을 지키는 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해마다 제단 앞에 모여 신에게 희생 제례를 치르게 했다.
툴리우스는 이 희생제례와 관련해서 파가날리아라는 신성한 축제를 열게 했다. 이 축제와 관련한 법도 만들었는데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툴리우스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조금씩 내서 희생제례의 비용으로 사용하게 했다. 남자가 내는 비용이 있었고, 여자나 아이들이 내는 비용은 또 따로 있었다. 희생제례를 거행하는 사람이 돈을 모으면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사람의 수를 쉽게 계산할 수 있었다.
루키우스 피소가 쓴 『실록』에 따르면 툴리우스는 로마의 인구를 알기 위해, 또 매년 출생하는 아기, 죽은 사람의 수는 물론 성인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 아기가 태어나거나 사람이 죽거나 청소년이 성인이 될 경우 각각 세금을 내게 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부과하는 세금은 유노 루키나 신전 금고에, 죽은 사람의 경우 베누스 신전 금고에, 성인이 된 청소년의 경우 유벤타스 신전 금고에 보관하도록 했다. 이런 세금을 통해 툴리우스는 매년 군사 활동에 참여할 나이가 된 시민의 수를 판별할 수 있었다.
툴리우스는 모든 로마인에게 이름을 등록하고 재산을 화폐 단위로 신고하게 했다. 또 재산을 실제 가치대로 신고하고, 아버지의 이름은 물론 아내와 아들의 이름과 나이도 신고하며, 어느 어느 지역에 사는지도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법을 만들었다. 만약 재산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하고, 범법자는 노예로 팔아버리게 했다. 이 법은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모든 로마인이 재산 평가액을 제출하자 툴리우스는 그 기록에 따라 로마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현명한 정책을 도입했다. 그 정책은 이러한 것이었다.
툴리우스는 먼저 재산이 10만 아세를 넘는 사람들을 첫 계급으로 골랐다. 이들 중에서 80개 켄투리온(백인대)을 구성했다. 이들에게는 전쟁 때에는 긴 방패, 창, 청동 투구, 갑옷, 각반, 칼을 직접 준비하게 했다. 80개 백인대는 둘로 나눴다. 하나는 전쟁이 터질 경우 당장 현장에 뛰어들 수 있는 백인대, 나머지 하나는 전쟁이 났을 때 로마에 남아 도시를 지키는 백인대였다. 이것이 제1계급이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선봉에 서는 계급이었다.
이어 10만~7만 5천 아세의 재산을 가진 사람을 제2계급으로 선택했다. 이들은 2계급에서 20개 백인대를 구성해 갑옷만 제외하고는 제1계급과 똑같은 장비를 갖추게 했다. 긴 방패 대신 둥근 방패를 마련하게 했다. 툴리우스는 이들도 45세 이상과 군 입대 나이가 된 사람으로 나누었다. 젊은 사람으로 10개 백인대를 구성해 전쟁에 나가 싸우게 했고, 나이가 많은 10개 백인대는 성벽을 지키게 했다. 이들은 전투에서 제1계급 바로 뒤에서 싸우게 했다.
세 번째 계급은 7만~5만 아세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구성됐다. 갖춰야 할 장비는 갑옷과 각반을 제외한 나머지였다. 제3계급도 20개 백인대로 구성됐다. 또 나이에 따라 청년 10개 백인대, 장년 10개 백인대로 나눴다. 이들은 제3열에서 전투를 벌였다.
재산이 5만~2만 5천 아세인 사람은 제4계급이 됐다. 역시 20개 백인대로 구성됐다. 2, 3계급처럼 나이에 따라 열 개 백인대 씩 두 개로 나눴다. 이들은 둥근 방패, 칼, 창만 갖췄다.
제5계급은 재산이 2만 5천~1만 2천 아세인 사람들로 이뤄졌다. 총 30개 백인대였다. 이들은 나이에 따라 15개 백인대 씩 두 개로 나눴다. 이들은 긴 창과 새총으로 무장했고, 전투 대열 외곽에 배치됐다.
툴리우스는 제1~5계급 뒤에 비무장 백인대 4개를 구성했다. 두 개는 갑옷을 만들고 고치는 사람과 목수는 물론 전쟁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했다. 나머지 두 개는 나팔 부는 사람, 뿔피리 부는 사람이나 기타 악기를 다루는 사람으로 구성했다. 음악 백인대는 제2계급에 배치됐고, 나이에 따라 청년 백인대와 장년 백인대를 따라다녔다. 나팔 부는 사람과 뿔피리 부는 사람은 제4계급에 소속되고록 했다.
모든 백인대 병사 중에서 가장 용감한 병사가 켄투리온(백인대장)으로 뽑혔다. 이들은 병사들이 지시에 잘 따르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이상은 툴리우스가 전체 보병을 구성한 내용이다. 보병은 중무장 및 경무장 병사로 이뤄져 있었다. 기병의 경우 제1계급 중에서 출생 성분이 탁월한 사람들을 골라 총 18개 백인대를 만들었다. 기병대는 제1계급의 80개 보병 백인대에 포함시켰다. 기병대도 가장 뛰어난 사람의 지휘를 받았다.
재산이 1만 2천 아세에 못 미치는 나머지 시민은 위에서 설명한 사람보다 수는 훨씬 많았다. 그는 이들을 하나의 백인대로 묶고는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모든 세금도 면제했다.
이에 따라 로마인이 계급이라고 부르는 분류는 모두 여섯 개였다. 백인대는 모두 139개였다. 제1계급 백인대는 보병, 기병 다 합쳐 98개였다. 제2계급은 공병을 포함해 22개, 제3계급은 20개, 제4계급은 음악가 부대를 포함해 22개, 제5계급은 30개였다. 나머지 모든 계급은 1개 백인대였다. 가장 가난한 시민들이었다.
이런 분류에 따라 툴리우스는 군대를 모으고 재산 평가액에 따라 세금을 거뒀다. 예를 들어 병사 1만 명을 모아야 할 경우 또는 2만 명을 모아야 할 경우 그는 병력을 193개 백인대에 골고루 나눴다. 각 백인대는 할당된 수만큼 병사를 준비했다.
전쟁에 나선 군인들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비용의 경우, 먼저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계산한 뒤 총액을 계급 등급에 따라 나눠 각 병사가 분담하게 했다. 그래서 재산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의 경우 인구는 적으면서 백인대 수는 많았기 때문에 더 자주 전쟁에 나서야 했다. 게다가 다른 계급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했다. 재산이 적은 계급의 경우 인구는 많고 백인대 수는 적기 때문에 전쟁에 자주 나서지 않았고 세금도 적게 냈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사람들은 모든 국역에서 면제됐다.
툴리우스는 이런 구분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결정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은 재산을 전쟁에서 잃을 수도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한다. 부자가 고난을 참아야 하는 것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따라서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목숨은 물론 돈으로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잃을 게 적은 사람은 목숨이나 돈의 부담을 적게 져야 한다. 그리고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전쟁에서 고통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시 로마인은 전쟁에 나서는 병사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다. 병사는 자기 돈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툴리우스는 하루 먹고 살 돈도 없는 사람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거나,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사람들이 마치 용병처럼 남의 비용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자에게 전쟁에 나서는 위험 부담과 전쟁 비용을 다 떠넘기는 바람에 부자의 불만을 산 것을 알게 된 툴리우스는 그들의 불쾌감을 덜고 반감을 해소할 방법을 고안했다. 그들에게 나라의 완벽한 통치자가 되는 특혜를 안겨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 관직에서 배제했다. 평민들이 이런 변화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처리했다. 그가 부자에게 준 특혜는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민회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옛 법에 따라 민회는 세 개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시민들은 행정관을 선출했고 법을 재가하고 폐지했다. 또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를 결정했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할 때 시민들은 쿠리아별로 투표를 실시했다. 재산이 가장 적은 시민이라도 최고의 부자와 똑같은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 부자의 수는 적고 평민의 수는 많았기 때문에 항상 평민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툴리우스는 투표의 우월권을 가난한 사람에게서 부자에게로 옮겼다. 행정관을 뽑아야 하거나, 법을 제정해야 하거나, 전쟁을 선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투표를 실시한다. 종전에는 쿠리아 별로 실시하던 것을 이때부터는 백인대 별로 실시했다.
툴리우스는 제1계급의 백인대를 불러 투표를 실시했다. 보병 기병 모두 합쳐 98개 백인대였다. 제1계급의 백인대만 갖고도 전체의 3분의 2나 됐다. 그래서 제1계급이 합의할 경우 결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제1계급 백인대가 분열될 경우 제2계급 22개 백인대를 불러 투표를 실시했다. 이어 제3계급, 제4계급, 제5계급을 차례대로 불렀다. 이렇게 해서 97개 백인대가 결론을 낼 때까지 투표를 진행했다.
만약 제5계급까지 투표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가난한 시민들로 구성된 마지막 1개 백인대를 불러 투표하게 했다. 그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정해졌다. 하지만 마지막 백인대까지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개 제1계급이 투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가끔 제4계급까지 가는 일이 있었다.
“결론이 날 때까지 모든 사람에게 견해를 물어볼 겁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정부 일에 똑같은 몫을 갖고 참여하게 될 겁니다.”
부자에게 특혜를 주는 정치 제도를 만든 툴리우스는 이런 말로 평민을 속였다. 하지만 백인대 하나당 투표권 하나만 가지며, 제1계급부터 가장 먼저 투표한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리지 않았다. 또 인구가 엄청나게 많은 평민에게는 단 한 표만 주어진다는 사실도 속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수가 훨씬 많은 가난한 사람은 공적 업무에 전혀 관여하지 못하게 배제시켰다.
이런 제도가 도입됨으로써 끊임없이 전쟁에 참여하고 많은 세금을 내는 부담을 지게 된 부자의 분노도 마침내 수그러들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됐고, 똑같은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 사람들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도 만족했다. 그들은 정부 일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지만, 전쟁에 나갈 필요가 없었고 전쟁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아주 조용하게 권력의 약화를 받아들였다. 로마로서는 국가 일에 가장 큰 신경을 쓰는 사람이 위험 부담도 가장 많이 지게 되는 이점을 갖게 됐다.
로마는 오랫동안 이런 형태의 정부를 유지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많이 바뀌어 더 민주적인 형태로 변했다. 긴급한 필요성 때문에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이들은 백인대 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로마인을 구분하는 과거의 관습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변화를 일궈냈다.
툴리우스는 인구조사 문제를 해결한 뒤 모든 시민에게 무장해서 도시 앞의 가장 큰 들판(마르스 평원)에 모이라고 지시했다. 그는 기병과 중무장 보병, 경무장 보병을 백인대 별로 모이게 한 뒤 소와 양, 수퇘지를 잡았다. 희생제물을 병사 주변으로 세 번 돌게 한 다음 마르스 신에게 바쳤다.
로마인은 오늘날에도 신성한 행정관이 인구조사를 실시한 후에는 똑같은 방식으로 속죄 희생 제례를 거행한다. 그들은 이 속죄 의식을 루스트룸이라고 부른다.
재산 평가액을 제출한 로마인의 수는 8만 4천700명이었다. 툴리우스는 시민 수를 늘리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전의 여러 왕이 간과한 방법을 만들어냈다. 이전의 왕들은 출생 지역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외국인을 받아들여 로마시민권을 줌으로써 인구를 늘렸다.
툴리우스는 해방 노예도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게 했다. 해방 노예에게도 다른 자유 시민처럼 재산 평가액을 신고하게 한 뒤 4개 부족에 편입시켰다. 다른 평민이 갖고 있는 자유시민권의 특혜를 누릴 수 있게 했다. 귀족은 이런 조치에 분개했다. 그래서 툴리우스는 민회를 소집했다.
“해방 노예에게 시민권을 주는 걸 싫어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군요. 노예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상황 때문에 자유민과 달라진 것입니다. 명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그의 특성이 아니라 우연한 행운의 반전만으로 평가하지 마십시오. 행운이라는 건 얼마나 불안정한 것입니까? 얼마나 변화에 민감한 것입니까? 아무리 운 좋은 사람이라도 행운이 얼마나 오래갈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야만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얼마나 많은 나라가 자유국가에서 노예국가로, 노예국가에서 자유국가로 바뀌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노예에게 자유를 허용하고도 시민 권리를 준다고 화를 낸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만약 노예가 나쁜 인간이라면 자유를 주지 마십시오. 하지만 착한 사람이라면 외국인이라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 멍청하고 웃기는 일을 하는 겁니다. 모든 외국인에게 조건에 관계없이 시민권을 허용하면서 해방노예에게는 까다롭게 군다면 우리는 함께 살아온 노예를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민족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장 우리 발밑에 어떤 운명이 있는지, 매일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가장 평범한 사람에게도 분명한 게 무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봅시다. 주인은 가장 훌륭한 인간적 축복을 무차별적으로 주는 걸 조심하면서 노예를 성급하게 해방시키지 않으려 신경을 쓸 것입니다. 노예는 자유를 얻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로마의 시민이 될 뿐만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더 열심히 주인을 모시게 될 겁니다.
이런 정책을 선택하면 얻을 장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패권을 노리는 국가, 스스로를 가장 가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국가에게 많은 인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무장 병력으로 모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똑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용병을 고용하느라 재산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전의 여러 왕은 모든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법을 받아들인다면 해방 노예에게서 태어난 많은 청년이 생겨날 것이고 로마는 절대 병력이 모자라지 않게 될 겁니다. 어떤 나라와 전쟁을 하더라도 항상 군대에는 병사가 넘쳐날 겁니다.
국가에는 이런 장점이 주어지는 반면 부자는 해방 노예 출신 자유 시민에게 정부 일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얻을 겁니다. 민회에서, 또는 다른 투표에서, 아니면 다른 여러 시민의 활동에서 부자는 도움이 필요할 때 해방 노예 출신 자유시민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될 겁니다. 후손에게 해방 노예의 후손을 부자의 클리엔테스로 물려줄 수도 있습니다.”
툴리우스의 설명을 들은 귀족은 법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법은 오늘날까지 로마인에게 가장 신성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