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제도와 에트루리아 전쟁
이제 노예와 관련한 로마의 관습을 설명하도록 하자. 그래야 노예였던 사람을 로마시민으로 만드는 법을 만든 툴리우스는 물론 그런 법을 인정한 로마인에게 고귀한 전통을 버렸다고 비난을 퍼부을 수 없을 것이다.
로마인은 노예를 정당한 수단으로 획득했다. 그들은 경매를 통해 나라로부터 노예를 샀다. 장군이 병사들에게 포로를 다른 전리품과 함께 나눠주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노예를 인수받기도 했다.
그래서 전쟁에서 나라와 자유를 잃은 사람이 노예로 전락했지만 주인에게 충실할 경우 주인이 그들에게 축복을 베풀어주는 것을 툴리우스는 물론 다른 로마인도 불명예스럽거나 공공이익을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예 대부분은 칭찬할 만한 행동 덕분에 자유라는 선물을 얻었다. 주인이 그들에게 주는 가장 훌륭한 해방이었다. 일부는 합법적이거나 정직한 노동으로 모은 돈으로 자유를 사기도 했다.
오늘날(편집자 주:디오니시오스가 살던 BC 1세기)에는 사정이 다르다. 상황은 너무 혼란스러워져서 로마의 고귀한 전통은 천박해지고 더럽혀졌다. 그래서 도둑질이나 주거침입, 매춘, 이밖에 다른 저열한 수단으로 돈을 모은 사람이 자유를 얻어 바로 로마인이 되기도 한다.
독살 사건에서 주인을 도왔거나 공모한 사람은 보상으로 자유를 선물 받는다. 일부는 국가가 매달 나누어주는 옥수수나 권력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뿌리는 보조금을 모아 자유를 사기도 한다. 일부는 주인의 경솔이나 인기에 대한 욕구 덕분에 자유를 얻는다.
어떤 사람은 죽은 뒤 모든 노예를 풀어주기도 한다. 사람들에게서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듣거나, 노예 신분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자유를 상징하는 모자를 쓰고 그의 상여를 따라와 추모를 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장례 행렬에 참가한 사람 중 일부는 1천 번 죽어도 마땅한 범죄를 저질렀다가 막 감옥에서 나온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 사람은 이를 씻어낼 수 없는 오점으로 생각하면서 이런 풍습을 한탄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도시가 이런 사람들에게도 시민권을 주는 걸 평범한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조상이 현명하게 만들었지만 나중에 부끄럽게 악용되는 관습을 비난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익에 큰 손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런 법이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고쳐야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툴리우스는 평민에게 자신이 친구라는 걸 보여주었다. 원로원의 권위와 귀족의 권리를 줄이는 것처럼 보이는 대책뿐만 아니라 왕권을 제한하는 것 같은 조치를 취한 덕분이었다.
이전 왕들은 사적이든 공적이든 모든 사건을 왕에게 가져오게 해서 왕이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결론을 내렸다. 툴리우스는 공적 사건과 사적 사건을 구분했다. 그리고 공익에 영향을 주는 사건만 취급했고, 사적인 사건의 경우 민간인을 재판관으로 임명한 뒤 그들에게 지켜야 할 법을 기준으로 제시해 판결하게 했다.
툴리우스는 최고의 방법으로 로마의 업무를 처리했다.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을 통해 후손에게 그의 기억이 영원히 남기를 바랐다. 그는 역대 왕이나 정치인이 쌓은 기념물을 보면서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바빌론 탑을 쌓은 아시리아 여인, 멤피스에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의 파라오, 부와 아름다운 여인을 자랑하기 위해 수많은 왕자가 세운 각종 기념물 중에서 어느 것도 시기하지 않았다.
툴리우스는 이 모든 것을 사소하면서 일시적이고, 진지한 관심을 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눈을 속이는 것이며, 인생을 살아가거나 공적 일을 하는 데 진정한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봤다. 이런 기념물은 단순히 지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여겼다.
툴리우스가 칭찬하고 경쟁할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은 마음의 작품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랜 동안 그 이득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헬렌의 아들 암픽티온의 계획이었다.
암픽티온은 그리스를 아주 나약해서 야만인에게 쉽게 파멸당할 수 있는 나라라고 봤다. 그는 모든 나라를 모아 총회를 개최했다. 총회 이름을 암픽티온 위원회라고 불렀다. 그는 모든 도시가 제정한 법과는 달리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법을 만들었다. 이를 암픽티온 법이라고 했다. 이 법 덕분에 모든 그리스 도시는 서로 친구처럼 지냈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의무를 수행했다. 덕분에 그리스는 야만인에게 아주 골치 아프고 두려운 존재로 변했다.
암픽티온의 사례를 이오니아인이 따라했다. 이들은 유럽을 떠나 카리아의 해변에 정착했다. 또 도리아인도 따라했다. 이들은 같은 지역에 도시를 세웠고 공동비용으로 신전을 건립했다. 이오니아인은 에페수스에 디아나 신전을, 도리아인은 트리포피움에 아폴로 신전을 세웠다.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아내, 아이를 모은 뒤 함께 희생제례를 열고 축제를 거행했다. 경연대회와 승마, 체조, 음악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그리고 함께 신에게 공물을 바쳤다.
서로에게 차이가 생기면 중재자가 앉아 논쟁에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야만족과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이나 상호 견해일치를 유지하는 방법을 두고 서로 협의했다.
이러한 사례는 툴리우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라틴족에 속하는 모든 도시를 함께 모아 통합할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내부의 갈등이나 서로 간의 전쟁 때문에 다른 야만족에게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하려고 했다.
툴리우스는 모든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의 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논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모든 도시의 인물이 집결했다. 그는 로마 원로원과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모아놓고 서로에게 화합을 촉구하는 긴 연설을 했다.
“많은 국가가 서로 뜻을 모으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친척끼리 싸우는 것은 얼마나 보기 흉한 일입니까? 화합은 약한 나라에는 힘의 원천입니다. 상호 살육은 가장 강력한 나라의 힘도 약하게 만듭니다.
라틴족은 모든 이웃을 다스려야 합니다. 야만인에게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로마는 이런 모든 라틴족의 지도자 역을 맡아야 합니다. 로마의 면적이 넓어서라거나 업적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신의 섭리로부터 호의를 더 많이 받았고 결과적으로 위대한 지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공동비용으로 로마에 피난처 역할을 할 신전을 지읍시다. 모든 도시는 해마다 이곳에서 희생제물을 개인적으로 또는 다함께 바쳐야 합니다. 약속한 날에는 축제를 열어야 합니다. 두 도시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기면 다른 도시에 결론을 내려달라고 부탁하면서 희생 제물을 바치고 논란을 접어야 합니다.”
공동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많은 이익을 설명한 툴리우스는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동의하라고 설득했다. 나중에는 모든 도시로부터 기부 받은 돈으로 로마에서 가장 넓은 아벤티노 언덕에 디아나 신전을 지었다.
툴리우스는 여러 도시의 상호 권리를 규정한 법을 만들었고 축제와 총회 개최와 관련한 모든 것을 규정했다. 시간이 흘러도 법이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위원회 규정과 여기에 참가한 도시들의 이름을 새긴 청동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은 디아나 신전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 여기에 사용한 문자는 그리스어였다.
이것만으로도 로마의 설립자는 야만인이 아니었다는 가볍지 않은 증거가 된다. 만약 그들이 야만인이었다면 그리스 문자를 몰랐을 것이다. 이것은 툴리우스에 대해 기록된 가장 중요하고 눈에 띄는 행정적 조치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딱 한나라, 에트루리아를 상대로 이뤄졌다.
타르퀴니우스가 죽은 뒤 그에게 주권을 넘겨줬던 에트루리아 도시들은 조약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했다. 툴리우스는 출신이 미천한 자라면서 그에게 복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로마에서 귀족과 왕 사이에 벌어진 불화를 이용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이이가 반란의 주도세력이었다. 툴리우스가 사절을 보냈을 때 베이이는 더 이상 주권을 넘겨주거나 동맹과 관련한 조약을 유지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카에레와 타르퀴니가 그 뒤를 따랐다. 이어 모든 에트루리아 도시가 무기를 들었다.
전쟁은 이후 2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동안 양측은 상대방의 영토로 무수히 침입했다. 연이어 야전을 벌이기도 했다. 툴리우스는 각 도시 또는 에트루리아의 모든 도시를 상대로 한 모든 전투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세 번의 가장 놀라운 승리를 거둔 뒤 통치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이구움 밑을 지나가게 했다.
스무 번째 해에 사람과 돈이라는 측면에서 전쟁에 지친 열두 개 도시가 다시 만나 이전과 똑같은 조건으로 주권을 로마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각 도시로부터 사절로 선택된 사람들은 복종의 표시를 들고 로마에 도착했다.
“왕이시여! 극단적 조치를 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조약을 어기겠다는 당신들의 어리석음과 조약의 후원자인 신에 대한 불경 때문에 당신들은 많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당신들은 잘못을 인정했기 때문에 로마인의 자비나 관대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툴리우스는 이렇게 해서 에트루리아와의 전쟁을 끝냈다. 대부분 도시에는 어떤 조건도 달지 않았고, 과거의 피해에 대해 어떤 원한도 품지 않았다. 그는 에트루리아에 이전과 똑같은 정부 형태를 유지하도록 허락했고, 그들이 타르퀴니우스와 맺은 조약을 충실히 지키는 한 재산도 계속 유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반란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도 로마와 전쟁을 하도록 선동한 카에레, 타르퀴니, 베이이 3개 도시에는 땅을 몰수하는 처벌을 내렸다. 그는 이 땅을 나중에 로마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평화로울 때나 전쟁일 때에 쌓은 이런 업적 이외에 툴리우스는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에게 바치는 신전 2개를 건설했다. 포르투나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늘 호의를 베풀어준 신이었다. 하나는 포룸 보아리움에, 다른 하나는 테베레 강 주변에 건설했다. 그는 여신에게 포르투나 비릴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이 여신은 이렇게 불리고 있다.
툴리우스는 자연사할 나이가 가까웠을 때 사위인 타르퀴니우스와 딸이 일으킨 반역 때문에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