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최후
브루투스와 발레리우스는 3가지 조치를 시행했다. 로마인 사이에 화합을 불러오고 적의 힘을 약화시키는 아주 뛰어나고 우수한 조치들이었다.
먼저 평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골라 귀족으로 승격시켰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 수를 300명으로 늘렸다.
이어 모든 시민의 이익을 위해 타르퀴니우스의 재산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시민들에게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타르퀴니우스의 토지는 땅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로마와 테베레 강 사이에 놓인 평원만 분배에서 제외했다. 로마인은 이 땅을 마르 스신에게 봉헌했다. 말을 키우는 목초지와 젊은이들이 무술 연습을 할 수 있는 훈련장으로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평원은 마르스신에게 봉헌되기 전에 타르퀴니우스가 개인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착복한 땅이었다. 두 집정관은 이곳에서 자란 옥수수와 관련해서도 조치를 내렸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독두 집정관은 투표를 실시해 곡식을 테베레 강에 버리기로 결정했다. 독재자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가게 했지만 평원에서 자라는 곡물만은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이 곡식은 저주받았기 때문에 집에 가져가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 일과 관련해서 테베레 강에는 아주 눈에 띄는 기념물이 남아 있다. 아이스쿨라피우스에게 봉헌한 꽤 큰 섬이다. 섬은 강의 한가운데 놓여 있어 사방에서 강물에 시달린다. 이 섬은 원래 버린 옥수수 짚단 때문에 처음 생겼다. 나중에 강을 따라 떠내려 온 토사가 거기에 쌓여 섬을 이뤘다.
두 집정관은 타르퀴니우스를 따라 달아난 로마인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로마로 돌아올 경우 처벌하지 않고 사면하겠다고 선언했다. 단 시일은 20일로 제한한다. 만일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영구 추방령을 선고하고 재산은 몰수한다.”
두 집정관의 선언은 독재자 밑에서 저질렀던 범죄 때문에 재판에 설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사람들이 독재자보다는 로마 편에 서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두 집정관은 여러 조치를 실시한 뒤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은 한동안 성벽 아래 평원에 군대를 모아 다양한 군기와 지도자 아래 병사들을 배치하고 훈련을 실시했다. 타르퀴니우스가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으며 타르퀴니이, 베이이가 노골적으로 그의 복권을 돕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두 나라만 해도 상당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도시에서도 자원군이 그들을 도우러 모였습니다. 일부는 그들의 친구들이 보낸 사람들이며 일부는 용병입니다. 적군은 이미 평원에 나섰다고 합니다. 곧 로마로 쳐들어올 겁니다.”
두 집정관은 적이 테베레 강을 건너기 전에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이들은 에트루리아 근처 나에비아 목초지에 진영을 차렸다. 이 목초지 근처에는 영웅 호라티우스에게 바친 작은 숲이 있었다.
양쪽 군대의 수는 비슷했다. 이들은 비슷한 열정을 갖고 전투에 나섰다. 첫 전투는 아주 간단한 기병끼리의 대결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힘을 시험해보려는 듯 싸움에 나섰다. 어느 누구도 이기거나 패하지 않았다. 양쪽 기병은 진지로 돌아갔다.
이어 양쪽의 중무장 보병과 기병이 다시 격돌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전투 대형을 꾸렸다. 중앙에 최정예 보병을, 양쪽 측면에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의 우익은 새 집정관 발레리우스가 맡았다. 그는 베이이에 맞서 싸웠다. 우익은 브루투스가 담당했다. 그쪽에는 타르퀴니우스 군대가 있었다. 타그퀴니우스의 세 아들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두 군대가 격돌을 준비하고 있을 때 타르퀴니우스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아룬스가 앞으로 달려 나왔다. 세 아들 중에서 육체적 힘이나 정신적 총명함에서 가장 뛰어난 사내였다. 그는 말을 타고 로마군 근처까지 달려갔다. 누구나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브루투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브루투스, 짐승보다 못한 놈! 아들의 피를 손에 묻힌 놈! 이 겁쟁이야, 이리 나와서 나와 일대일 맞대결을 벌이자.”
브루투스는 그의 욕설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운명에 의해 이미 결정돼 있던 죽음을 향해 돌진했다.
브루투스와 아룬스는 겪을지도 모르는 고통보다는 상대에게 주고 싶은 고통만 생각하고는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둘은 창으로 서로 피할 수 없는 타격을 주고받았다. 두 창은 방패는 물론 갑옷을 뚫고 들어갔다. 하나는 상대의 옆구리를, 하나는 상대의 엉덩이를 꿰뚫었다. 말 두 마리는 가슴과 가슴끼리 충돌한 뒤 앞다리를 들어 공격했다.
이 때문에 브루투스와 아룬스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상처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양측 병사들은 사령관의 낙마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이때부터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다. 결과는 양측 모두 비슷했다.
로마군 우익에 서서 발레리우스의 지휘를 받던 병사들은 베이이군에 압승을 거뒀다. 그들은 적의 진지까지 쳐들어갔다. 평원은 적군 시체로 뒤덮였다.
그 사이 적군 우측에 서서 섹스투스와 티투스의 지휘를 받던 에트루리아군은 로마 좌익을 패주시켜 진지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진지를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오히려 많은 상처만 입고 말았다. 진지에 있던 로마군이 굳건하게 진지를 지키며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기병 부대는 고참병들로서 ‘트리아리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전쟁 경험이 풍부했고 항상 맨 나중 결정적인 시기에 모두가 희망을 잃고 있을 때 전투에 참가했다.
이제 해는 지고 있었다. 양 군대는 진지로 돌아갔다. 어느 쪽도 승리로 들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잃은 병사의 수를 세며 슬퍼했다. 다음날 다시 전투를 벌이는 게 불가피해 보였다. 그런데 남은 병사로는 싸움을 이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대부분 다쳤기 때문이었다.
로마군은 브루투스의 죽음으로 큰 낙담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진지를 떠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많은 병사 사이에 퍼졌다.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제1시가 다가왔다. 양측 군대가 진지를 차린 숲속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숲을 헌정한 호라티우스의 목소리 같다고 다들 생각했다. 아니면 파우누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마인은 공포를 이 신으로 생각했다.
로마군의 눈에 비친 정령이 누구였든지 간에, 그들의 귀에 들린 목소리가 어떤 정령이었든지 간에 로마군은 파우누스라고 생각했다. 이 목소리는 로마군을 격려했다.
“로마군이여! 용기를 내어라. 너희들은 승리했다. 적의 사망자는 로마군 사망자보다 1명이 더 많다.”
이 목소리에 힘을 얻은 발레리우스는 한밤중에 적의 진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많은 적을 학살한 뒤 나머지를 진지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진지를 점령했다.
다음날 로마군은 적의 시체를 치우고 로마군 시체를 매장한 뒤 로마로 돌아갔다. 가장 용감한 기사가 브루투스의 시체를 말에 태워 눈물로 이송했다. 그의 뛰어난 용기를 상징하는 뜻에서 왕관으로 시체를 장식했다.
원로원은 브루투스를 기리기 위해 개선식을 열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로마인은 와인이 가득 찬 사발과 음식이 놓인 식탁을 차려놓고 로마군을 맞았다. 발레리우스는 이전의 왕들이 하던 관습에 따라 개선식을 거행했다. 전리품을 나르는 행진과 희생제례를 거행했고, 전리품을 신에게 바쳤다. 발레리우스는 그 행사를 아주 신성하게 치른 뒤 로마인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다음날 발레리우스는 검은 옷을 입었다. 브루투스의 시신을 포로 로마노에 설치한 장엄한 관에 넣었다. 시민들에게 모이라고 한 뒤 연단으로 나아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발레리우스가 로마에서 추도사 낭독 관습을 처음 도입한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왕들이 하던 대로 따라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옛 시인과 유명한 역사학자들에게서 내려온 보편적인 역사를 살펴보면 장례식에서 저명한 인사의 미덕을 칭송하는 것은 로마인의 고대 관습이었다.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왕정을 전복시키고 첫 집정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뒤늦게 높은 자리에 올랐고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명성을 얻었지만 로마인은 그를 가장 훌륭한 로마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브루투스는 아들이나 딸 등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 많은 역사학자가 이를 정확히 기술한다. 쉽게 배척할 수 없는 증거도 있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나중에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니우스, 브루투스라는 성을 쓰는 사람은 모두 평민이다. 그리고 법에 따라 평민에게만 주어지는 행정관직, 즉 조영관이나 호민관에만 출마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평민 중 누구도 집정관 자리에 출마할 자격은 없었다.
브루투스가 죽은 뒤 발레리우스는 시민들로부터 의심을 사게 됐다. 왕이 되려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의심한 첫 이유는 혼자서 집정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브루투스가 콜라티누스를 쫓아낸 뒤 그랬던 것처럼 동료 집정관을 뽑아야 하는데, 안 그러는 이유가 뭐지?”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 집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로마인이 벨리아라고 부르는 언덕 꼭대기였다.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언덕 정상을 고른 이유가 뭘까?”
발레리우스는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당장 선거일을 정해 동료인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지명했다. 그런데 그는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며칠 뒤 죽고 말았다. 발레리우스는 대신 마르쿠스 호라티우스를 지명했다. 그는 또 벨리아 언덕 꼭대기에서 가장자리로 집을 옮겼다.
“로마인이여! 만약 제가 어떤 잘못이라도 저지른다면 언덕에서 저의 집으로 돌을 던지도록 하시오.”
발레리우스는 평민에게 명확한 자유의 약속을 주기 위해 작대기에서 도끼를 떼어냈다. 이후 집정관직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선례를 세운 것이다. 이 선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집정관이 도시 밖으로 나가면 도끼를 들고 간다. 하지만 도시 내에서는 작대기만 들고 다녀야 한다. 발레리우스는 또 평민을 안심시키는 우호적인 법률도 도입했다.
‘시민에게서 행정관 자리를 받지 않은 사람은 로마를 다스리는 행정관이 될 수 없다.’
발레리우스는 이 법을 어긴 사람은 사형을 시키게 했다. 그리고 법 위반자를 죽인 사람에게는 면책권을 주기로 했다. 다른 법에서는 이렇게 규정했다.
‘행정관이 로마인을 사형시키거나 채찍질하거나 벌금형에 처하려고 하면, 그 로마인은 시민들 앞에 행정관을 출두시켜 재판을 받을 수 있다. 시민들이 투표로 유죄를 확정할 때까지는 그는 행정관에게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런 조치 덕분에 발레리우스는 평민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됐다. 평민은 그에게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평민의 친구’라는 뜻이었다.
이듬해 발레리우스는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동료 집정관은 루크레티우스였다. 인구 조사와 전쟁세 부과 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업적은 없었다. 전쟁세는 툴리우스 왕이 도입했지만 타르퀴니우스 집권 기간 동안 중단된 세금이었다. 두 집정관은 이를 새롭게 부활시킨 것이었다.
인고조사 결과 성년에 이른 로마 시민의 수는 13만 명으로 나타났다. 인구조사 이후 로마군이 시그누리움에 파견됐다. 라틴 도시들과 헤르니키 도시들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초소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로마는 이들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