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푸블리콜라(3)

사비니와의 전쟁

by leo



에트루리아군이 철수하자 로마 원로원은 포르세나에게 상아 의자, 홀, 황금왕관, 개선 의상을 만들어 보내기로 결정했다. 당시 여러 나라 왕이 사용하는 상징물이었다.


원로원은 또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했고 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무키우스에게는 테베레 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하루에 밭을 갈 수 있는 만큼 공공용지를 수여하기로 했다. 다리 앞에서 싸웠던 호라티우스와 똑같은 포상이었다. 지금도 이 지역은 무키우스 목초지라고 불린다.


원로원은 코엘리아를 기리기 위해 청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그를 따라 달아난 소녀들의 아버지들이 돈을 모아 포로 로마노의 사크라 비아에 동상을 건립했다. 이 동상은 지금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인근 집에 불이 났을 때 부서졌다고 전해진다.


이 해에는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신전이 완공됐다. 봉헌식은 집정관 마르쿠스 호라티우스가 거행했다. 발레리우스는 시골 지역을 지키려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서 나간 상태였다. 농부들이 산속 성채에서 나와 다시 농촌 고향으로 돌아가자 마밀리우스가 도적떼를 보내 농부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공화정 설립 후 네 번째 해의 집정관은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와 티투스 헤르미니우스였다. 이들은 전쟁 없이 임기를 보냈다. 이때 포르세나 왕의 아들인 아룬스가 아리키아를 포위해 공격하다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


로마와 평화를 이룬 아룬스는 아버지로부터 군대 절반의 지휘권을 얻어 아리카아로 쳐들어갔다. 그곳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가 도시를 함락할 무렵 안티움, 투스쿨룸, 쿠마이에서 지원군이 몰려왔다. 그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싸워 적을 도망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리스토데무스의 지휘를 받은 쿠마이군에게 대패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 에트루리아군은 달아났다. 상당수는 쫓아온 쿠마이 병사들에게 학살당했다. 나머지는 무기를 버리고 그다지 멀지 않은 로마 영토로 달아났다. 부상 때문에 멀리 도망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그들을 마차나 수레 또는 가축에 태워 평원에서 로마로 데려갔다. 각 병사를 시민들의 집에 보내 건강을 찾을 때까지 치료해주고 돌봐주었다. 최고의 동정심으로 베풀 수 있는 모든 친절을 다 보여주었다.


“여러분은 정말 친절하시군요.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서 로마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많은 에트루리아 병사가 로마에 남기로 했다. 원로원은 이들에게 집을 지을 땅을 주었다.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에 약 700m 정도 되는 땅이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로마인은 포로 로마노에서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이르는 길을 ‘에트루리아 거주지’라는 뜻의 ‘비스쿠스 투스쿠스’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호의 덕분에 로마인은 포르세나로부터 적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그들에게 최고의 만족을 주는 선물이었다. 그가 준 것은 전쟁을 끝낼 때 빼앗아갔던 테베레 강 너머 영토였다. 로마인은 엄청난 비용을 투입해 신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희생제례를 거행했다. 그리고 이렇게 맹세했다.


“로마가 일곱 지역을 계속 통치하는 한 신들에게 해마다 희생제례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왕정을 폐지하고 다섯 번째 해는 BC 503년이었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의 동생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와 투베르투스라는 별명을 가진 푸블리우스 포스투미우스가 집정관이 됐다. 이때 다른 전쟁이 로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이웃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도적질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매우 중요한 전쟁으로 발전했다. 휴식 없이 1년을 끈 뒤 전쟁은 명예롭게 평화로 마무리됐다.


사비니 족 중 일부는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전쟁의 원인이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에게 당한 패배 때문에 약해졌어. 옛 영광을 쉽게 회복하지 못할 거야.”


그들은 도적떼를 꾸려 산속의 성채에서 들판으로 내려온 로마 농부들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부가 죽거나 다쳤다. 로마는 전쟁을 벌이기 전에 사절을 보내 배상을 요구했다.


“다시는 농부들에게 불법 행위를 하지 마시오.”


사비니 족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로마는 전쟁을 선언했다. 첫 원정은 두 집정관 중 한 명이 담당했다. 그는 기병대와 경무장 보병 중에서 정예병을 이끌고 로마 농촌지역을 휩쓸고 있던 도적떼를 덮쳤다. 약탈을 하고 있던 많은 사비니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약탈을 하느라 질서도 없었고 공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비니 족은 이번에는 대군을 파견했다. 전쟁에 경험이 많은 장군이 그들을 이끌었다. 로마는 전군을 이끌고 다시 전쟁에 나섰다. 이번에는 두 집정관이 모두 출정했다.


포스투미우스는 로마 근처 고지에 진영을 차렸다. 타르퀴니우스가 갑자기 로마를 공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우스는 적군에게서 멀지 않은 아니오 강둑에 천막을 쳤다. 이 강은 티부르를 지나간 뒤 사비니족과 로마 모두에게 속하는 평원을 흘러갔다. 그래서 두 나라를 가르는 국경 역할을 했다. 여기서부터 아니오 강은 경치도 좋고 물맛도 좋았다. 그리고 테베레 강과 합류했다.


아니오 강 반대편에는 사비니군 진지가 설치됐다. 강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주 낮은 언덕이었다. 양측 군대는 처음에는 서로를 아주 조심스럽게 살폈다. 강을 건너거나 전투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논리나 신중한 생각에 기대기보다는 분노와 경쟁 심리에 사로잡혀 바로 전투에 들어갔다.


양측 군대는 식수를 구하거나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강으로 내려가곤 했다. 그곳은 매우 낮았다. 겨울에는 비가 적어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측 군대는 무릎까지만 적시면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전투가 벌어졌다. 나중에는 다른 병사들이 동료를 도우러 진지에서 달려 나왔다. 마지막에는 모든 병사가 밀리는 동료를 구하러 진지에서 뛰어나갔다. 때로는 로마군이 사비니군을 강에서 몰아냈고, 나중에는 사비니군이 로마군을 압박했다.


많은 병사가 죽고 다친 뒤 경쟁 심리는 더 불타올랐다. 양측 장군은 강을 건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발레리우스는 기선을 제압했다. 병사들에게 강을 건너게 한 뒤 사비니군이 무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공격을 퍼부었다. 사비니군도 전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적에 대한 경멸감으로 불타올랐다. 이들은 로마의 두 집정관이나 로마의 전군과 싸우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발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우익은 적을 공격해 거점을 확보했다. 반면 좌익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강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발레리우스는 우익을 지휘하는 도중 전황을 파악한 뒤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했다. 그는 보병을 이끌고 정상 속도로 행군하는 동안 지난해 집정관이었던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를 기병대와 함께 특공대로 먼저 보냈다.


라르키우스는 기병대를 이용해 전속력으로 전진해 쉽게 강을 건넜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그는 적의 우익을 지난 뒤 사비니군 기병대를 공격했다. 두 기병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중에는 주먹으로 싸우기도 했다.


그 사이 포스투미우스는 보병을 이끌고 전투에 가담해 적을 공격했다. 많은 사비니 병사를 죽이고 나머지는 혼란에 빠뜨렸다. 만약 밤이 되지 않았다면 사비니군은 기병에서 우세를 보인 로마군에 포위돼 전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전투에서 달아나던 사비니 병사들을 구했다. 그들은 무기도 버린 채 고향으로 도망갔다.


두 집정관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사비니군 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진지를 지키던 병사들은 동료 병사들의 패주를 보고 함께 달아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많은 전리품을 챙겨 수레에 실은 뒤 로마로 돌아갔다.


이 전쟁은 로마가 에트루리아에게 당한 패배에서 회복한 뒤 거둔 첫 승리였다. 로마는 이전의 정신을 회복했고, 이웃 도시들을 상대로 다시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로마 원로원은 두 집정관에게 공동 개선식을 허용했다. 그들로서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발레리우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가장 좋은 곳에 집을 지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비용은 국고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이 집에는 미닫이문이 설치됐다. 개인 건물과 공공건물을 통틀어 로마에서 문이 밖으로 열리는 것은 이곳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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