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극단적인 견해는 서로 갈라졌다. 일부 원로원 의원은 이렇게 주장했다.
“재산이 전혀 없는 사람의 빚을 탕감해줍시다. 채무자의 재산은 압수하되 인신 구속은 하지 맙시다.”
다른 의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국고를 풀어 파산자의 채무를 해결해줘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가난한 빚쟁이는 정부의 호의로 살아나는 것이고 채권자는 어떤 손해도 입지 않게 됩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의원들도 있었다.
“빚 때문에 이미 억류돼 자유를 빼앗긴 사람의 몸값을 내줍시다. 채무자 대신 포로를 채권자에게 넘겨주는 방식이면 좋을 겁니다.”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은 이런 견해였다.
“당분간 법령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전쟁을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끝낸 뒤에 집정관이 원로원을 소집해 투표를 실시하는 겁니다. 대신 그동안 어떤 계약이나 판결에 의해서도 돈을 빼앗아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소송은 연기하고요. 행정관은 전쟁에 관련된 일 이외에는 어느 것에도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은 결정은 평민에게 알려져 동요를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에서 소요가 언제라도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니었다. 일부 계층은 원로원의 결정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으며 충분한 지원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렇게 요구했다.
“원로원은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전쟁을 앞두고 평민을 동반자로 삼고 싶다면 즉시 채무 탕감 혜택을 부여해야 합니다. 채무 탕감을 나중에 결정할 것처럼 꾸며서 평민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요구 조건을 내세울 때와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졌을 때 사람의 감정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로원은 평민이 새로운 혼란을 일으킬 수 없도록 더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그들은 당분간 집정관의 권력을 중지시키고 전쟁과 평화 시에는 물론 모든 국가적 사안에 있어 절대적 권력을 가지는 새로운 행정관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절대 권력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이나 행위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자리였다.
임기는 6개월로 제한하기로 했다. 그의 임기가 끝나면 집정관이 다시 통치권을 잡는다. 원로원이 독재자가 일으킨 전쟁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독재 직책을 만든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을 가진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가 만든 법이었다.
발레리우스는 재판 이전에는 누구도 처벌할 수 없는 법을 만들었다. 처벌을 받게 된 사람이 민회에 호소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리고 민회가 투표를 할 때까지 신체적 자유는 물론 재산을 계속 지킬 권리도 주었다. 이 규정을 어기는 사람은 불경죄로 사형당할 수도 있었다. 원로원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한 평민이 행정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바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민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야만 처벌받기 때문입니다. 이 법이 없어지면 평민은 행정관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법을 없애려고 할 경우 평민이 강력하게 반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원로원 독재자 권력을 가진 자리를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그의 권력은 어떤 법보다 우위에 있었다. 원로원은 평민을 속여 그들의 자유를 지켜온 법을 없애기로 했다. 평민을 속인 방법은 이러했다.
당시 집정관은 라르키우스와 코엘리우스였다. 둘은 사임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행정관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사임했다. 원로원은 이렇게 발표했다.
“모든 행정관이 사임했습니다. 국정에 공백이 생길 수 있으므로 행정관 한 명을 임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정이 안정될 때까지 6개월 동안으로 임기를 제한합니다. 대신 그에게는 절대적 권한을 부여합니다.”
평민은 원로원의 진짜 속셈을 눈치 채지 못하고 민회에서 이 제안을 승인했다. 법적 행정관보다 우월한 권력을 가진 행정관은 독재자였지만 평민은 원로원에 그런 자리를 맡을 사람을 선택할 권한을 부여하고 말았다.
원로원의 지도급 의원들은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들이 원하는 사람의 조건은 이러했다.
‘행동은 용감하고 전쟁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항상 사려 깊고 절제력이 강해야 한다. 권력이 막강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훌륭한 장군에 어울리는 자질을 가져야 한다. 확고한 신념을 갖고 통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특히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런 성격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원로원이 요구하는 자격을 모두 갖춘 사람은 집정관인 티투스 라르키우스였다. 코엘리우스는 행정 관리로서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추진력이 있거나 전쟁에서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을 통제하거나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원로원은 두 집정관 중 한 명에게서 합법적으로 부여받은 집정관 권리를 빼앗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둘의 권리를 모아 한 사람에게만 부여하는 게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또 이런 걱정도 하고 있었다.
“코엘리우스는 공직 박탈에 분노하거나, 원로원 때문에 불명예를 뒤집어썼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평민의 편으로 돌아서 정부를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의원들이 원로원에서 솔직하게 견해를 밝히기를 꺼리는 바람에 국정 공백사태는 한 동안 지속됐다. 마침내 집정관급 의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존경받는 의원이 이런 견해를 표명했다.
“원로원은 이미 법을 만들었고 민회는 투표로 이를 승인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한 명만 임명돼야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독재자와 똑같은 권력을 가진 이 자리에 누구를 앉히느냐 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를 임명하느냐가 두 번째입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두 집정관 중 한 명이 동료의 동의를 받거나, 아니면 추첨을 해서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걸로 생각되는 사람을 고르게 합시다. 이미 합법적 행정관이 두 명이나 있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서 왕정 시대에 나라를 다스릴 사람을 임명하던 인테르렉스를 선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의원이 이 견해에 찬성했다. 다른 의원이 일어나 말했다.
“한 가지만 덧붙이고자 합니다. 최고의 가치를 가진 두 사람이 현재 국가 업무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인물들입니다. 두 집정관이 충분히 상의한 뒤에 둘 중 한 명이 독재관을 지명하고, 그는 독재관의 동료로 선출되도록 합시다.
이렇게 하면 두 사람 사이에 동등하게 명예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만족도도 똑같아집니다. 한 사람에게는 동료를 최고의 인물이라고 선언할 명예를, 다른 사람에게는 동료로부터 최고라고 선언 받을 명예입니다. 둘 다 아무 즐겁고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의 수정안은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더 이상 수정안이 없어 그의 제안이 법안으로 통과됐다. 두 집정관은 둘 중 누가 더 통치에 적합한 사람인지 가릴 권한을 부여받았을 때 존경받을 만하고 모든 인간의 지혜를 넘는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더 통치할 자격을 갖췄다고 선언했다. 둘은 하루 종일 상대의 미덕을 칭찬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권리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 원로원에 참석한 의원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원로원 회의는 마감됐다. 두 집정관의 친척이면서 원로원 의원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원로가 라르키우스에게 가서 밤이 깊을 때까지 간청했다.
“원로원은 당신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답니다. 당신이 통치에 계속 무관심을 보이면 로마에 해로울 뿐입니다.”
라르키우스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원로원 회의가 다시 열렸다. 라르키우스는 모든 의원들의 조언에도 계속 사양하면서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때 코엘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인테르렉스가 했던 것처럼 선언했다.
“라르키우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합니다. 저는 집정관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라르키우스는 전쟁 때나 평화로울 때에 모든 사안에 절대적 권력을 가진 로마의 첫 행정관으로 임명됐다. 로마인은 그를 ‘딕타토르’ 즉 독재관이라고 불렀다. 그가 원하는 명령은 무엇이든 내릴 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사법권을 행사하거나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옳고 그른 것을 규정하는 법령이나 명령을 ‘에딕타’라고 불렀다. 일부 역사학자는 ‘독재관은 전통대로 민회의 승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지명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독재관으로 불린다’고 주장한다.
(주:첫 번째 주장의 요지는 ‘딕타토르라는 이름은 ‘명령하다, 처방하다’를 뜻하는 ‘딕타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의 요지는 ‘독재관은 선출되지 않고 임명되기 때문에 딕타토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지명하다’라는 라틴어는 ‘딕투스’고 ‘선출하다’는 라틴어는 ‘크레아투스’다.)
독재관이 가진 권력의 범위는 이름만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 사실 이 자리는 선출직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이 제도를 그리스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라르키우스는 독재관 자리에 앉자마자 전직 집정관 스쿠리우스 카시우스를 사마관(기병대장)으로 임명했다. 이런 관행은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독재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늘 사마관을 임명했다. 라르키우스는 독재관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보여주기 위해 릭토르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로마 시내에서 늘 도끼를 설치한 나무 뭉치(파스케스)를 들고 다니도록 하라.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왕정 시대에 여러 왕이 시행하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가 집정관에 대한 증오감을 덜기 위해 폐지한 제도가 부활됐다.
라르키우스는 파스케스와 다른 왕의 상징물을 들고 다님으로써 혼란을 일으키려는 사람들과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었다. 그는 이어 모든 로마인에게 가장 민주적인 왕이었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시행한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모든 로마인은 재산을 신고하시오. 본인은 물론 아내, 자식의 이름을 각 부족별로 제출하시오.”
처벌이 아주 가혹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모든 로마인이 재산과 가족을 등록했다. 신고하지 않은 사람은 재산과 시민권을 잃는 게 벌이었다. 등록 결과 성인 나이에 이른 로마 인구는 15만 700명으로 집계됐다.
라르키우스는 군 입대 연령의 남자와 노인을 구분했다. 군에 갈 수 있는 남자는 각각 백인대로 편성했다. 그는 보병 4개 군단과 기병대를 편성한 뒤 한 개 군단을 직속부대로 편성했다. 동료 집정관 코엘리우스에게는 나머지 3개 군단 중에서 원하는 대로 골라가라고 했다. 사마관 카시우스와 그의 동생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에는 나머지 군단을 선택하게 했다. 노인들에게는 성벽 안에 남아서 도시를 지키라고 지시했다.
라르키우스는 전쟁 준비를 종료한 뒤 전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리고 라틴군이 침공할 가능성이 높은 세 곳에 진지를 차렸다. 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현명한 장군은 아군의 위치를 강하게 하면서 적의 위치를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 싸우지 않고 전투를 끝내는 게 최선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이겨야 한다. 전쟁 중에서 최악은 친척, 친구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전쟁은 협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정의보다는 관대함이 우선시돼야 한다.”
라르키우스는 비밀리에 라틴군에 사람을 보냈다.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두 나라 사이에 우호관계를 쌓자고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또 라틴 여러 도시와 그들의 동맹에는 공식 사절을 공개적으로 보냈다. 그는 이를 통해 라틴군이 전쟁에 그다지 열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라르키우스는 이런 방법을 통해 라틴군의 호의를 사게 됐고, 병사들과 장군들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
라틴군 총사령관은 마밀리우스와 섹스투스였다. 그들은 투스쿨룸에 총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로마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출격이 지연돼 시간만 낭비했다. 아직 합류하지 않는 도시의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데다 희생제례에서 바친 제물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일부 병사는 로마 영토를 약탈하러 나갔다. 라르키우스는 미리 정보를 입수한 뒤 코엘리우스에게 최정예 보병과 기병을 붙여 그들을 막게 했다. 로마군은 라틴 병사들을 기습해 여러 명을 죽이고 일부는 포로로 사로잡았다. 라르키우스는 붙잡혀 온 라틴 병사들을 직접 치료해주거나 다른 친절을 베풀어 호의를 샀다.
라르키우스는 포로들을 투스쿨룸에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몸값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사절이 그들을 데리고 투스쿨룸에 가도록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라틴군은 해산했다. 그리고 양측 사이에 1년간 휴전이 선언됐다.
라르키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귀국했다. 그는 집정관을 선출한 뒤 임기를 끝내기도 전에 독재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임기 중에 사형당하거나 추방당하거나 처벌을 받은 로마인은 하나도 없었다. 라르키우스의 선례는 이후 독재관 자리에 오른 모든 사람에게 이어졌다.
로마 역사를 통틀어 독재관이 권력을 절제해서 사용하지 않거나 시민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외국과의 전쟁에서 독재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조국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기고도 권력에 취하지 않은 것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이든 왕정이나 독재정을 노리는 사람들을 색출하던 때이든, 아니면 비극을 막아야 했을 때이든 독재관 자리에 오른 모든 로마인은 초심을 잘 지켜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로마인은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위기를 맞아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남는 희망은 바로 독재관이다.”
하지만 라르키우스로부터 400년이 흘러 현재 로마인의 아버지 세대에 독재관 제도는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됐다. 코르넬리우스 술라 때문이었다. 그는 가혹함과 잔인함으로 권력을 행사한 처음이자 유일한 독재관이었다. 로마인은 독재관이 독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술라는 원로원을 평범한 사람으로 채워 넣었다. 호민관의 권력을 최소한으로 줄였고, 모든 도시의 인구를 줄이고 여러 왕국을 없애고 다른 왕국을 스스로 세웠다. 그리고 무자비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로마인의 경우 내전에서 죽은 사람 이외에도 항복한 적 병사 중에서도 4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고문을 한 뒤 살해하기도 했다. 이게 로마에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는지 지금은 판단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