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톨리노 언덕

유피테르 신은 우리에게 패권을 주셨다

by leo


BC 753년 4월 21일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민회를 열어 나라의 정치형태를 왕정으로 결정했다. 추종자들은 지도자인 로물루스를 왕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그는 아무런 형식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이를 덥석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먼저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 신에게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물루스는 조점관에게 새 점을 보도록 해서 유피테르 신에게 허가를 받을 날을 골랐다. 신성한 날의 아침이 밝아오자 그는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오두막집에서 나갔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이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물루스는 사람들을 데리고 팔라티노 언덕 맨 끝의 공터로 갔다. 아래로는 테베레 강이 보이고, 그 옆으로는 카피톨리노 언덕이 서 있는 곳이었다. 그는 절차에 따라 유피테르 신은 물론 여러 신에게 제물을 차례로 바치고 기도를 드렸다.


로물루스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맑은 아침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가 번쩍 하며 내리쳤다. 언덕 아래에서는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당시에 로마인들은 번개와 독수리를 유피테르 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민회를 소집해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설명했다. “나는 유피테르 신의 뜻에 따라 왕으로 선택됐습니다. 앞으로 로마의 모든 왕은 이런 방식으로 뽑게 될 것입니다.”



로물루스가 유피테르 신의 선택을 받아 왕 자리에 오른 것을 계기로 이후 로마에서는 유피테르 신의 상서로운 조짐을 보고 왕을 뽑는 관습이 이어졌다. 왕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으로 정치형태를 바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정관, 법무관 등 다른 행정관을 선거로 선출할 때에도 유피테르 신의 조짐을 살폈다.


공화정 시대에 선거에서 행정관으로 당선된 사람은 집의 문밖에서 밤을 지새운 뒤 아침 해가 뜰 때 일어나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가 맑은 하늘 아래 개활지에서 기도를 드렸다. 로물루스처럼 모든 지도자에게 유피테르 신이 번개를 내려보 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행정관 당선자 옆에 서 있던 조점관은 실제로 번개가 치지 않더라도 “방금 신께서 우리에게 새 행정관이 선출됐다는 조짐을 알려주셨다”라고 선언했다. 단순히 형식에 불과하더라도 이 관습을 꼭 지키려고 한 것은 유피테르 신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는 뜻에서였다. 로마인들은 이 절차를 어기면 로마에 큰 불행에 닥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인들이 우러러본 유피테르는 건국 초창기에 에트루리아에서 받아들인 신이었다.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유피테르를 ‘왕을 보호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유피테르라는 이름은 라틴어인 요비스(Iovis)와 파테르(pater)을 합친 것이었다. 요비스의 의미는 불투명하지만 파테르는 ‘아버지’라는 뜻이었다. 인도유럽어 계열 접두사로 번개, 하늘을 뜻하는 디우(dyeu)와 파테르가 합쳐진 게 유피테르라는 주장도 있었다.


유피테르는 1천229년에 이르는 고대 로마 역사를 통틀어 정치, 사회, 정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신이었다. 사회에 질서를 부여했고,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일등공신이었다. 로마인들은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에게서 패권을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신, 그 중에서도 유피테르를 잘 섬겼기 때문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유피테르는 로마인에게 국가, 또는 국가의 권력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번개는 모든 힘을 누를 수 있는 절대적 능력을, 그를 상징하는 새 독수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예언을 의미했다. 로마인에게 유피테르는 로마였고 로마는 유피테르였다. BC 1세기 철학자 키케로는 『신의 본성』에서 ‘우리는 유피테르를 옵티무스 막시무스라고 부른다. 우리를 올바르고 온화하고 현명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안전, 부상으로부터의 자유, 부와 풍부한 자원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로마인들은 처음에는 유피테르를 ‘신성한 조짐 또는 비를 가져다주는 신’이라는 뜻인 유피테르 엘레키우스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전쟁에서 패배를 불식시키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숭배했다. 그래서 최고의 장군인 유피테르 임페라토르, 불패의 장군인 유피테르 인빅투스, 승리자인 유피테르 트리움파토르로 부르게 됐다. 마지막에는 지고지선을 상징하는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라는 이름도 붙였다.


로마인들은 각 방면에서 로마를 지키려고 불철주야 애쓰는 유피테르에게 많은 신전을 만들어 바쳤다.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유피테르 토나스 신전, 키르쿠스 막시무스 인근에 들어선 유피테르 아르보라토그 신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위해 세운 유피테르 콘세르바토르 신전, 마르스 평원에 있던 유피테르 풀구르 신전, 콜로세움 인근의 유피테르 빅토르 신전 등이었다.


로마의 많은 유피테르 신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신성시되던 곳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건설한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이었다. 이름 그대로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던 신전이었다. 이곳은 로마의 종교는 물론 패권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카피톨리노 언덕과 유피테르 신전은 로마의 심장이었다. 나중에 영어와 스페인어로 국가의 수도를 캐피털(capital), 프랑스어로 캐피탈레(capitale)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capital


카피톨리노 언덕은 지금은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살펴본 관광객이 스쳐 지나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로마인뿐만 아니라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속주 지도자, 동맹국 왕이 꼭 들러 참배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포로 로마노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지만, 과거에는 포로 로마노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있었다. 로마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에 유피테르 신을 만나러 간다. 아직도 그곳에 그가 있다면….


도망자의 언덕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작고 좁았다. 위에서 보면 대충 오각형처럼 생겼는데, 가장 긴 쪽 길이가 겨우 460m에 불과했다. 높이가 39m여서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높지는 않았지만 주변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남동쪽에만 올라가는 길이 있어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었다. 이처럼 높기만 하고 공간은 좁았기 때문에 큰 마을을 이뤄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로물루스가 이곳에 눈길을 주지 않고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세웠을 때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의 『라틴어 원론』이라는 책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사투르니아 마을이 있었다. 족장은 사투르누스였다. 이곳은 고대에는 몬스 사투르니우스(사투르누스의 산)로 불렸다’라고 적혀 있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를 따라 에스파냐에 다녀왔던 그리스 병사들도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그들이 만든 마을이 사투르니아였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있던 사투르니아에 들어가 살았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투르니아가 없어지고 한참 뒤에 입주했던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그리스 병사들이 카피톨리노 언덕에 살게 된 과정을 알아보자.


헤라클레스는 메가라와 결혼해 자식 3명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헤라 여신의 저주 때문에 이성을 잃어 가족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그는 죄를 씻기 위해 티린스의 겁쟁이 임금 에우리스티우스 왕에게 복종해야 했다. 왕을 위해 열두 가지 과업을 완성하는 게 임무였다.


게리오네우스(또는 게리온)가 세상의 서쪽 끝에 있는 전설의 섬 에리테리아에서 키우는 소떼를 가져다주는 게 열 번째 과업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배를 빌려 타고 에리테리아로 가서 게리오네우스는 물론 머리 두 개를 가진 개 오르토스, 거인 목동 에우리티온을 모두 죽이고 소를 훔칠 수 있었다. 에리테리아는 지중해 서쪽 끝,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는 섬으로 추정된다. 헤라클레스가 거쳐 간 곳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모나코, 피레네 산맥, 바르셀로나, 톨레도, 세비야, 라 코루냐 등에는 헤라클레스가 다녀갔다는 신화가 아직까지 전해 내려온다.


헤라클레스는 로마를 거쳐 그리스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그때 에스파냐에 다녀온 그리스 병사 및 도중에 잡아온 포로 중에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병사들은 대개 펠로폰네소스 출신이었다. 그들은 고향에 가봐야 호구지책이 막막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는 강이 흐르고 적당한 면적의 농지와 초지도 있어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헤라클레스는 그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병사들이 자리 잡은 곳은 카피톨리노 언덕이었다.


BC 753년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고민에 빠졌다. 인구가 겨우 3천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는 어느 누구와도 전쟁을 벌일 수 없었다. 힘을 키우려면 인구를 늘려야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내디딘 작은 도시에 들어와 살려는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로물루스는 극단적인 대책을 생각해냈다. 도망자, 부랑아, 산적, 빈민 등 신분을 불문하고 어느 도시, 어느 나라의 누구라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로물루스는)모든 탈주자를 맞아들여 보호해주었다. 채무자는 물론 살인자까지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도망자를 이전 부족에서 잡으러 올 게 뻔한 일이었기 때문에 잠시 숨을 곳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었다. 로물루스가 그들에게 배정한 땅은 바로 카피톨리노 언덕이었다. 이렇게 은닉시켰던 사람을 원래 고향 사람이 잊어버릴 무렵이 되면 새로운 신분을 줘 로마에 정착하게 했다. 소문이 퍼져 나가자 인근 부족의 잡다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로물루스는 힘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인구를 대거 유입할 수 있었다.


도망자의 은신처로 삼았던 카피톨리노 언덕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는 성소로 바꾼 사람도 로물루스였다. 그는 다른 라틴족 도시의 통혼 거부로 결혼할 여성을 못 구해 애를 태우던 로마 청년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다른 부족 여인들을 납치했다. 빼앗긴 여인들을 되찾겠다면서 카이니아 사람들이 쳐들어왔다. 로물루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적을 단숨에 와해시켜 버렸다. 그는 적의 왕에게서 빼앗은 갑옷을 들고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갔다. 당시 언덕에는 목동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참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는 참나무 옆에 갑옷을 얹은 작대기를 꽂아 유피테르 신에게 봉헌한 뒤 “앞으로 영원히 카피톨리노 언덕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로물루스가 왜 로마를 건국한 팔라티노 언덕이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거나 드물었던 카피톨리노 언덕에 가서 맹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그는 언덕에 조그마한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 신전을 지었다. 그가 신전을 지은 것은 처음이었다.


로물루스가 첫 유피테르 신전을 지었을 무렵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을 성채로 사용하고 있었다. 북쪽에 흉벽과 단애를 쌓아 성채를 만든 것이다.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인데다 테베레 강에 가장 가까워 적이 쳐들어왔을 때 전진기지 역할을 맡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학자는 사비니족과 로마가 통합한 뒤에 성채가 생겼다고 본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대규모 유피테르 신전이 건설된 이후 성채는 사라져 버렸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서쪽 끝에는 큰 바위가 박힌 절벽이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곳을 타르페이아 바위라고 불렀다. 일부에서는 카피톨리노 언덕 전체를 타르페이아 언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공화정, 제정 시대에 살인자, 배신자, 위증자 등을 떨어뜨려 처형하는 장소로 이 바위를 이용했다. 애꿎은 장애인들도 이 바위에서 등을 떠밀려 죽임을 당했다. 당시에는 장애인을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바위가 처형장이 된 것과 관련해 아주 끔찍하고 슬픈 전설이 전한다. 초기 로마의 역사를 담고 있고,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설은 로물루스 시대에 사비니족의 티투스 타티우스 왕이 여자들을 납치한 데 대한 복수전을 벌이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간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로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성채를 만들어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 성채를 지키고 있던 사람은 스푸리우스 타르페이우스였다.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다.


타르페이우스에게는 타르페이아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아버지와 달리 욕심이 많은 여성이었다. 당시 사비니족 병사들은 전쟁을 할 때 금팔찌 같은 장신구를 왼팔에 차고 싸우는 게 일상적이었다. 그녀는 밤에 타티우스 왕을 찾아가 사비니족 병사들이 왼팔에 차고 있는 보물을 주면 성채 문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왕은 흔쾌히 승낙했다.


타르페이아는 그날 밤 약속한 시간에 문을 열어주었다. 성채 안으로 들어간 사비니족은 모든 로마 병사를 살해했다. 타티우스 왕은 병사들에게 왼팔에 있는 보석을 모두 타르페이아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왕의 지시를 들은 병사들이 일제히 집어던진 것은 금붙이가 아니라 방패였다. 평소에는 왼팔에 금팔찌를 차고 싸웠지만 이날만큼은 전투를 앞두고 방패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비니족 병사들은 그녀의 시체를 카피톨리노 언덕의 바위에서 아래로 던져 버렸다. 전쟁을 마친 뒤 로마인들은 바위에 타르페이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국을 배신하는 사람의 최후는 끔찍하다는 교훈을 주려는 뜻에서였다.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로마인 중 대표적인 인물은 마르쿠스 만리우스였다. 그는 BC 390년 갈리아 족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가 끝까지 싸운 장군이었다. 평민을 대변한 만리우스는 나중에 왕을 참칭한 혐의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떨어지는 방식으로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언덕에 있던 그의 집은 허물어졌다. 이후 로마에서는 ‘앞으로는 누구도 카피톨리노 언덕에 집을 가질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유피테르 신전


로물루스가 건설한 신전은 매우 작았다. 길이가 겨우 5~6m에 불과했다. 4대 왕인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신전을 증축했지만 여전히 규모는 크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능력으로는 큰 신전을 지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전은 BC 1세기 제정 시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남아 있었다. 황제가 별 관심을 쏟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 봐서는 규모, 외관이 형편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초대형 유피테르 신전을 새로 지을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였다. 그는 왕이 된 직후부터 인근 어느 도시에서도 만들 수 없는 웅장한 규모의 유피테르 신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신전 건설을 본격화한 사람은 그의 아들(또는 손자)이었던 로마의 마지막 제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였다.



유피테르 신전을 짓기 위해 땅을 파며 기초 공사를 할 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테렌티우스 바로가 쓴 『라틴어 원론』에 그 내용이 기록돼 있다. 굴착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이목구비가 온전한 상태인 죽은 남자의 머리를 발견했다. 타르퀴니우스는 무슨 뜻인지 알아보려고 로마뿐만 아니라 에트루리아에서도 영험하다고 소문난 주술사 여러 명을 데려와 해석을 맡겼다.


주술사들은 입을 모아 “카피톨리노 언덕이 세계 수도의 장엄한 요새가 들어서야 할 곳이라는 점을 유피테르께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로마가 앞으로 세상의 머리가 될 곳임을 보여주는 증표입니다”라고 말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여기에 다른 내용을 하나 덧붙여 로마에 소문을 퍼뜨렸다. 죽은 사람은 에트루리아의 전설적 영웅인 아울루스 비벤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덕에서 파낸 머리를 ‘아울루스의 머리’라는 뜻인 카푸트 올리라고 불렀다. 세월이 지나면서 카푸트 올리는 카피톨리노로 바뀌게 됐다.


타르퀴니우스는 유피테르 신전을 짓기 위해 에트루리아에서 목수와 기사를 데려왔다. 엄청난 정부 자금을 투입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평민 계급에서 많은 노동자를 투입했다. 유피테르 신전을 최종 완성한 사람은 타르퀴니우스가 아니라 그를 몰아낸 뒤 공화정을 세우는 데 기여한 BC 509~503년의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였다. 봉헌식은 공식적으로 BC 509년 9월 13일에 열렸다. 로마인들은 이날을 ‘로마 공화정이 출범한 공식적인 첫날’로 기록했다. 이날 봉헌식에서는 하얀 소를 제물로 바치고 루디라는 화려한 축제를 거행했다.


신화에 따르면 유피테르 신전이 봉헌됐을 때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로마인들이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다른 신을 모신 신전을 모두 철거하자 유벤타스, 테르미누스 신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영원이 언덕에서 살겠다고 한 것이었다. 유벤타스는 젊음을, 테르미누스는 국경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로마는 이들의 거부를 좋은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로마는 새 신전에 작은 기도소 두 곳을 설치해 이들에게 봉헌했다. 유벤타스가 로마의 성소인 카피톨리노 언덕에 남기로 했다는 것은 ‘영원한 로마의 젊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테르미누스는 ‘로마의 국경이 영원히 지켜진다’는 걸 상징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새 신전의 이름은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로 정해졌다. 새 신전에는 유피테르와 그의 부인 유노, 딸 미네르바를 함께 모셨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카피톨리노의 삼신전’이라고 불렀다. 가운데 성상 안치소는 유피테르에게 봉헌됐다. 그곳에는 테라코타로 만든 유피테르 조각상이 세워졌다. 왼쪽은 유노에게, 반대쪽은 미네르바에게 바쳤다.


실제 사람 크기인 유피테르 조각상은 오른손에 번개를 들고 있었다. 야자나무 가지로 장식한 짧은 옷 튜닉과 황금실로 수놓은 겉옷인 자주색 토가를 입고 있었다. 로마인은 축제 때 조각상의 얼굴을 붉게 칠하기도 했다. 로마 장군들은 개선식에서 유피테르처럼 얼굴을 붉게 칠하고 야자나무 가지로 장식한 속옷과 황금실로 수놓은 자주색 토가를 입었다.


신전 정면 윗부분의 삼각형 부분인 페디먼트에는 유피테르가 말 네 마리를 매단 이륜 전차를 모는 모습을 담았다. 계단 앞에는 커다란 제단이 놓여 있었다. 로마인은 매년 새해 초나 개선식 때, 또는 다른 특별한 경우에 이곳에서 희생제물 봉헌식을 치렀다. 매년 9월에는 유피테르를 기리는 제사를 열어 하얀 소와 금으로 도금한 소뿔을 제물로 바쳤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은 로마 장군이 전쟁에서 약탈해 봉헌한 전리품과 로마를 찾은 외국인이 바친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물건만 골라 보관하는 저장소 역할을 했다. 로물루스가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보관한 데에서 유래한 관습이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봉헌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BC 459년 라티움 도시들이 복종의 표시로 바친 황금 왕관이었다. 외국과의 조약, 법률 등을 담은 동판은 물론 세금으로 걷은 국고도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봉헌물이 너무 많아져 신전 내부가 꽉 차는 바람에 BC 179년에는 신전을 정리하기도 했다.


왕정과 공화정 시대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유명한 로마인의 조각상을 세우는 게 유행했다. 언덕에 서 있던 조각상은 왕정 시대의 왕 4명과 ‘공화정의 아버지’ 유니우스 브루투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각상이 너무 많아지자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조각상 대부분을 마르스 평원으로 옮겨버렸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30만 명에 이르는 갈리아 군대를 이탈리아 북부에서 물리쳐 로마를 구한 평민의 영웅 가이우스 마리우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게르만 족을 제압한 아우구스투스 초대황제의 외종손 게르마니쿠스 등 많은 장군이 바친 승리의 트로피도 신전을 가득 채웠다.



유피테르 신전은 건립 이후부터 공화정, 제정을 통틀어 언제나 로마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곳은 로마에서 가장 큰 신전이라는 차원을 넘어 로마의 주권과 영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원로원은 평소에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집회를 열었지만,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에는 늘 이곳에 모였다. 이 신전은 로마 장군과 황제가 치르는 개선식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했다. 왕정 시대에 왕, 공화정 시대에 집정관은 이 신전에서 즉위, 취임 선서를 했다. 제정 시대에 황제는 원로원으로부터 즉위 승인을 받은 뒤 신전을 찾아가 맹세를 했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은 성소이자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신전에 들어간 사람을 해칠 수는 없었다. 마르스 평원에 있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의 회랑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 일당은 신전 안으로 도망갔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범죄자라도 함부로 죽이거나 해코지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이 이 신전을 얼마나 경외했는지는 카이사르의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치르던 도중 마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내전에서 수많은 로마 동포를 죽이는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힐난하는 유피테르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마차에서 내려 카피톨리노 언덕까지 무릎으로 기어서 올라갔다. 신에게 ‘저의 오만과 불손을 용서하소서’라는 뜻을 최대한의 겸손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그는 결국 6개월 뒤 암살당했다. 과연 그의 오만이 신을 분노케 하고 용서받지 못한 결과였을까?


신전 지하에는 고대 로마의 신탁서인 시빌 예언서가 보관돼 있었다. 이 책은 그리스어로 적혀 있었는데,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그리스 초기 식민지인 쿠마이에서 온 무녀로부터 사들인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불행의 원인과 해결책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신의 뜻을 구할 때 이 책에 전적으로 의지했다고 전해진다. 타르퀴니우스가 책을 구입하는 과정과 관련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아폴로 신을 모시는 쿠마이 지역의 한 무녀가 왕에게 시빌 예언서 9권을 사라고 하면서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다.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한 왕은 사지 않겠다며 화를 냈다. 무녀는 책 3권을 불태워 버린 뒤 왕에게 나머지 6권을 똑같은 가격에 사라고 다시 요구했다. 화가 더 난 왕은 이번에도 살 수 없다고 버텼다. 무녀는 다시 책 3권을 더 태워 버리고 나머지 3권을 똑같은 값을 내고 가져가라고 촉구했다. 초조해진 왕은 할 수 없이 처음에 무녀가 요구했던 돈을 다 주고 책 3권을 사야 했다.


시빌 예언서는 유피테르 신전 지하창고에 보관됐고, 전담 사제의 관리를 받게 됐다. 예언서를 보호하는 사제는 나중에는 15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모든 국가적 의무를 면제받은 채 오직 예언서를 돌보는 일만 하게 됐다. BC 83년 불이 나서 유피테르 신전이 완전히 다 타버렸을 때 시빌 예언서도 함께 소실돼 없어지고 말았다. 로마 인은 그리스 곳곳을 뒤져 시빌 예언서를 구해 다시 로마에 갖고 왔다고 전해진다.


로마가 이 책을 활용한 사례는 한두 건이 아니다. BC 399년과 348년, 295년에 역병이 돌자 로마인은 이 책에서 해답을 찾았다. 결론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라는 것이었다. BC 345년에는 대낮에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돌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때도 로마인은 시빌 예언서를 보고 축제를 열어 문제를 해결했다. BC 216년 포에니 전쟁 때는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 6만 명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에게 몰살당했다. 전례 없던 참패에 충격을 받은 로마인은 시빌 예언서의 신탁대로 그리스인과 갈리아인 4명을 산 채로 땅에 묻어버렸다. 이밖에도 로마인들은 온갖 기이한 일이 일어나거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수십 차례에 걸쳐 이 책에서 신탁을 구했다.


유피테르 신전의 고난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은 번개, 화재, 전쟁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세 번이나 파괴됐다. 신전이 피해를 입을 때마다 로마인들은 그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새 신전을 화려하게 지었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가 쓴 『카틸리나와의 전쟁』에 따르면 이 신전은 가이우스 마리우스 지지 세력과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에 벌어진 내전 때였던 BC 83년 화재로 완전히 파괴됐다. 화재 때문에 유피테르 조각상도 불에 타 없어졌다. 그곳에 보관 중이던 시빌 예언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전에 보관돼 있던 각종 귀중품은 로마 동쪽에 있는 프라이네스테(오늘날 팔레스트리나)로 옮겨졌다.


신전 재건축은 내전을 승리로 마무리한 술라가 시작했다. 그는 신전을 새로 짓기 위해 그리스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에 세워져 있던 코린트 대리석 기둥을 로마로 가져오기도 했다. 실제 공사의 대부분은 전직 집정관이었고 술라의 부하였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가 맡아 진행했다. 공사는 술라가 죽은 뒤인 BC 69년에 끝났으며, 봉헌식은 카툴루스가 거행했다.


카툴루스의 새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은 옛 신전 자리에 세워졌다. 신전 설계는 옛 신전 그대로였다. 다만 새 신전은 이전 신전보다 상당히 높아졌고, 건설비가 더 투입돼 이전 신전보다 더 화려했다. 테라코타로 만들었던 유피테르 조각상은 황금과 아이보리를 사용해 새로 만들었다. 그리스 조각가 오폴로니우스의 작품이라는 게 많은 역사학자의 추정이다. 새 유피테르 조각상은 그리스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조각상을 모방했다고 전해진다.


위치가 높다 보니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벼락이 자주 내리쳤다. 특히 유피테르 신전에 벼락이 집중됐다. 그때마다 로마인들은 즉시 신전을 수리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벼락에 맞아 손상된 신전을 고쳤다는 기록도 있다. 천둥번개의 신을 모신 신전이 벼락에 맞아 피해를 입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9년에는 방화 때문에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은 두 번째 전소되고 말았다. 그 사연은 이렇다. 네로가 죽은 뒤 에스파냐 속주 총독이었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가 차례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게르마니아 군단을 이끈 아울루스 비텔리우스가 그들을 물리치고 황제 자리를 빼앗았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 속주 총독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당시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는 로마 장관 즉 시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비텔리우스를 따르던 병사들은 그를 인질로 붙잡으려고 했다. 사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도미티아누스를 데리고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으로 피신했다. 신성불가침의 성소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해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비텔리우스의 병사들은 카피톨리노 언덕을 에워쌌다. 분노와 공포에 눈이 먼 병사들은 다음날 새벽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신전에 집어던졌다. 신전은 주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지만 목재도 상당부분 포함돼 있었다. 유피테르 신전은 모든 로마 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에 타 무너져 버렸다. 로마인들은 허망했고 분노했고 불안에 빠졌다. 로마의 수호신에게 바친 신전이 외국인도 아닌 로마 인에 의해 불타버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충신인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는 황제보다 먼저 로마에 들어가 비텔리우스 병사들을 제압한 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을 새로 짓는 공사를 서둘렀다. 민심을 수습하려면 신전 재건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에서 건너와 황제로 등극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직접 석재를 짊어지고 카피톨리노 언덕을 오르며 일손을 보탰다. 앞장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황제를 보고 다른 귀족, 평민도 복구공사에 동참했다. 이렇게 서둘렀지만 신전이 완공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인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였다.


유피테르의 몰락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뒤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자 유피테르 신과 유피테르 신전은 마침내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유피테르의 몰락을 실천한 사람은 4세기 중‧후반 공동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였다. 신전에 앞서 먼저 사라진 것은 제도였다. 그라티아누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제사장) 겸임을 거부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이어져오던 관례를 폐지한 것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로부터 로마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유피테르를 내쫓기로 결심했다. 18세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테오도시우스가 로마를 방문해 유피테르를 로마에서 쫓아낸 이야기를 기록했다.


로마에 간 테오도시우스는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 뒤 의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로마의 종교를 유피테르로 할 것이오? 그리스도로 할 것이오?”라고 물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로마에 혼자 간 게 아니었다. 수많은 병사가 원로원 안팎은 물론 로마 안팎에 진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피테르를 고집할 원로원 의원은 하나도 없었다. 원로원은 유피테르를 로마의 주신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결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피테르가 로마의 주신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유피테르 신전의 중요성도, 보호할 필요성도 사라져버렸다. 당연히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에서도 수시로 약탈이 자행됐다. 5세기 초 호노리우스 황제의 측근이었던 스틸리코 장군은 신전의 황금 문을 뜯어갔다.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로 건너간 반달족이 로마에 침입해 다시 신전에 큰 피해를 입혔다.


15세기 중엽까지는 그래도 형편이 괜찮았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였던 포기오 브라키올리니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상당히 파괴됐지만 여전히 신전 모양을 그런대로 갖춘 유피테르 신전이 남아있었다.


신전을 완전히 없애버린 사람은 귀족인 지오바니 피에트로 카파렐리였다. 그는 16세기 캄피돌리오 광장에 카파렐리 궁전을 건설하는 데 사용하려고 신전에서 각종 석재를 떼어냈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은 결국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목동이 소나 양을 몰고 매일 들르는 곳이 됐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이곳을 ‘양의 산’이라는 뜻인 ‘몬테 카프’라고 불렀다.


지금 카피톨리노 언덕의 캄피돌리오 광장에는 건물이 세 개 서 있다. 가운데 건물은 콘세르바토리 궁전이다. 고대 로마의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이 서 있던 곳이다. 카파렐리 궁전도 여기에 포함됐다. 콘세르바토리 궁전 지하에 가면 신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등을 돌리다


로마인의 삶에서 사라졌던 카피톨리노 언덕이 다시 각광받게 된 것은 엉뚱한 이유에서였다. 1538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에 오기로 돼 있었다. 그를 초빙한 사람은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였다. 교황은 로마의 새로운 모습을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을 새로 단장하기로 했다.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사업을 맡았다. 그가 생각한 재단장의 핵심은 방향 전환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카피톨리노 언덕의 모든 건축물은 포로 로마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방향을 180도 틀어 모든 건물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향하도록 만들기로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교황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무너진 고대 로마 대신 새롭게 발전하는 로마의 미래를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광장 한복판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을 세웠다. 원래 구리로 만든 높이 3.5m 동상이었다. 대기 오염 때문에 훼손 우려가 커지자 원본은 카피톨리노 박물관 안으로 옮겼다. 광장에 있는 기마상은 1981년에 만든 복제품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은 175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포로 로마노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가 있는 비아 코르소(코르소 거리)의 콜로니아 광장에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세기 무렵 라테라노 대성당 앞으로 옮겨져 있었지만,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광장을 만들 때 다시 이전했다.


과거 로마에서는 구리로 황제 기마상을 많이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제정 시대 후기에 각종 기마상을 녹여 동전을 만드는 데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기마상은 중세 시대에 교회에 의해 파괴됐다. 지금 완벽한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뿐이다.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로 오해해 파괴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있다. 이를 라틴어로 ‘아들로쿠티오’라고 한다. 로마 황제나 장군은 전쟁에 나가기 전이나 전쟁에서 이긴 뒤에 군사들에게 연설할 때 항상 손을 이렇게 들었다. 병사들도 황제나 장군에게 인사할 때 오른손을 들고 “임페라토르”라고 외쳤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파시즘을 이끈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연하겠다며 각종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로마의 경례도 도입했다. 독일의 나치가 이를 벤치마킹해 ‘하일 히틀러’로 유명한 독일식 경례를 만들어냈다.


유피테르는 1천229년에 이르는 로마 역사를 통틀어 로마인의 정치, 사회, 정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신이었다. 로마를 보호했고, 로마 사회에 질서를 부여했고,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피테르의 이름은 태양계의 행성에만 겨우 남아 있다. 영어로는 쥬피터,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목성이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를 좌지우지한 주신이 현대에 들어 태양계의 중심도 아니고, 변방에 자리 잡은 행성 중 하나로 전락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에 밀려 인기를 잃어버렸다.


유피테르의 몰락을 생각하면서 캄피돌리오 광장을 둘러본다. 로마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지 가운데 가장 깔끔하게 잘 단장돼 있는 곳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만큼 전체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균형감을 갖춘 광장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고대 로마의 향기를 맡거나 유피테르의 목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콘세르바토리 궁전 지하로 내려가면 볼 수 있는 고대 신전의 잔해와 계단 주변에 흩어진 고대 성벽 흔적이 고작이다. 대다수 관광객은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거나, 성벽 흔적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주 날씨 맑은 봄날이나 선선한 가을날 결혼사진을 찍는 신혼부부의 밝은 표정이 언덕과 광장을 가득 채울 뿐이다. 유피테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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