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2)

병 주고 약 준 기독교…순교의 진실은?

by leo


콜로세움의 변신


콜로세움은 로마 멸망을 전후해 온갖 희한한 일을 다 겪었다. 야생동물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고, 불법 주택 건설 부지로 쪼그라들기도 했다. 공동묘지가 되기도 했고, 중세시대 로마의 권력을 다투던 귀족의 성이나 궁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교회, 궁전을 짓는 데 사용되는 자재를 조달하는 채석장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로마 멸망의 전조였던 410년 제1차 로마 약탈 때의 일이었다.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포위했다. 포위는 408~410년 두 해 동안이나 이어졌다. 많은 로마인이 병에 걸리거나 굶주려 목숨을 잃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의 시신을 시내에 묻지 못하게 하는 법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고트족에 포위당한 상황이어서 시신을 성벽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묻을 방법이 없었다. 로마인들은 할 수 없이 콜로세움 안에 시신을 묻거나 그 인근에 버려두었다. 이 때문에 콜로세움 아레나는 완전히 공동묘지로 바뀌었다. 지금은 무덤이 모두 철거돼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곳곳에 묘지가 있었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콜로세움은 로마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484년 또는 508년 로마 시장 데키우스 마리우스 베난티우스 바실리우스는 자비를 들여 지진으로 부서진 콜로세움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오랜만에 펼쳐진 복구공사는 당연히 로마에서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로마가 멸망했는데 어떻게 로마 시장이 존재했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로마의 멸망은 로마에서 황제 제도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고, 이후에는 야만족 출신인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크가 왕이 돼 이탈리아를 다스렸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지배자가 바뀐 것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이전보다 잘 돌아가고 있었다.


검투사경기는 사라졌지만, 콜로세움에서 동물사냥 경기는 여전히 이어졌다. 기록에는 519년 에우타리쿠스 킬리카, 523년 아니키우스 막시무스가 콜로세움에서 마지막으로 동물사냥 경기를 거행했다고 남아 있다. 두 사람 모두 집정관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행사를 열었다. 그 이전에도 이런 행사가 수시로 벌어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다.


오도아케르, 테오도리크가 죽은 뒤 동로마제국과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이 이탈리아 지배권을 놓고 다툰 이른바 고트 전쟁(535~553년) 때와 그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동고트족이 545년 로마에 쳐들어갔을 때 로마인 대부분은 달아나고 남아있던 사람은 고작 500여 명이었다.


동고트족은 콜로세움의 석회암 벽돌을 서로 연결하던 금속 고리를 모두 뜯어갔다. 금속을 녹여 무기로 쓰기 위해서였다. 금속 고리가 수십~수백 개에 불과했다면 굳이 뜯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고리의 수와 양이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에 많은 병사를 동원해 수거 작업에 동원했던 것이다. 오늘날 콜로세움에 가보면 벽돌 곳곳에 못을 박았다 뽑은 것 같은 구멍을 쉽게 볼 수 있다. 동고트족이 뽑아간 금속 고리가 박혀 있던 흔적이다.


동고트족이 빠져나간 뒤 로마인 가운데 일부가 돌아왔지만 전성기에는 100만 명 이상이었던 로마 인구는 9만 명 정도로 줄었다. 그나마 대다수 주민은 수로가 파괴돼 식수를 구할 수 없는 로마 시내에 살지 않고, 물을 얻을 수 있는 테베레 강 근처 마르스 평원에 모여 살았다. 콜로세움은 테베레 강에서 제법 멀었기 때문에 사람의 발걸음이 뚝 끊어졌다. 그래서 콜로세움에는 온갖 잡초와 나무가 우거졌고, 늑대나 여우같은 야생동물이 들어와 살게 됐다. 한때 수천 마리의 동물을 사냥하는 경기가 열리던 곳이 야생동물의 집으로 바뀐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콜로세움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9~10세기 무렵에는 오늘날 관광객이 콜로세움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사용되는 복도 공간은 물론 1~2층에까지 가게와 집이 들어섰다. 콜로세움에 있던 가게, 집을 사고 판 공증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도 콜로세움 2층에 가면 당시 집이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11세기 무렵에는 콜로세움에 들어선 집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곳에 들어가 살았던 사람은 가난한 예술가, 금속세공인, 구두수선공, 벽돌공, 마차제작인, 석회 제조공 등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시기에 환전상이 콜로세움 안팎에 적지 않았다. 콜로세움 인근에 있던 라테라노 대성당에 순례자가 몰렸기 때문이었다. 교황이 거주하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평생에 한 번이라도 찾아가는 것은 당시 기독교도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선행 중 하나였다.


12세기 초 로마에서 권력을 장악한 프랑기파니 가문은 콜로세움을 점거한 뒤 주변을 보강해 성으로 사용했다. 콜로세움 안에 궁전을 짓기도 했다. 다른 가문은 기껏해야 로마 곳곳에 탑을 갖춘 성채를 세워놓고 그곳에 틀어박혀 살면서 안전을 지키는 게 고작이었던 시대에 웅장한 콜로세움을 차지했다는 것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프랑기파니 가문은 콜로세움을 차지하기 전 교황 호노리오 2세의 선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었다. 콜로세움을 확보하고 있으면 당시 콜로세움에서 가까운 라테라노 대성당에 거주하던 교황에게 큰 압박을 줄 수 있었다. 로마에서는 안전을 확보할 수 없었던 일부 평민도 프랑기파니 가문의 허가를 받아 콜로세움에 들어가 살았다. 1216년 프랑기파니 가문의 정치적 라이벌인 아니발디 가문이 콜로세움을 빼앗아 역시 성 겸 궁전으로 사용했지만 100년 뒤 교회의 압력에 못 이겨 쫓겨나고 말았다.



파괴되는 콜로세움


지금 콜로세움은 상당히 훼손돼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외벽이나 관중석은 물론 과거 검투사경기 등이 열렸던 아레나도 부서져 있다. 검투사와 동물의 이동 통로로 사용됐던 지하 공간 히포지움도 파괴되기는 마찬가지다. 역사학자들은 ‘현재 콜로세움은 원래 모습에서 3분의 2 가량이 사라졌고, 3분의 1 정도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비극적이고 슬픈 비교이기는 하지만 콜로세움은 인근에 있는 포로 로마노에 비하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포로 로마노를 보자. 대부분 건축물은 사라졌고 겨우 기둥만 몇 개 남아있다. 거기에 비하면 콜로세움은 멀쩡하다. 보기 흉하게 훼손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고, 그런대로 과거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기독교였다.


콜로세움은 수시로 발생한 지진 때문에 타격을 입었다. 로마가 멸망할 무렵부터 시작해 지진이 발생한 상황을 살펴보면 429년, 443년, 477년, 508년, 847년, 1231년, 1349년, 1703년 등 무려 20여 차례에 이르렀다. 508년에는 아레나가 붕괴했고, 1349년에는 남쪽 외벽이 쓰러졌다. 1703년에는 동쪽 부분이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콜로세움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은 처음에 건설할 때 지진에 대비해 6m 깊이로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기초를 튼튼하게 다진 덕분이었다.


지진이 입힌 피해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이런 정도로는 콜로세움이 오늘날처럼 망가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결정적인 파괴자는 교회였다. 새 건물을 지을 때 먼 산의 채석장에서 대리석 같은 석재를 가져온다는 건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니었다. 교회가 눈길을 돌린 곳은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 등의 고대 로마 건축물이었다. 당시에는 문화재 보호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콜로세움을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갔다.


교회가 콜로세움의 석재를 본격적으로 뜯어가기 시작한 것은 590~604년 교황이었던 대 그레고리오 1세 때부터였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신전, 바실리카와 콜로세움을 재활용하는 관행을 맨 처음 도입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는 인물이다. 근대에 실시된 콜로세움 발굴조사에서 ‘GERONTI V S’라고 새겨진 기둥이 발견됐다. ‘존경하는 게론티우스’라는 뜻이었는데, 대 그레고리오 1세로부터 콜로세움을 채석장으로 사용하도록 허가받은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됐다.


현대 교회는 콜로세움을 기독교도가 처형당하거나 야수에게 잡아먹히는 방법으로 순교한 성소라고 믿고 있다. 지금 콜로세움에 들어가 보면 곳곳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거나 기둥에 새겨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왜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이렇게 중요한 콜로세움을 지키지 않고 마치 야수에게 기독교도를 내팽개치듯 도급업자의 먹이로 던져줬던 것일까?


대 그레고리오 1세의 아버지는 로마 시장을 지낸 사람이었고, 고조부는 100년 전 교황이었던 펠릭스 3세(재임 483~492년)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로마에서 유명한 원로원 집안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태어나 평생 로마에서 산 토박이였다. 집은 콜로세움을 내려다보는 첼리오 언덕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 잠에서 깨자마자 콜로세움을 봤거나 그 인근에서 놀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콜로세움이 어떤 곳인지,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 잘 알았을 것이다.


3세기 말 가이우스 데키우스 황제가 로마의 신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한 여러 기독교도를 처형한 일이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당시 로마 주교였던 파비아누스와 나중에 시성된 이레네우스, 아분디우스, 폴리크로니우스 등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사망한 장소는 감옥이었다. 나중에 이들은 콜로세움에서 순교했고 시신은 콜로세움과 메타 수단스 사이에 버려졌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15세기에는 이들을 기리는 작은 교회도 만들어졌다.


파비아누스가 콜로세움에서 순교한 전설이 대 그레고리에 시대에도 퍼져 있었다면 그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콜로세움을 훼손시키는 사업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콜로세움에서 기독교 순교가 벌어졌다는 역사를 몰랐거나, 그런 역사가 없었다고 믿었던 게 아니었을까? 파비아누스의 콜로세움 순교 전설이, 콜로세움을 순교의 성소라고 여기는 인식이 당시 교회에는 아예 없었던 게 아닐까?


어쨌거나 대 그레고리오 1세 이후 여러 교황은 많은 도급업자에게 콜로세움 석재 채취 허가를 내주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충분한 보상이 교황에게 넘어갔다. 도급업자로서는 건축 공사에 쓸 석재를 가장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콜로세움이었다.


교황이 14세기 후반 아비뇽에서 돌아와 로마를 교황의 지위에 걸맞은 도시로 만들기로 작정한 이후부터 상황은 더 악화됐다. 인터넷 기독교사이트 ‘뉴 애드번트’는 ‘14세기 이후 400년 동안 콜로세움의 서쪽 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엄청난 석재는 로마의 채석장 역할을 했다. 다른 건물은 물론 콜로세움 근처에 세워진 교회 네 곳은 이곳에서 뜯어간 석재로 공사를 했다’고 지적했다.


교황 우르바노 6세(재임 1378~89년)는 1386년 ‘산크타 산크토룸의 구원 대형제회’라는 종교 단체에게 콜로세움에 들어가 프랑기파니 가문의 궁전을 차지하라고 지시했다. 이 단체는 라테라노 대성당 인근의 학교, 병원을 후원하던 열성 신도와 지역 유지의 모임이었다. 대형제회가 차지한 면적은 콜로세움 전체의 3분의 1 정도였다. 대형제회가 콜로세움에서 수익사업으로 진행한 일은 석재 독점 판매업이었다. 200여 년 뒤인 1606년에는 판매권을 갱신하기도 했다.


석재를 뜯어낸 것은 대형제회만이 아니었다. 19세기에 프랑스 역사학자 외젠 뮌츠가 로마에서 발견한 1452년의 공식 문서에는 ‘코모 출신의 자재상 지오반니 포글리아는 라테라노 대성당 공사장에 납품하려고 마차 2천522대 분량의 석재를 콜로세움에서 뜯어갔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포글리아 혼자 뜯어간 게 이 정도였고, 다른 업자가 훔쳐간 석재의 규모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는 조카였던 추기경 파르네세에게 특정한 날을 정해 열두 시간 동안 원하는 만큼 콜로세움의 석재를 뜯어가도 된다는 허가권을 내주었다. 조카의 측근 4천 명에게도 같은 허가권을 나눠주었다.


르네상스가 로마에 퍼지면서 콜로세움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 시기의 교회는 물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거장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숭배하면서도 대표적 건축물인 콜로세움은 물론 포로 로마노의 신전, 바실리카를 부수는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교회와 르네상스 거장들이 콜로세움에서 뜯어간 석재로 건설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르네상스 건축물은 책 한 권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그 중 중요한 곳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1455~67년 교황 바오로 2세가 오늘날 베네치아 광장에 건축해 베니스에 매각한 베네치아 궁전, 4세기에 처음 건설했지만 1455~71년 추기경 바르보가 새로 짓다시피 한 베네치아 궁전 옆의 산 마르코 성당, 1585~90년 라테라노 대성당 옆에 만든 예배당인 라 스칼라 산크타, 1439년에 지은 라테라노 대성당의 설교단, 15세기 초 건설됐고 미켈란젤로가 16세기 중반에 재정비한 캄피돌리오 광장의 콘세르바토리 궁전, 나보나 광장에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를 건너면 보이는 칸첼레리아 궁전(1485~1513년), 여기서 테베레 강 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파르네세 궁전.


교회의 오해


콜로세움을 채석장으로 사용하게 계속 놔뒀다면 오늘날 우리는 로마에서 콜로세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기적 같고, 달리 보면 다소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15세기 들어 여러 인문주의 학자가 로마는 물론 그리스, 비잔틴제국 등에서 발견한 책을 연구한 덕에 새로운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다. “콜로세움은 로마 시대 기독교도 순교의 성지였다”는 것이다.


7~8세기에 퍼진 이야기라면서 콜로세움에서의 순교를 다룬 전설도 나돌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콜로세움을 경배하는 분위기가 생겨났고, 그곳에서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구세주의 성체와 산크타 산크토룸의 형제단’이라는 종교단체는 1490~1539년 콜로세움에서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해마다 연극을 공연했다. 간단하게 델 콘팔로네라고 불린 이 단체가 연극을 진행한 것은 콜로세움을 기독교도가 대량 순교한 성소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연극이 공연될 때마다 수천 명이 몰려 눈물로 연극을 지켜봤다.


교황 성 비오 5세(재임 1566~72년)는 순교자의 유해를 갖고 싶어 하는 기독교도에게 콜로세움 아레나의 모래를 가져가라고 권했다. 모래가 순교자의 피로 얼룩졌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교황으로서는 처음 콜로세움을 기독교 순교의 성소로 인정한 발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 내에서는 콜로세움을 순교 성소로 봐야하는지를 두고 합의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교황은 모른척하는 게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 비오 5세의 선언 이후에도 여러 교황은 석재 채취 허가를 계속 내주었다. 심지어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는 콜로세움을 모직공장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 로마의 영혼을 더럽히는 존재인 매춘부를 직원으로 취직시켜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주면 로마를 정화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교황은 건축가 도메티코 폰타나에게 아레나에 공장을 짓고 관중석 2~3층에 기숙사를 건설하는 설계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계획은 없었던 일이 됐다.


1671년에는 추기경 알티에리가 콜로세움을 순교 성소로 숭배하는 주장을 일축하면서 콜로세움을 투우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었다. 그로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인터넷 기독교 사이트 뉴 애드번트에 따르면 알티에리가 살던 때로부터 300여 년 전이던 1332년 콜로세움 아레나에서 투우 경기가 열렸다. 당시 귀족 청년 18명이 소와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역사학자들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기록을 높이 신뢰하지 않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알티에리의 시대에도 콜로세움에서 투우 경기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로마 시민 반대로 투우장은 실제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가장 앞장서 저항한 사람은 지도층 인사였던 카를로 토마시였다. 그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콜로세움의 신성성을 해치는 개발 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책자를 만들어 뿌렸다. 그의 글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감동을 받은 교황 클레멘스 10세(재임 1670~76년)는 성년(聖年)이던 1675년 콜로세움을 성소로 선포한 뒤 그곳에 살고 있던 빈민, 부랑인을 모두 내쫓고 문을 잠가버렸다. 성년은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가 도입한 제도였다. 5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의미했다.


클레멘스 10세는 또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를 기리기 위한 교회를 아레나에 건설하기로 하고 당대 최고 건축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에게 계획안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자금이 턱없이 부족해 착공은커녕 계획안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교황은 콜로세움에 십자가를 하나 만들어 세우는 데 만족해야 했다.


콜로세움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은 18세기 들어서야 최종적으로 정리됐다. 교황 베네딕토 14세(재임 1740~58년)의 선언이 논란에 쐐기를 박는 계기였다. 그는 “고대 로마 시대에 많은 기독교도가 콜로세움에서 순교했다. 이곳을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베네딕토 14세는 콜로세움에서 채석을 금지했고 문을 늘 닫아놓게 했다. 내부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담은 그림인 ‘십자가의 길’을 세우게 했다. 이 그림은 1874년 2월에 철거돼 지금은 볼 수 없다.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순교 성소로 선언한 이후 여러 교황은 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농부들을 계속 쫓아냈다. 그들이 경작 면적을 늘리기 위해 콜로세움을 계속 부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교황은 콜로세움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 돈으로 보강 공사를 실시했다. 1807년과 1827년에는 콜로세움 정면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1831년, 1846년과 1930년대에는 콜로세움 내부 개선 공사가 실시됐다. 아레나 발굴 공사도 같이 이뤄졌다.


베네딕토 14세 시대부터는 흥미로운 기독교 행사가 펼쳐지게 됐다. 그가 콜로세움을 ‘예수의 수난’에 헌정한 게 계기였다. 매년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의 죽음을 기리는 성 금요일이 되면 교황과 기독교 신도 수천 명이 콜로세움 앞에 모여 촛불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지금도 해마다 이 행사는 열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콜로세움의 구사일생을 상징하는 행진일 수도 있다.


콜로세움은 과연 기독교 순교의 역사가 담긴 장소였을까? 많은 근·현대 역사학자, 고고학자는 그곳에서 기독교 순교가 일어났다는 주장을 전혀 근거 없는 오해라고 반박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20세기 벨기에의 예수교 신부였던 델레하예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콜로세움이 기독교 순교의 현장이었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중세부터 다른 순교 현장들은 엄청난 숭앙의 대상이었다. 콜로세움만 완전히 방치돼 있었던 것은 순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12세기에 쓰여진 『미라빌리아 로마에』라는 책은 순교의 현장을 여럿 언급하면서 로마의 키르쿠스 플라미니아(플라미니우스 경기장)를 예로 들었다. 하지만, 콜로세움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푸스 카이멘티시움


콜로세움은 1703년 이후부터는 지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제는 석재를 뜯어가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새로운 현상이 콜로세움을 위협하고 있다. 바로 세월과 환경오염이다. 콜로세움은 지은 지 2천 년이 다 돼 가는 건물이어서 세월에 따른 자연적인 손상이 심하다. 여기에 로마 시내를 오가는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 탓에 석재가 많이 훼손됐다.


세월과 환경오염 때문에 콜로세움이 위험하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보수가 필요하고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오랜 역사에 비해서는 아직 튼튼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장수의 비밀은 콜로세움을 만든 재료 가운데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로마 콘크리트다. 현대 콘크리트의 생명은 기껏해야 100년 정도다. 그런데 로마 콘크리트의 수명은 이보다 엄청나게 길다.


라틴어로 오푸스 카이멘티시움이라고 하는 로마 콘크리트는 BC 3세기 무렵 발명됐다. 이 재료는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리, 도로, 저택, 경기장, 신전 등 여러 건축물에 쓰였다. 당시 콘크리트 제조업자는 포졸라나라고 불린 화산재를 석회, 바위 조각, 사기 타일 조각, 물로 만든 회반죽에 섞어 사용했다. 회반죽과 화산재는 1대3의 비율로 혼합했다. 포졸라나에는 이산화규소, 알루미나 등이 포함돼 있어 회응집력을 강화시키는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


로마 콘크리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 종류로 발전했다. 회반죽에 테라코타를 섞은 콘크리트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방수 기능이 강해졌기 때문에 물탱크처럼 물에 접촉하는 빈도가 잦은 건축물에 사용됐다. 1세기 무렵에는 해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콘크리트도 개발했다. 석고와 화산재를 1대1의 비율로 섞었다고 한다. 바닷물이 석회를 만날 경우 뜨거운 화학 반응을 일으켜 콘크리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 콘크리트와 현대 콘크리트 중에서 어느 게 더 나을까? 여러 해 전 미국과 이탈리아 과학자들이 공동연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고대 로마 때 지중해 항구에 사용한 로마 콘크리트가 현대 콘크리트보다 더 강한 성격을 나타냈다. 고대 로마 항구는 2천 년 동안이나 바닷물의 침식 작용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반면 현대 콘크리트는 50년도 안 돼 부식했다는 것이다. 미국 유타대 마리 잭슨 교수 등 과학자들이 2017년 『미국 광물학회지』에 실은 연구결과는 이렇다. ‘현대의 시멘트는 바닷물을 만나면 쉽게 부식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석회, 화산재, 바닷물, 알루미늄 토버모라이트라는 광물질을 섞는 로마식 제조법은 콘크리트를 강화시켜서 팽창할 때 생기는 균열을 방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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