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창건 이래 수 세기 동안 로마인들의 집은 아주 단출했다. 1세기 로마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가 쓴 『자연사』에 따르면 BC 3세기 에페소스의 피로스 왕과 전쟁할 무렵에는 짚이나 자갈, 나무, 벽돌 등으로 집을 지었다.
삼니움, 타렌툼, 카르타고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 최고의 제국으로 성장한 뒤부터 로마인들의 모든 생활은 변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얻은 부가 로마로 들어오면서부터 웅장한 저택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의 집을 지을 뿐만 아니라 대리석 기둥, 동상은 물론 다양한 미술작품으로 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게 유행이자 경쟁이 됐다.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상상도 못할 만큼 대단한 재산을 축적한 원로원 의원 등 정치 지도자들은 서민과 분리된 곳에서 호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들이 고른 땅은 팔라티노 언덕이었다. 얼마나 귀족이 많이 몰렸던지 이곳에서는 부동산 투기 현상까지 일어나게 됐다. 왕정 시대에는 신전과 공공시설로 가득 차 있던 팔라티노 언덕은 공화정 시대 들어 귀족의 최고급 주택단지로 변해버렸다.
로마의 부자, 권력자가 팔라티노 언덕에 집착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의 탄생지였고, 건국의 영웅인 로물루스가 살았던 집이 있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가진 장소에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은 로마 권력의 최상층부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현실적인 측면에서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 시내 한가운데 있어 전망이 좋았고, 로마인들의 생활 근거지였던 포로 로마노에 가기도 쉬웠다. 종교적 중심지였던 카피톨리노 언덕에도 손쉽게 갈 수 있었다. 빚을 내 이곳에 집을 산 BC 1세기 철학자 겸 정치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포로 로마노까지 한 걸음이면 갈 수 있다네’라며 자랑했다.
로마 귀족들은 공화정 초기부터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가 가장 먼저 집을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첫 기록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의 『로마사』에 나온다. 팔라티노 언덕에 세워진 ‘첫 집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집에 대한 첫 기록’이었다.
로마에 공화정이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의 동생인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는 BC 503년 사비니족과의 전쟁에 나서 대승을 거뒀다. 수년 전 에트루리아 도시인 클루시움의 포르세나 왕에게 사실상 항복했던 아픔을 씻고 강국으로의 도약을 다시 꿈꿀 수 있는 승리였다. 원로원은 그에게 개선식을 거행하도록 함은 물론 팔라티노 언덕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곳에 집을 지을 수 있게 허락했다. 공사비는 나중에 국고에서 돌려주도록 했다. 발레리우스의 집에는 밖으로 열리는 접문을 달았는데, 로마에서 이런 문을 설치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이후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지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340년 가까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카르타고와의 제2차,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거둔 뒤인 BC 2세기가 돼서야 집정관, 법무관, 원로원 의원 등 여러 정치 지도자가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짓거나 샀다는 기록이 하나둘씩 나온다. 그 내역을 잘 살펴보면 당시 로마 상류층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 전쟁 이후 로마 속주로 전락한 지역 주민을 착취해 챙긴 수입, 여러 나라의 왕에게서 몰래 받은 뇌물 등이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발레리우스 이후 기록에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은 BC 165년 집정관이었던 그나우에스 옥타비우스였다. 평민 출신 귀족인 그는 법무관으로 재직하던 BC 168년 로마 함대를 이끌고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나서 승리를 거뒀다. 그는 그리스의 대국이었던 마케도니아에서 챙긴 엄청난 전리품으로 마르스 평원에 포르티코 옥타비아(옥타비우스 열주 회랑)를 건설해 국가에 기증하고, 팔라티노 언덕에는 대저택을 지어 명성을 높였다.
BC 115년 집정관을 지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옥타비우스의 저택을 사들였다. 옆에 있던 자신의 집을 더 넓히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는 당시 오랫동안 원로원에서 최고의원 자리를 맡고 있어 로마 정치계에서 매우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와 같은 시대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그의 고갯짓에 따라 전 세계가 다스려졌다’고 평가했다.
스카우루스가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돈은 정당하게 번 게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은 물론 다른 속주 주민을 착취한 혐의로 BC 92년 고소당하기도 했다. 같은 시대 로마 역사학자 살루스티우스는 스카우루스를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삼두정치를 펼쳤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도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갖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당시 로마 최고의 갑부였다. 1~2세기 그리스 출신 로마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크라수스의 재산을 7천100탈렌트라고 추정했다. 1탈렌트가 금 34㎏이니 7천100탈렌트는 무려 24만㎏에 이른다. 단순가치로 환산하면 오늘날 200억 달러(24조~25조 원) 정도다. 당시 법에 따르면 집의 기둥 높이는 3.6m에 총 여섯 개를 넘지 못하게 돼 있었다. 하지만 법의 한도를 넘은 그의 집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치는 이미 일반적으로 퍼진 사회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의 집은 점점 더 화려해졌다. BC 78년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누미디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집의 문턱을 장식했다. 당시에는 로마에서 유일했지만 이후 아프리카, 그리스 대리석 수입 바람이 부는 바람에 불과 30년 뒤에는 더 화려한 대리석으로 꾸민 집이 수백 채를 넘을 정도였다. BC 56년 법무관이었던 마르쿠스 스카우루스는 저택에 높이 11m를 넘는 아프리카산 검은색 대리석 기둥을 수십 개 세워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 최고 철학자였던 키케로도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구했다. 로마 남쪽 100㎞ 지점에 있는 시골마을 아르피눔 출신이라는 사실을 늘 가슴아파했던 그는 로마 상류사회의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구해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키케로는 집정관을 지낸 이듬해인 BC 62년 35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고 크라수스로부터 팔라티노 언덕의 집을 구매했다. 그는 집을 사기 위해 동료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로부터 돈을 빌렸다. 키케로는 돈을 벌기에 좋은 곳으로 소문난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자리를 히브리다에게 넘겨주는 대신 마케도니아에서 버는 돈을 나눠 갖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기가 막히는 사실은 그가 돈을 빌리면서 담보로 잡힌 게 이 약속이었다는 점이다.
팔라티노 언덕이 원로원 의원 등 로마 정치 지도자들의 최고급주택지로 큰 인기를 누렸던 전성기는 BC 1세기 무렵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로마의 1인자 자리를 놓고 맞대결을 벌였던 때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제국의 미래를 놓고 겨뤘던 시기를 거쳐 옥타비아누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제정 로마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올라 아우구스투스가 될 때까지였다.
많은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의 멸망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든다. 그 중에서도 공화정 초기까지만 해도 원로원에 넘쳐났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상무 정신이 공화정 중기부터 사라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원로원은 해외 속국과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부의 양에 비례해 점점 퇴폐하고 부패해졌고, 과거 조상들처럼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기를 점점 꺼리게 됐다. 로마 제국의 국경은 갈리아, 게르만 용병이 지켰고, 그들을 이끈 사령관은 원로원 의원 대신 속주 출신으로 채워졌다. 팔라티노 언덕의 고급주택은 최고 전성기에 이미 몰락을 시작한 로마의 어두운 뒷모습이었고, 원로원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왕이 되려 한다’고 몰아붙여 암살하면서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제정 시대 들어 팔라티노 언덕에 여러 궁전이 연이어 들어서는 바람에 공화정 시대 귀족 저택은 대부분 철거됐다. 이후에도 언덕의 주거환경이 크게 변하는 바람에 초기 왕정 및 공화정 시대에 만들어졌던 신전, 주거지, 도로 등은 사라져 버렸다. 지금 어디가 어디였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무스 아우구스티
영어로 궁전을 팰리스(Palace)라고 한다. 단어의 어원은 팔라티노 언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나왔다. 카시우스 디오가 쓴 『로마사』에 그 내용이 나온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내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원로원은 그의 집 앞에 월계수 나무를 심고 정문 위에는 참나무 관을 걸어둘 수 있도록 의결했다. 그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산 적이 있었고, 그 집터가 과거 로물루스의 집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을 팔라티움이라고 불렀다. 이후 로마 황제가 어디서 살더라도 그의 집을 팔라티움이라고 부르게 됐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팔라티움이라는 단어는 유럽과 동방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고대 유럽인에게 영웅 이상의 존재였던 카이사르의 이야기가 얽혀 있고 역대 황제가 살았던 곳과 연관돼 있어 유럽인은 이 단어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했다. 팔라티움은 스페인에서는 팔라시오, 독일에서는 팔라스트, 프랑스에서는 팔레, 이탈리아에서는 팔라조, 영어로는 팰리스로 변해 왕이나 황제가 사는 궁전을 의미하게 됐다.
왕정 시대에 신전, 공화정 시대에 귀족의 주거단지였던 팔라티노 언덕은 제정 시대에 접어들면서 황제 전용 주거지역으로 바뀌었다. 로마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데다 로마인들의 생활 근거지인 포로 로마노, 종교 중심지인 카피톨리노 언덕과 가까운 이곳을 절대권력자인 황제가 독차지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팔라티노 언덕에 단 한 차례만 황궁이 지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든 황제가 다 궁전을 건설했던 것도 아니었다. 황궁을 건설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네로, 도미티아누스 등 4명에 불과했다. 다른 황제들은 이전에 만들었던 궁전을 개·보수하거나 증축해서 사는 데 만족했다.
팔라티노 언덕에 황궁 건설의 역사를 연 사람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그에게 이곳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볼스키 족 도시인 벨레트리이의 부자 기사계급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누나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집에서 태어났고 젖먹이 시절을 보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뒤에는 포로 로마노에 있던 저택에서 살았다. 시인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소유하고 있던 집이었다고 하니 아주 큰 집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로마의 1인자가 된 뒤 팔라티노 언덕으로 집을 옮겼다. 공화정 시대 호민관이었던 호르텐시우스의 집과 BC 102년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집을 사들여 수리한 뒤 들어가 살았다. 이 저택이 팔라티노 언덕에 최초로 탄생한 황궁 도무스 아우구스티(아우구스투스의 집)였다.
지금 팔라티노 언덕에 가면 서쪽 끝 부분에 다 부서진 기둥 몇 개가 보인다. 언덕 아래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멀리 오른쪽으로는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이 보인다. 이곳이 고대 로마 시대에 도무스 아우구스티가 서 있던 곳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을 새 궁전 부지로 고른 것은 단순히 전망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족의 내력을 고민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으니 핏줄로 보아 부끄러울 게 없었다. 그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선정된 것은 어머니의 혈통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시골마을에서 올라온 ‘호모 노부스(신참)’여서 로마에서 명함을 내밀 처지조차 되지 못했다. 그는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도무스 아우구스티를 건설한 곳은 헤라클레스와 카쿠스의 신화가 서린 장소였다. 헤라클레스가 그의 소를 훔쳐간 식인도둑인 카쿠스를 몽둥이로 때려죽인 곳이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테베레 강은 굽어 있는데, 늑대 루파가 바구니에 담긴 로물루스 형제를 건져 올려 젖을 물린 곳이었다.
궁전 인근에는 로마인이 숭앙하던 위대한 ‘어머니 여신’인 마그나 마테르의 신상을 모신 신전과 조점관이 새 점을 치던 장소인 아우구라토리움이 있었다. 마그나 마테르는 원래 그리스의 여신 키벨레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한니발에게 연패하던 로마가 시빌 예언서와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구한 뒤 들여 온 신이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지만 여신의 신상이 온 이후 로마는 한니발을 무찌르고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로마인들이 마그나 마테르를 엄청나게 숭상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헤라클레스와 로물루스의 신화가 얽힌 곳을 내려다볼 수 있고, 로마인들이 숭배하는 두 신전이 있는 곳에 살게 되면 신화, 신전의 권위를 앞세워 부족한 가문의 내력을 덮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도무스 아우구스티는 처음에는 소박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성격에 걸맞게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았다. 몇몇 역사학자는 도무스 아우구스티를 ‘작은 사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구도 소박해서 일개 시민의 집보다도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팔라티노 언덕의 집으로 이사를 갈 때 만들었던 침대를 버리지 않고 40년 동안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승리해 황제가 된 뒤 그의 마음은 조금씩 바뀌었다. 주변에 있던 귀족 저택을 하나씩 사들여 도무스 아우구스티를 제법 깔끔하고 멋있는 궁전으로 확장했다. 그는 이 궁전을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시설이라고 선언하는 쇼를 벌이기도 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이래 500년 만에 다시 왕의 지배를 받게 된 로마 시민의 걱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무스 아우구스티는 서기 3년 화재로 붕괴된 적이 있었다. 이때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황제에게 집을 새로 지으라면서 의연금을 보냈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속주와 식민도시에서도 성금이 답지했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황제는 1인당 (은화)1데나리우스 이상은 받지 않았다’고 적었다. 의연금 총액이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1명이 1데나리우스만 보냈다고 해도 총액이 엄청났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아무리 만류했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 왕이나 속주의 지도자가 황제에게 1데나리우스만 보냈을까?
아우구스투스는 인근에 ‘도무스 리비아’(리비아의 집)라는 집을 별도로 지어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선물했다. 한집에서 같이 사는 부인에게 별도의 집을 지어준 것은 이상해 보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가 되기 전 앙숙이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군사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첫 부인인 풀크라와 이혼하고 폼페이우스 부인의 사촌인 스크리보니아와 정략결혼을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아우구스투스가 반대파였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부인인 리비아를 짝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다섯 살 된 큰아들 티베리우스를 키우고 있었고, 둘째 아들 드루수스를 임신하고 있었다. 사랑에 눈이 먼 그는 네로를 불러 부인과 이혼하라고 요구했다.
로마에서 부부의 이혼과 재혼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임신 중인 부부를 협박해 이혼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드물었다. 네로는 협박에 굴복해 부인과 이혼했다. 강제로 이뤄진 결혼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금술은 매우 좋았다. 부부는 51년 동안 해로했다. 리비아는 황제인 새 남편을 보필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전 남편을 버리고 새 남편에게 헌신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을 부인을 위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하라고 단출한 저택을 선물했다. 그것이 도무스 리비아였다.
도무스 티베리아나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을 바라보는 팔라티노 언덕 북서쪽에 궁전을 지었다. 새 궁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도무스 티베리아나(티베리우스의 집)라고 불렀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푸블리우스 타키투스의 『역사』 등에 이 궁전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 네로 황제가 죽고 후임으로 즉위한 갈바 황제가 여기서 암살당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궁전을 언제, 어떤 규모로 지었는지를 다룬 기록은 없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궁전을 놔두고 왜 새로 저택을 지었을까? 그는 긴축재정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어서 새 건물을 거의 짓지 않았는데, 왜 사저는 새로 건설한 것일까?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조금이라도 그 사정을 수긍할 수 있다.
티베리우스는 부모의 이혼 이후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6년 뒤 한 많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포로 로마노의 로스트라에서 눈물을 삼키며 추도사를 읽었다. 이후 두 형제는 아우구스투스의 궁전에서 어머니 리비아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드루수스는 겨우 다섯 살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열한 살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을 평생 가슴에 담을 수 있는 나이였다. 네로는 어린 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기록이 없으니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가슴에 깊은 한을 새기기에 충분한 내용을 거듭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티베리우스도 아버지를 딱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나중에 성년식을 치를 때 검투사 경기를 두 차례 개최한 사실은 이런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한번은 아버지 네로를 위해 포로 로마노에서, 다른 한번은 할아버지 드루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원형경기장에서 거행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다 붙임성이 좋았던 드루수스와는 친하게 지냈다. 반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표정이 늘 어두웠던 티베리우스와는 서먹했다. 그는 죽기 직전 할 수 없이 후계자로 지명하기는 했지만 평생 티베리우스를 믿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라는 책에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티베리우스의 잔혹한 성품을 비난했다. (중략) 그가 들어오면 입을 다물었다는 풍설이 있을 정도였다’라고 적기도 했다.
티베리우스에게는 평생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 첫 부인이었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였다. 그녀에게서 동생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드루수스라는 아들도 낳았다. 부모의 강제이혼이라는 비극을 지켜본 그는 죽을 때까지 아내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런 행복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빕사니아와 이혼한 뒤 남편 아그리파와 사별한 외동딸 율리아와 재혼하라고 강요했다. 티베리우스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가는 빕사니아도 무사하기 어려웠다. 티베리우스는 이혼한 뒤 빕사니아를 우연히 로마 시내의 거리에서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냥 지나갔다. 그는 사랑했던 옛 아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티베리우스가 도무스 티베리아나를 만든 것은 친아버지를 외로움과 수치에 떨다 죽게 만들었고, 그의 사랑마저 망친 아우구스투스가 살았던 저택에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지은 도무스 티베리아나의 흔적은 지금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의 후임 황제였던 칼리굴라가 증축한 흔적은 포로 로마노의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근처에 조금 남아 있다. 길이 26m, 폭 9m의 열주회랑이 바로 그곳이다.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현대인이 팔라티노 언덕의 궁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황제는 네로다. 60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때 궁전에서 리라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오해도 적지 않다.
티베리우스도 그랬지만 네로도 불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욕심 때문에 어릴 때부터 큰 압박을 받았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위해 재혼한 남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독살했다. 네로는 그때 열여섯 살이었으니 어머니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네로는 즉위 이후에도 어머니의 등쌀에 시달렸다. 견디다 못해 스승 세네카와 상의한 끝에 어머니를 황궁에서 내쫓았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어머니를 암살했다. 이후에는 반역 혐의를 뒤집어씌워 스승도 자살하게 만들었다. 네로의 정신세계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로는 선황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당한 궁전에서 사는 것이 불편했다. 게다가 곳곳에는 어머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새 궁전을 짓기로 했다. 그것이 도무스 티베리아나를 기반으로 한 도무스 트란시토리아였다. 정확한 완공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0년으로 추정된다. 어머니를 궁에서 쫓아낸 게 55년이었고 살해한 게 59년이었으니, 그 다음해에 도무스 트란시토리아에 들어간 셈이다.
1~2세기 로마 역사가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자문이었던 가이우스 킬니우스 마이케나스가 에스퀼리노 언덕에 만든 마이케나스 정원과 새 궁전을 연결시켰다. 마이케나스 정원은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에 등장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네로는 (마이케나스 정원의)마이케나스 탑에서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다’라고 그 장면을 기록했다. 이 글 한 줄 때문에 여러 영화와 소설에 네로가 미친 황제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네로가 화재로 피해를 입은 로마 시민을 위해 실시한 대책을 보면 수에토니우스의 글은 지나친 폄훼라고 지적한다.
어쨌든 네로는 당대에는 물론 이후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대화재로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도 피해를 입자 이번에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 콜로세움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황금궁전이 완공되기 전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로마에서 달아나다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도무스 트란시토리아의 흔적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17세기 발굴조사에서 찾아낸 곳이다. 당시 발굴조사가 엉터리로 진행돼 훼손이 매우 심했다. 이곳은 외부인에게 공개되지 않다 2019년부터 개방돼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도무스 도미티아나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면 과거의 영광은 전혀 보이지 않고 폐허로 변한 궁전만 넓게 펼쳐져 있다. 제대로 된 모습은 볼 수 없고 곳곳에 기둥과 벽이 조금씩 남아 있는 게 전부다. 지금 이곳에 가면 관람할 수 있는 유적은 베스파시아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가 신축한 도무스 도미티아나, 그리고 총독으로 근무하다 내전을 극복하고 권좌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덧붙인 도무스 세베리아나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 아들이었던 도미티아누스는 어릴 때 유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큰아들 티투스만 데리고 전쟁터를 돌아다닌 탓에 그는 로마에서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았다. 10대 초반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중에는 백부 사비누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영민하고 지적으로 뛰어났다. 공부를 많이 한데다 웅변술도 빼어나 로마,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의 멋진 시구를 어렵잖게 인용했다. 형처럼 군 경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활을 잘 쐈고 여러 가지 무기도 잘 다뤘다.
도미티아누스는 늘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 군에 들어가 동방에서 유대 반란을 진압하면서 큰 성과를 올렸지만 그는 로마에서 공부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황제로 즉위한 뒤 형이 공동통치자가 돼 경력을 쌓는 동안 그는 형식적 직위에 머물렀다. 그런데 아버지에 이어 황제가 된 형이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도미티아누스는 졸지에 황제가 됐다. 일부 역사학자는 그가 형을 암살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와 형은 평생을 군에서만 보냈다. 게다가 로마 출신이 아닌 호모 노부스(신참)라는 열등감도 갖고 있었다. 감히 새 궁전을 지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시민의 호감을 사기 위해 콜로세움을 건설하는 게 고작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달랐다. 아버지와 형이 황제였던 경우는 로마 제정에서 그가 유일무이했다. 그가 즉위할 때쯤 베스파시아누스 가문은 로마 최고의 명문 집안이었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형이 가진 열등감은 없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두 사람과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로마는 내전 후유증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번영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도미티아누스가 네로의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를 넘어서는 엄청난 궁전을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지나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인 중에서 그를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81~92년 11년 동안의 공사를 거쳐 완성한 도무스 도미티아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새 궁전 건축을 당시 최고 건축가였던 라비리우스에게 맡겼다. 그는 팔라티노 언덕의 궁전뿐만 아니라 알바에 지은 빌라 도미티아나, 그리고 오늘날 포로 로마노 입구에 우뚝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도 라비리우스에게 만들게 했다.
불에 탄 네로의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위에 지었던 도무스 도미티아나는 지금 편의상 세 구역으로 나뉜다. 도무스 플라비아, 도무스 아우구스타나, 그리고 스타디움이다. 그나마 제대로 된 모습이 남아 있는 스타디움은 길이 160m 정도여서 전차경기를 열기에는 조금 규모가 작다. 역사학자들은 이곳을 경마장 또는 승마장이었거나 궁전의 내부 정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2세기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궁전 옆에 도무스 세베리아나를 덧붙였다. 도무스 도미티아나와 도무스 세베리아나를 끝으로 팔라티노 언덕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이후 이어진 오현제 시대에 등장한 다섯 황제는 성격이나 시대 상황 때문에 궁전을 지을 생각은 물론 여력도 없었다.
네르바는 등극 이후 1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첫 에스파냐 속주 출신 황제였던 트라야누스는 호모 노부스였던 만큼 감히 궁전을 신축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해외 순방으로 보낸 탓에,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성격상 새 궁전에 관심이 없었다. 그 이후 황제들은 기울어가는 제국을 살리느라 바빴기 때문에 팔라티노 언덕에 눈길을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제국과 함께 몰락한 언덕
3세기 중엽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했을 때부터 팔라티노 언덕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황제들은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을 맞아 싸우느라 궁전에 들어가 침대에 등을 댈 여유는커녕 로마로 돌아올 시간조차 없었다. 사두정치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팔라티노 언덕은 본격적으로 몰락했다. 이곳의 궁전은 야만족의 침입을 피해 이탈리아 동부 해안도시인 라벤나에 숨어 살았던 4~5세기의 황제들이 로마에 갔을 때 하룻밤을 보내는 곳으로 전락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 우대정책을 폈던 4세기 중엽 이후 언덕 주변에는 교회가 차례로 들어섰다. 늑대 동굴 루페르칼 근처에는 성 아나스타시아 교회가 만들어졌다. 성 세바스티아노 교회, 성 보나벤투라 교회 등도 연이어 만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언덕 중심부는 여러 차례 지진으로 무너져 교황 레오 4세(재임 847~855년) 시대에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됐다. 궁전 등의 건물이 폐허가 된 것은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중세시대에 고대 로마를 다룬 책이 여러 권 발간됐지만 팔라티노 언덕을 언급한 내용은 거의 없다. 이 시대에는 팔라티노 언덕은 아무도 찾지 않는 유령의 땅에 불과했다
팔라티노 언덕이 로마인의 시야에 다시 들어온 것은 15세기에 교황이 아비뇽 유수에서 돌아온 이후였다. 로마가 다시 번성하면서 살기 좋은 땅을 찾게 된 교회 사제와 귀족은 팔라티노 언덕에 눈을 돌렸다. 16세기 무렵에는 정원을 갖춘 화려한 저택이 연이어 건설됐고, 일부 땅은 포도밭으로 이용됐다. 당시 로마인들은 이곳을 ‘대궁전’이라는 뜻인 ‘팔라조 마조레’라고 불렀다.
팔라티노 언덕을 가장 먼저 선호한 사람은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의 손자였던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스였다. 속세의 이름이 할아버지와 같았던 그는 겨우 열네 살에 부제 추기경이 됐고, 파르마 교구 행정관으로 임명받아 월급까지 받았다. 이후에도 할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권력과 부를 거머쥔 사람이 평범한 시민과 떨어져 전망 좋은 곳에서 화려한 생활을 즐기려고 한 것은 고대 로마나 16세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언덕 북쪽 지역 절반을 사들여 유럽 최초의 식물원을 만들었다. 티베리우스 궁전 잔해를 수습해 여름 별장도 건설했다. 지금도 언덕에는 그가 만든 식물원과 별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망각의 깊은 땅 속에 묻혀 있던 팔라티노 언덕은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도무스 도미티아나는 1728년, 1860년 발굴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2006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출생지로 보이는 집을 발굴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해야 할 곳은 많고 갈 길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