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티노 언덕(1)

천년제국, 첫 걸음을 내딛다

by leo


2000여 년 전이던 BC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을 둘러보던 청년이 있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라는 역사학자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 있던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었다. 지금은 터키의 보드룸으로 국적과 이름이 바뀐 곳이다. BC 5세기의 유명한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도 이곳 출신이었다.


디오니시오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에서 매우 흔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그를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라고 불렀다. 그는 젊었을 때 로마로 건너가 22년 동안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라틴어를 배웠다. 또 로마 곳곳을 돌아다니며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거나 각종 책을 수집하거나 많은 역사학자를 만났다. 그는 이렇게 해서 모은 자료로 『로마사』라는 역사책을 썼다. 그가 주목받는 것은 다른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장면을 이 책에 소개했기 때문이다.



‘로마를 건국하는 데 아무런 장벽도 남지 않게 됐다. 로물루스는 먼저 신에게 경배한 뒤 하루 날을 정해 팔라티노 언덕에서 의례를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희생제와 시민들을 격려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자 예정된 날이 밝았다. 그는 먼저 앞장서 신에게 희생물을 바쳤다. 다른 사람에게도 형편에 맞춰 희생물을 바치게 했다. 이어 신의 조짐을 살폈는데 아주 좋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천막 앞에 불을 피우게 한 뒤 불꽃 위를 뛰어넘으라고 했다. 몸을 청결하게 씻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라는 것이었다.


신에게 바치는 모든 의례를 다 마쳤다고 판단한 로물루스는 사람들을 미리 지정한 장소로 데리고 가 언덕의 직사각형 크기를 설명했다. 이어 암소 한 마리와 수소 한 마리에게 멍에를 씌워 쟁기를 끌게 해 연속으로 이어지는 고랑을 팠다. 성벽을 세울 때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로마 인에게는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고 할 때 쟁기로 고랑을 파는 관습이 생겼다. 로물루스는 고랑을 다 판 뒤 암소와 수소를 잡아 신에게 바쳤다. 똑같은 절차로 진행한 의례에서 다른 여러 희생물도 바친 뒤 사람들에게 일하러 가자고 했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이날이 되면 파릴리아라고 부르는 가장 성대한 축제를 열고 있다. 이날은 봄의 시작과 함께 오게 되는데, 농부와 목동은 풍년과 가축의 증가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신에게 희생물을 바친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책에 묘사한 내용은 BC 753년 4월 21일 로물루스가 거행한 로마 건국 의례였다.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나라를 세우는 기념식이 열리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현장을 직접 지켜보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생생한 설명이다. 이날 로마의 건국 의례가 벌어진 장소는 팔라티노 언덕이었다. 이곳은 이후 카피톨리노 언덕과 함께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로마시대에 팔라티노 언덕은 전망이 좋았다. 이곳에서는 로마의 어지간한 곳을 다 볼 수 있었다. 언덕 아래로는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그 너머로는 나지막한 아벤티노 언덕이 보였다. 지금은 여러 건물에 거의 가려져 있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테레베 강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정 시대에는 신이 살던 신전이 모여 있었고,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 의원 등 기득권 세력이 모여 살았다. 제정 시대에는 여러 황제가 궁전을 지었고, 마지막으로 로마가 망한 뒤 중세에는 교회 관계자나 귀족이 대저택을 건설해 거주했다.


디오니시오스는 팔라티노 언덕을 수시로 둘러보면서 로물루스와 로마인들은 과연 누구였으며, 왜 하필 팔라티노 언덕에 정착했는지 이유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로마인들이 나라를 세운 뒤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도 살펴보았다. 언덕에 담긴 많은 전설과 신화는 물론 여러 영웅의 이야기도 찾아보았다. 그가 확인해보려고 노력했던 팔라티노 언덕의 스토리는 지금은 모두 깊은 흙 속에 파묻혀 버렸다. 과거의 흔적은 바람에 실려 옅은 먼지처럼 날릴 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팔라티노 언덕에서 무엇을 본 것인지 디오니시오스의 발걸음을 한 번 따라가 봐야겠다.


최초의 정착자


팔라티노 언덕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로마가 건국되기 400년 전, 트로이 전쟁이 발생하기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아르카디아의 도시 팔란티움에서 한 무리의 그리스인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헤르메스 신과 님프 테미스의 아들이라는 에반드로스가 그들을 이끈 지도자였다. 에반드로스 일행이 이탈리아로 이주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팔란티움에서 정변이 발생했는데, 에반드로스와 그의 지지 세력은 패배의 쓴맛을 보고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의 무리는 이오니아 해와 티레니아 해를 거쳐 라티움(라틴) 지방에 도착했다.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하니 총 인원은 100~200여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라티움은 매우 풍요로운 땅이었다. 알바에 화산이 있어 BC 10세기까지도 활동을 계속했다. 여기서 나온 화산재는 물론 테베레 강에서 흘러온 충적토가 오랫동안 쌓인 덕분에 땅은 매우 비옥했다. 목초지가 많아 가축을 풀어놓고 키우기도 좋았고, 곳곳에 울창한 삼림이 있어 목재를 구하기도 쉬웠다.


라티움에는 오래전 아르카디아에서 건너간 그리스 부족이 살고 있었다. 지도자는 마르스 신의 후손이라는 파우누스였다. 아주 열정이 넘치면서도 사려 깊은 사나이였다. 그는 먼저 이주해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뒤를 따라온 그리스인들을 모두 받아들여 원하는 곳에서 살게 했다. 다들 고향에서 살기 힘들어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에반드로스는 곳곳을 둘러본 뒤 테베레 강 인근에 있는 땅을 골랐다. 강이 있어 물을 구하기 좋았고, 언덕이어서 안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는 일행과 힘을 합쳐 언덕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을 만들었다. 그는 그리스 고향 도시의 이름을 붙여 언덕을 팔란티움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떤 사람은 에반드로스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전설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누구의 말이 맞든 에반드로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살기 시작한 사람에 대한 첫 스토리다. 그의 이야기는 여러 고대 역사학자의 책에 등장한다. BC 1세기~서기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지리』라는 책에서 ‘로물루스보다 더 오래 됐고 우화 같은 다른 이야기가 있다. 로마는 에반드로스가 세운 아르카디아 식민지였다는 것’이라고 적었다. 스트라보와 같은 시기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는 ‘에반드로스는 그리스 아르카디아의 팔란티움 출신이어서 이탈리아에 새로 세운 도시에 팔란티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했다. 1세기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도 그가 등장한다.


아르카디아에서 건너간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문자는 물론 리라, 트리곤, 플루트 같은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을 이탈리아에 처음 전파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보다 먼저 가 있던 사람들은 목동의 피리 말고는 어떤 악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 법을 제정하고, 인간의 삶의 양식을 당시 횡행하던 짐승 같은 것에서 문명사회의 방식으로 바꾸었으며, 예술과 전문적 직업은 물론 공공에 이익이 되는 여러 가지 제도를 도입했다.


에반드로스가 누구였는가를 놓고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디오니시오스처럼 ‘그리스에서 건너온 이주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그리스인과 그곳에 만들어진 그리스 식민도시, 그리고 로마에 전파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상징하는 가상적인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로마에 알파벳과 예술을 전파하고, 그리스 식민도시 쿠마이에서 그리스 신을 도입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어떤 사람은 ‘에반드로스는 아르카디아 지역의 작은 신이었는데 나중에 로마가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알바롱가의 쌍둥이


에반드로스에서 시작한 팔라티노 언덕의 이야기는 알바롱가의 쌍둥이 왕자 로물루스와 레무스로 이어진다. 알바롱가는 트로이가 그리스연합군에게 멸망하기 직전 일부 백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달아난 왕자 아이네아스의 후손이 세운 도시였다.


알바롱가가 건국되고 300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23년간 나라를 다스리던 프로카 왕이 그만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라의 법대로라면 장남인 누미토르가 왕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었던 아물리우스는 폭력을 써서 형을 제압하고 왕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또 후환을 없애기 위해 형의 아들을 살해하고, 형의 딸 레아 실비아는 신성한 불을 모시는 여사제인 베스탈로 만들었다. 베스탈은 결혼을 할 수 없어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게 종교적 규칙이었다.


4년 뒤 실비아는 마르스 신전에 바칠 물을 뜨러 신전 근처 연못에 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실비아를 건드린 존재는 바로 마르스 신이었다. 위대한 영웅이 될 아기를 낳는 게 신들이 그녀에게 점지해준 운명이었던 것이다. 곧바로 임신한 그녀는 이듬 해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다.


소식을 들은 아물리우스는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를 불씨를 미리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법에 따르면 남자를 알게 된 베스탈은 작대기로 두들겨 팬 뒤 사형시키고, 아기는 강물에 던져버려야 했다. 아물리우스는 절차에 따라 원로원 의결을 거쳐 실비아의 처벌을 확정지었다.


아물리우스는 시종에게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알바롱가에서 5㎞ 정도 떨어진 테베레 강에 데려가서 버리라고 지시했다. 시종이 버린 바구니는 강을 따라 떠내려가다 팔라티노 언덕 바로 아래에 S자 모양으로 굽이치는 곳에서 돌에 걸려 뒤집히고 말았다.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동굴 루페르칼에서 살던 암늑대 루파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막 새끼를 낳아 젖이 불어 있던 루파는 쌍둥이를 건져 올려 자기의 새끼처럼 품에 안고 젖을 먹였다. 혀로는 쌍둥이의 몸에 묻은 진흙을 모두 닦아주었다. 쌍둥이는 늑대를 엄마처럼 여기며 꼭 매달려 있었다. 늑대는 마르스 신을 상징하는 동물 중 하나였다.


니콜라스 미그나르드 '로물루스와 레무스' at 댈러스 미술관


멀리서 목동들이 가축을 몰고 목초지로 가고 있었다. 누미토르의 가축을 기르던 목동 파우스툴루스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쌍둥이를 돌보는 늑대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됐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말도 못할 정도였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늑대에게 다가갔다. 늑대는 놀라 달아나기는커녕 마치 길들인 개처럼 천천히 쌍둥이에게서 떨어지더니 언덕으로 다시 올라갔다.


늑대가 사라지자 파우스툴루스는 쌍둥이를 들어올렸다. 그는 신이 두 아기를 살렸다고 생각하면서 집에 데려가 키우기로 작정했다. 마침 그의 아내 라우렌티나는 막 출산했는데 안타깝게도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어 슬퍼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쌍둥이를 건네주면서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일부 역사학자는 늑대 루파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한다. 버려진 두 아기를 처음부터 돌보고 젖을 먹인 것은 암늑대가 아니라 파우스툴루스의 아내인 라우렌티나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 매춘부로 일하다 결혼했는데 과거에는 ‘매춘을 하는 여성’을 루파로 불렀다고 한다.


영웅의 면모를 타고난 쌍둥이는 부부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무럭무럭 자라 주변 젊은 목동들의 우두머리가 됐다. 우연히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형제는 알바롱가로 쳐들어가 아물리우스를 몰아내고 할아버지 누미토르를 권좌에 복귀시켰다.


누미토르는 두 손자에게 다른 도시를 건설해 독립적으로 통치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형제는 할아버지로부터 나눠받은 백성들을 데리고 알바롱가를 떠나 팔라티노 언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를 잡은 두 형제는 다투기 시작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에 나라를 세우자고 한 게 표면적인 갈등의 원인이었다. 사실 언덕을 어디로 고르느냐는 것은 대립의 핵심이 아니었다. 도시의 이름을 어떻게 정하고, 둘 중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지가 걸린 문제였다. 양보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은 할아버지에게 해결책을 부탁하기로 하고 함께 알바롱가로 갔다. 두 손자의 다툼을 걱정한 누미토르는 조점을 통해 결론을 내라고 조언했다. ‘더 우호적인 새를 누가 먼저 많이 보는지’에 따라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쌍둥이는 할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둘은 약속한 날 각자 고른 언덕으로 올라갔다. 레무스가 간 아벤티노 언덕 위로 독수리 여섯 마리가 먼저 날아올랐다. 로물루스는 당황했다. 이대로라면 질 판이었다. 레무스가 승리를 주장하면서 달려왔을 때 독수리 열두 마리가 갑자기 팔라티노 언덕 위로 날아올랐다. 쌍둥이는 서로 승자라고 우겼다. 레무스는 독수리를 먼저 봤으니 이긴 거라고 주장했다. 로물루스는 더 많이 봤으니 승자라고 반박했다.


형제의 갈등은 해소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커지기만 했다. 결국 두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편을 갈라 무기를 들고 싸움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양측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과정에서 레무스도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주민은 겨우 3천 명에 불과했다.


동생을 죽이고 1인자가 된 로물루스는 BC 753년 4월 21일 팔라티노 언덕에 나라를 건국했다. 로마인은 오래전부터 건국 날짜를 4월 21일이라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이어져 온 건국 기념행사인 파릴리아 축제 개막일이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건국 연도는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런 내용을 담은 각종 역사 자료는 BC 390년 갈리아족의 로마 점령 때 대부분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로마 역사학자들은 저마다 건국 연도를 다르게 보았다. BC 3~4세기 그리스 역사학자 티마이우스는 로마 건국 연도를 BC 813년으로 추정했다. BC 3세기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고 연대기학자인 루키우스 킨키우스는 BC 728년, 같은 시대 역사학자였으며 원로원 의원이었던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는 BC 747년, BC 2~3세기 정치인이었던 대 카토는 트로이전쟁이 끝나고 432년 후라고 했는데 BC 751년 무렵이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BC 750년을 로마 건국연도로 추정했다.


건국 연도를 BC 753년으로 추정한 사람은 BC 1~2세기 로마의 은행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였던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였다. 나중에 문법학자인 켄소리우스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널리 퍼뜨린 덕분에 BC 753년은 건국 연도로 굳어졌다.


로물루스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실제 존재했던 인물인지, 정말 알바롱가의 후손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가 누구였는지와 관련해서 다른 주장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중에서는 그를 아이네아스의 네 아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고, 아이네아스를 따라 트로이에서 탈출한 로미라는 여인이 당시 원주민의 왕과 결혼해서 낳은 세 아들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20세기 미국 역사학자 테니 프랑크는 로물루스의 출신지를 알바롱가가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의 강력한 부족인 에트루리아라고 추정했다. 로물루스가 이끈 에트루리아 이주 세력이 원주민을 누르고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건국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9세기 독일 출신 역사학자인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사』에서 ‘로물루스의 영도 아래 일부 사람이 도망쳐 로마를 건설했다는 신화는 불리한 장소(팔라티노 언덕)에 로마가 생긴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라티움의 거대도시와 연결하려는 소박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그들은 왜 언덕에 올라갔을까?


로물루스가 나라를 세운 팔라티노 언덕은 대체로 사각형이어서 후대에는 ‘사각의 로마’라고 불렸다. 둘레는 2㎞에 이른다. 최고 높이는 43m, 면적은 50만㎡ 정도였다. 언덕에는 꼭대기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팔라티노, 다른 하나는 케르말루스 고지라고 불렀다.


팔라티노 언덕은 다른 라티움 도시들과 비교할 때 좁았다. 경작지도 넓지 않았다. 수질이 깨끗하지 못한 테베레 강을 빼고는 물도 부족했다. 강은 자주 범람해 언덕 아래 포로 포로마를 덮쳤다. 그래서 다른 부족은 이곳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에반드로스 일행 또는 로물루스 무리는 왜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에반드로스의 경우 초기 정착민 수가 적었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 자리를 잡아도 먹고 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언덕 아래 마르스 평원과 포룸 보아리움에 너른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원래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이었던 그들로서는 목축을 하는 데에 매우 유리했다.


팔라티노 언덕은 농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불리하지만 방어라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굉장히 유리한 지역이다. 이곳은 로마 건국 당시에는 꽤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로마 멸망 이후 붕괴된 각종 건축물이 쌓이고 또 쌓이는 바람에 주변 지역이 솟아올라 지금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을 뿐이다. 공성무기가 없었던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높은 언덕은 안전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언덕 아래에는 습지인 포로 로마노가 있어 외적의 공격을 막는 데에 적지 않은 힘이 됐다. 케르말루스 고지와 그 앞의 벨리아 고지를 통해 다른 언덕으로 쉽게 오갈 수 있게 연결돼 있었다. 필요할 경우 도망칠 수 있는 훌륭한 탈출로도 있었던 셈이다.


여러 역사학자의 기록과 각종 상황을 종합해 초창기 로마인이 누구였는지를 분석해보면 공통점이 나온다. 바로 떠나온 사람, 도망들 다닌 사람, 추방을 당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알바롱가의 후손이라는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실제로는 평범하게 이주한 무리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몸젠은 『로마사』에서 ‘로마가 자리 잡은 지역은 위생, 농업 생산 등에서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절박함 같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그곳에 정착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초창기 로마인은)대부분 도망자나 피신자로 구성된 방랑자의 오합지졸이었다’라며 직설적으로 퍼부었다.


로물루스 일행이 리비우스 등의 기록대로 도망자, 추방자 들이었다면 초기 정착민의 뒤를 이어 팔라티노 언덕에 눌러앉은 이유는 충분히 설명된다. 그들은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었을지 모른다. 좋은 땅을 골라 갈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지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테베레 강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강 건너편에는 로마보다 역사가 길고 경제적, 군사적으로 더 강력한 여러 에트루리아 도시가 있었다. 이들이 강을 건너 쳐들어와도 언덕에서 미리 확인하고 대비할 수 있었다.


건국 초기 로마인의 생활 기반은 팔라티노 언덕과 그 주변에 국한됐다. 초기에는 언덕 주변에 작은 마을이 하나둘 형성됐고, 허술하지만 나름대로 방벽이 만들어졌다. 방벽은 서로 이어져 언덕을 중심으로 연결돼 있었다. 케르말루스 고지와 벨리아 고지에도 나중에 마을이 생겼다.


팔라티노 언덕에 있었던 각종 구조물을 살펴보면 초기 로마인들의 생활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다. 언덕에는 로물루스의 집이 있었다. 짚과 이엉으로 지붕을 얹은 간단한 오두막이었다. 고대 로마 역사학자들의 저술에 따르면 이 집은 4세기까지 남아 있었지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기에 파괴돼 지금은 잔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현재 언덕 한쪽에 ‘로물루스의 집’이라는 곳이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다.


로물루스 말고는 아무도 언덕에 집을 짓고 살지 않았다. 신전 같은 공공 시설물만 존재했다. 여러 기록을 볼 때 가장 오래된 구조물은 두 개의 물 저장고였다. 바위를 깎고 위에는 벌집 모양 지붕을 씌워서 만든 지름 6m 정도의 시설이었다. 지금은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 언덕에서 살면 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오래 버티기 위해 물 저장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화로도 모아놓았다. 당시에는 불이 매우 중요했다. 불이 꺼지면 각 가정마다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불씨를 보관하는 화로를 한곳에 모아 관리하다 새 불씨가 필요하면 화로에서 가져갔을 것이다.


신화에는 로물루스 형제를 구해준 늑대 루파가 여기서 살았다고 나온다. 후세 사람들은 동굴 과 늑대 신화를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7년 이탈리아 고고학 팀이 팔라티노 언덕을 조사하던 도중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궁전 도무스 아우구스티 밑에서 동굴을 발견했다. 물론 이 동굴이 정말 루파가 살았던 곳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팔라티노에는 다른 건물도 많았다. 공회당인 쿠리아 베테레스, 쿠리아 살리오룸, 쿠리아 아쿨레이아와 작은 사당(사켈룸)인 아카 라렌티아, 볼루피아 등은 물론 아이우스 로쿠티우스 신전, 디아 비리플라카 신전, 페브리스 신전, 피데스 신전, 포르투나 신전, 이우노 소스피타 신전, 루나 녹틸루카 신전, 베누스 신전 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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