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세기 정치인이었던 툴리우스 키케로는 로마 최고의 문필가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책을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지인에게 편지도 많이 보냈다. 발이 넓은 인물이어서 교류 관계도 많아 평생 주고받은 편지는 한두 통이 아니었다. 그의 편지에는 단순한 안부 인사나 개인적 사연만이 아니라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적 내용도 담겨 있어 오늘날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키케로는 어느 날 편안하게 지내는 사이인 한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재미있고 이색적이면서 뜻밖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오늘 거리에서 검투사경기 홍보문을 봤어. 행사 날짜, 장소, 행사 이유, 참가 검투사 수 등이 적혀 있더군. 경기장에 가는 사람에게는 음식, 음료수, 과자는 물론 가끔 경품도 제공한다는구먼. 요새는 검투사의 이름과 격투 스타일은 물론 검투 기록을 담은 책자를 발간하기도 한다더라고.’
키케로가 보낸 편지는 로마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검투사경기(무누스 또는 무네라)를 홍보하기 위해 행사 주최자 무네라토르가 포로 로마노에 붙여놓은 대자보 문구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대자보뿐만 아니라 오늘날 경마장, 경정장, 경륜장에서 베팅을 도와주기 위해 발행하는 말, 기수 안내서나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팅 리포트』 같은 느낌을 주는 검투사 소개서적까지 펴냈다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매일 홍보물, 광고물에 파묻혀 살다시피 하지만 키케로의 편지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100년 전 시대에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로마에 그런 홍보물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로마에서 검투사경기가 얼마나 폭발적 인기를 누렸는지를 짐작케 하는 편지다.
검투사경기를 전문적으로 거행한 곳은 콜로세움이다. 이곳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규모면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고대 로마 건축의 최고 걸작이다. 지은 지 2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튼튼하게 남아 있어 누구나 로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랜드마크가 됐다. 해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400만~500만 명이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꾸로 콜로세움은 세계를 지배하게 된 뒤 정신적으로 점점 황폐해진 로마의 도덕적 퇴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검투사와 동물의 비명을 들으며 환호했던 로마인들의 함성은 불과 100년 뒤에는 무너지는 로마 제국의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비탄으로 바뀌었다. 콜로세움 안에서 그들의 함성과 비명을 들어보도록 하자.
호모 노부스의 위업
‘사람 팔자는 시간문제구나. 인생이란 한 치 앞조차 알 수 없구나.’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았다. 불과 1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근무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황제가 돼 황궁에서 살고 있구나.’
베스파시아누스의 운명이 바뀐 건 네로 황제의 자살 때문이었다. 그가 죽은 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아울루스 비텔리우스가 차례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그들은 모두 내전에서 살해당하거나 자살했다. 덕분에 황제를 전혀 꿈꾸지 않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야말로 덩굴째 호박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동방과 아프리카, 도나우 지역에 파견돼 있던 모든 로마 군단이 지지하고, 원로원이 황제로 추대한 결과였다.
로마 북부 팔라크리네에서 세금 징수원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사람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에서는 아첨을 일삼지만 언제 배신해 등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로마의 전통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지방의 하급 집안에서 태어난 호모 노부스(신참)였기 때문에 귀족으로 가득 찬 원로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게 쉽지 않았다.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금세 누군가 등을 떠밀어 절벽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참 가문이 황제 자리를 대대로 유지하려면 평범한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베스파시아누스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여러 가지 공공사업을 벌였다. 내전 중에 소실된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원했고. 도로를 정비하고 공공건물도 연이어 건설했다. 물론 공사비는 속주 총독 시절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을 팔아 만든 사비로 충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검투사경기나 축제 등에 직접 참여해 평민과 함께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나 바티카누스(바티칸)의 네로 전차경기장에서 열리는 전차경주, 검투사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는 시민들이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장방형이어서 길쭉한 모양이었다. 검투사경기를 거행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구조였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했을 무렵 로마인은 석재로 튼튼하게 만들어 검투사경기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대형 원형극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점을 간파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머리에 떠오른 기억이 하나 더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업이었다. 제정 시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즉위 이후 많은 토목, 건축 공사를 시행했다. 동물사냥 경기를 무척 좋아해서 동물 3천500마리를 한꺼번에 사냥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머리에는 로마 한복판에 초대형 원형극장을 건설하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을 실천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원로원에서 거행한 즉위 인사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유업을 이어받겠다고 선언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도시 한복판에 석재 원형극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로 짓는다는 게 목표였다. 목적은 간단했고, 명분은 확실했다. 시민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황제에 대한 지지도를 높여 정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형극장 건설은 아우구스투스의 오래된 유업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명분은 모든 로마인이 듣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이런 생각은 기록에 남아 있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했다. 평화의 신전, 클라우디우스 신전 건설은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소중히 여겼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계획, 바로 로마 한복판에 원형극장을 짓는 일이었다’고 적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원형극장을 짓기 위한 땅을 찾다 팔라티노 언덕과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를 떠올렸다. 원래 이곳은 서민들이 살던 주거지였지만 서기 64년 로마를 휩쓴 대화재 때 잿더미로 변했다. 네로는 불을 다 끈 다음 땅을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래서 ‘땅을 싸게 매입하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총독 갈바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쫓겨 자살하는 바람에 황금궁전 공사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원형극장 건설 부지로 황금궁전을 선택한 데에는 정치적 이유가 숨어 있었다. 폭군이라는 평판을 받는 네로와 정반대되는 행보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네로가 궁전을 짓는다며 빼앗은 땅을 로마인에게 돌려주겠소. 네로는 재산을 갈취하며 로마인을 괴롭힌 폭군이지만, 나는 네로를 응징하고 로마인의 한을 풀어주는 성군이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금궁전과 인근 땅을 모두 사들여 70~72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원형극장을 세운 곳은 정확하게 황금궁전의 인공호수 자리였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69년이었으니 불과 1~3년 만에 착공한 셈이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 설계를 그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대나 그 이후에 설계도는 완성돼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원형극장 건설비는 황제 즉위 직전 치른 유대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콜로세움 인근에서 발견된 명문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을 바탕으로 새 원형극장을 짓도록 명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부에서는 티투스가 예루살렘에서 노예로 끌고 온 유대인 2만~6만여 명을 공사에 동원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콜로세움을 기독교도가 순교한 성소로 생각한 옛날 기독교 신도 사이에서는 콜로세움을 설계한 건축가가 기독교도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아쉽게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원형극장의 완공식을 볼 수 없었다. 건물이 3층까지 올라갔을 무렵인 79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원형극장을 완성한 사람은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큰아들 티투스였다. 그는 아버지가 숨진 이듬해 원형극장을 완공했다. 공사에 8~10년 정도가 걸렸으니 당시 건축 기술과 건물 크기를 고려하면 상당히 빨리 지은 셈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검투사, 동물 등이 이동하는 지하공간인 히포지움을 추가했다.
티투스는 콜로세움 개장을 기념하기 위해 성대한 무누스를 열었다. 무누스의 원래 뜻은 의무였다. 처음에는 고위층이나 부자가 시민을 위로하기 위해 펼치는 각종 공공사업이나 공연 등을 일컫는 말이었다. 무누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검투사경기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검투사경기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좁혀졌다. 검투사는 글라디아토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 보병이 주로 썼던 짧은 검을 뜻하는 글라디우스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콜로세움 개장 기념행사에 관중이 몇 명이나 들어갔는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역사학자들은 관중석 규모로 볼 때 한 번에 최대 5만~8만 명을 수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속주 총독을 지내기도 했던 2~3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 등이 남긴 기록을 통해 콜로세움 개장 기념 무누스의 규모를 살펴보면 100일 동안 진행된 행사에서 희생된 동물은 무려 9천 마리를 넘었다. 그 때 죽은 검투사가 몇 명인지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학자들은 적어도 수백 명은 되리라고 추정한다. ‘콜로세움에서 열린 각종 축제에서 숨진 검투사가 2천 명이 넘는다’는 다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콜로세움 개장 기념 무누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검투사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콜로서스 그리고 콜로세움
콜로세움이 개장했을 때 이름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이었다.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라는 뜻이다. 테아트룸은 ‘극장’이고 암피는 ‘둘’ 또는 ‘양쪽’이라는 의미다. 플라비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가문의 성인 플라비우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일부에서는 암피테아트룸 카이사레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카이사레움은 카이사르를 뜻했다. 당시에는 황제를 카이사르라고 부르기도 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 원형극장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대형 동상 콜로서스 네로니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네로 동상은 구리로 만든 것이었다. 높이가 무려 30m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콜로서스 네로니스는 고대 7대 불가사의로 불린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상인 로도스 콜로서스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결국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로도스 거상에서 나온 셈이다. 콜로서스가 ‘거대하다’는 뜻이니 콜로세움은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의미가 된다.
콜로서스 네로니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네로 황제가 죽은 뒤 콜로서스 네로니스는 온갖 수모를 다 겪어야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동상에서 네로 두상을 떼어내고 대신 태양 모양 왕관을 달았다. 동상 이름도 콜로서스 솔리스(거대한 태양신)로 바꾸었다.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베누스 신전 건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상을 콜로세움 북서쪽으로 옮겨버렸다. 자신을 헤라클레스의 현신이라고 주장했던 코모두스 황제는 태양 왕관을 뜯어내고 자신의 두상을 갖다 붙이기도 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꺾고 로마를 통일한 이후 원로원은 콜로세움 앞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만들어 헌정하고, 네로 동상 꼭대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두상을 달았다. 이 두상은 16세기 무렵 허물어진 네로 동상 기단 인근에서 발견됐고, 지금은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네로 동상은 이런 수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중세 시대까지 살아남았다. 특이하게도 ‘동상에 마법의 힘이 있다’는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희한하게도 로마의 영원함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기독교도까지 이런 이야기를 믿었다고 하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7~8세기 영국의 수도사 겸 역사학자였던 베대는 ‘콜로서스가 서 있는 한 로마도 서 있을 것이다. 콜로서스가 무너질 때 로마도 무너질 것이다. 로마가 무너지면 세계도 무너진다’는 시를 남겼다. 그가 말한 콜로서스는 네로 동상이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베대의 글은 누군가에 의해 ‘콜로세움이 서 있는 한’으로 바뀌어 널리 퍼졌다.
네로 동상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기록으로 추정해볼 때 연이은 지진 때문에 15세기께 무너졌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중세시대 사람들이 청동 조각품 등을 만드는 데 활용하려고 동상을 넘어뜨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콜로세움 앞에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메타 수단스(땀 흘리는 메타)라는 분수가 있었다. 콜로세움이 완공된 직후인 1세기 말에 만든 분수였다. 원래 메타는 대전차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양쪽 끝부분에 있던 원뿔을 의미했다. 전차가 방향을 바꿔 유턴하듯이 회전하던 곳이었다.
콜로세움의 메타 수단스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있던 메타와 모양이 비슷해서 메타라는 이름을 얻었다. 로마 장군은 개선식을 치를 때 팔라티노 언덕 옆을 지나 콜로세움 앞에서 회전한 뒤 포로 로마노로 들어갔는데, 회전하던 지점이 메타 수단스였다. 벽돌, 콘크리트, 대리석으로 만든 메타 수단스의 높이는 처음에는 17m 정도여서 상당히 컸다. 나중에 조금씩 깎이기는 했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9m 정도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존재했던 메타 수단스를 찍은 사진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1936년 독재자 무솔리니는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의 로마 방문을 앞두고 도로 개설 공사를 하면서 원형 교차로를 내려고 메타 수단스를 없애 버렸다. 2천 년을 이어온 고대의 유물이 독재자의 말 한 마디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후 로마 시내 도로 확장 공사를 하는 와중에 원형 교차로도 없어졌다. 지금 메타 수단스 자리는 그냥 보도블록으로 덮여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원형극장
콘크리트, 대리석, 각종 석재를 사용해 건설한 콜로세움은 긴 쪽 길이 188m, 짧은 쪽 길이 156m, 높이 57m의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경기가 벌어지는 무대인 아레나는 긴 쪽 길이 87m, 짧은 쪽 길이 55m였다. 관중석 높이는 56m에 이르렀다.
콜로세움은 총 4층이었다. 바깥에서 볼 때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층마다 변화를 주었다. 1~3층은 각종 조각상이 세워진 아치형 구조로 만들었다. 1층에는 도리아식 기둥, 2층에는 이오니아식 기둥, 3층에는 코린트식 기둥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4층에는 코린트식 벽기둥과 직사각형 창문을 설치했다.
아치형 출입구는 무려 80개여서 행사가 끝난 뒤 아주 빠른 시간에 모든 관람객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출입구 중 두 개는 검투사 전용이었다. 그 중 하나는 죽음의 신의 이름을 딴 포르타 리비티나였다. 경기 도중 목숨을 잃은 검투사가 실려 나가는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검투사는 포르타 사니비바리아로 걸어 나갔다.
콜로세움 관중석은 모두 5만 석이었다. 좌석이 4만 5천 석, 입석이 5천 석이었다. 관중석이 8만 석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 황제와 원로원 의원이 관람하는 공간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안전을 위해 주위에 높은 차단벽을 세웠다. 다른 관중석은 부자용, 중산층용, 노예와 외국인용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꼭대기 층에는 입석이 만들어졌다. 주로 가난한 사람이나 여성이 사용하는 관람석이었다. 천장에는 관람객을 햇빛에서 보호하기 위해 천으로 만든 가리개를 달았다.
경기장인 타원형 아레나 바닥에는 15㎝ 두께로 모래를 깔았다. 아레나 주변에는 관중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담벼락을 세웠다.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때로는 빨갛게 염색한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부드러운 모래를 라틴어로 하레나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아레나라는 이름이 나왔다. 오늘날 ‘경기장’을 뜻하는 아레나의 어원이다. 경기에 출장하는 검투사의 출신 지역에 따라 이국적 분위기를 내려고 아레나 주변을 나무나 바위로 장식하기도 했다. 지하에는 동물을 실어 나르기 위한 승강기 설비를 설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사에 사용된 석재 표면에 숫자가 적혀 있다는 점이다. 그 석재가 어느 지방에서 생산됐는지를 알려주는 숫자다. 로마인들은 돌 하나를 쌓더라도 얼마나 관리를 철저히 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18세기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직접 가본 콜로세움의 풍경을 아주 상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바 있다. 상상력을 덧붙인 그의 글을 보면 콜로세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콜로세움은 80여 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는 높은 원형 건축물이다. 건물 외벽은 대리석으로 덮었으며 각종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넓은 내부는 오목한 모양이며 경사가 져 있다. 60~80열로 이뤄진 대리석 좌석으로 덮여 있다. 좌석에는 쿠션이 깔려 있으며 한꺼번에 8만 명을 수용할 능력을 갖고 있다. 80여 개의 출구는 엄청난 관중을 손쉽게 내보낸다. 입구, 통로, 계단을 아주 정밀한 기술로 설계한 덕에 원로원 의원이든 기사계급이든 평민이든 아무런 불편이나 혼란 없이 정해진 좌석을 찾아갈 수 있다.
관중의 편의, 즐거움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도 빠진 게 없다. 관중은 머리 위로 끌어당길 수 있는 넓은 덮개 덕분에 햇빛과 비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곳곳에서 분수가 솟구쳐 항상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며, 풍부한 아로마 향기가 주변을 향긋하게 만들어준다.
아레나에는 아주 고운 모래가 뿌려져 있다. 모래는 계속 모양을 바꾼다. 어떤 순간에는 땅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이다가 잠시 후에는 헤스페리데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황금빛 석양의 여신)의 정원처럼 변한다. 나중에는 트라키아의 바위와 동굴처럼 변신한다. 땅속에 파묻힌 수도관은 엄청난 양의 물을 운반한다. 방금 전에는 평지 같던 아레나가 갑자기 넓은 호수로 변하더니 곧이어 무장 함선으로 가득 찬다. 마지막에는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뛰어나온 괴물들로 덮인다.
로마 황제는 부와 자유정신을 마음껏 자랑한다. 우리는 다양한 책에서 원형극장의 모든 가구가 은이나 금, 또는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읽곤 한다. 한 시인은 카리누스(3세기 말 황제)가 개최한 경기를 ‘짐승이 올라오지 못하게 설치한 담장은 황금 철사로 만들었고, 열주 기둥은 금으로 도금했으며, 여러 계급의 관중을 분리해놓은 시설은 아름다운 돌로 만든 모자이크로 장식했다’라고 묘사했다.’
반원극장과 원형극장
원형극장은 오늘날 스포츠 경기를 진행하는 운동장 또는 체육관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지금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 구조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마에 원형극장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됐을까?
극장은 원래 그리스에서 고안한 건축물이었다. 그리스의 극장은 반원형 무대를 중심으로 반원형 관중석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로마인들은 건국 초창기부터 그리스 식 극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언덕 언저리에 극장을 짓곤 했다. 하지만 석재극장은 건설하지 않았고, 연극 공연이 준비될 때마다 임시 목재극장을 지어 사용했다가 행사가 끝나면 해체했다. 다른 라틴 도시에는 석재 극장이 드물지 않았는데 왜 유독 로마에만 없었는지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에 그리스 방식의 석재 상설 극장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폼페이우스였다. 그는 BC 55년 마르스 평원에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었다. 이어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업을 이어받아 BC 11년 마르스 평원에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었다. 둘 다 반원형 극장이었다. 물론 그리스 극장과는 조금 모양이 달랐다.
마르켈루스 극장은 먼저 지은 폼페이우스 극장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설계를 할 때 폼페이우스 극장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르켈루스 극장 정면 외관은 콜로세움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흡사해 보인다. 실제 건물은 지금 사라졌지만 현대에 제작한 폼페이우스 극장 상상도나 모형을 보면 역시 콜로세움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로마인들은 원래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전차경기를 거행했다. 이곳에서 전차경기 외에 검투사경기나 동물사냥도 열곤 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검투사경기를 더 좋아하게 됐다. 그런데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경우 가운데 부분에 빈 공간인 스피나가 있어 검투사경기를 치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관중석과의 거리도 너무 멀었다. 검투사가 개미처럼 보였을 것이다.
반원형인 그리스 식 극장에서 검투사경기를 치르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극장 무대에서 칼이나 창을 들고 싸우는 검투사를 생각하면 마치 코미디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로마인 사이에서 새로운 경기시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로마인들은 매우 실용적인 민족이었다. 필요성이 생기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익숙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반원형 극장 두 개를 붙여 둥그렇게 만든 원형극장이었다. 처음부터 콜로세움 같은 웅장한 원형극장을 만들 수는 없었다. 목재를 사용해 작은 것부터 만들다 경험과 기술을 쌓은 다음에 대형 석재 원형극장을 건설할 수 있었다.
로마에 원형극장을 처음 만든 사람은 BC 49년 법무관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였다. 1세기 로마 시대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가 쓴 『자연의 역사』에 그가 만든 원형극장 이야기가 나온다. 쿠리오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 검투사경기를 열 생각이었지만 마땅한 장소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사비를 들여 직접 원형극장을 건설했다. 규모는 아주 작았고 나무로 만들었다.
쿠리오의 원형극장은 매우 독특했다. 엄밀히 말하면 암피테아트룸(원형극장)이 아니라 두알리스 테아트룸(극장 두 개)이었다. 쿠리오는 반원형 극장 두 개를 나란히 건설했다. 평소에는 두 극장에서 따로 연극을 공연하다 검투사경기를 개최할 때에는 극장의 방향을 돌려 서로 마주보게 해서 동그랗게 만들었다. 극장 바닥에 이동 장치를 달아놓았기 때문에 방향 전환이 어렵지는 않았다.
두 번째 원형극장은 BC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들었다. 그 내용은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에 나온다. ‘카이사르는 나무로 사냥용 극장을 만들었다. 이것을 원형극장이라고 불렀다. 무대는 없고 주변에 좌석이 둥글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결혼했다 죽은)딸을 기념해 검투사경기와 동물사냥을 개최했다.’
목재 원형극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수만 명에 이르는 관중의 무게를 오랫동안 버티기가 어려웠다. 붕괴 사고가 자주 일어났고, 화재에도 취약했다. 실제 그런 비극적인 사고가 여러 건 일어났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아틸리우스라는 해방 노예가 피데나이에 목재 원형극장을 지었다. 공사를 부실하게 마무리하는 바람에 검투사경기 도중 관중석 붕괴 사고가 일어나 2만~5만 명이 깔려죽었다. 네로 황제 사후 오토와 비텔리우스가 내전을 벌이고 있을 때에는 플라켄티아의 목재 원형극장에서 불이 나 큰 인명 피해를 냈다. 쿠리오와 카이사르의 원형극장도 화재로 없어지고 말았다.
사고를 연이어 겪으면서 로마인들은 안전하게 검투사경기를 치르려면 석재 원형극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됐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전직 집정관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는 BC 29년 마르스 평원에 사상 첫 석재 원형극장을 사비로 건설했다. 건물 외부는 석재로, 관중석과 계단은 목재로 만들었다. 관중석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이 극장도 네로 황제 시대인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때 무너지고 말았다.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 황제는 전차경기는 물론 검투사경기도 매우 좋아했다. 그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스타틸리우스의 원형극장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더 훌륭한 원형극장을 짓겠다면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암살당한 뒤 후임 황제로 즉위한 클라우디우스가 예산 절감을 이유로 방치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네로 황제는 마르스 평원에 제법 큰 원형극장을 건설했다. 규모나 외관 등에 대해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64년 로마 대화재 때 스타틸리우스가 지은 원형극장과 함께 불타버리는 바람에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네로가 죽은 뒤 즉위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는 원형극장보다는 목숨을 어떻게 부지할지를 먼저 챙겨야 할 형편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여러 황제를 제치고 아우구스투스의 가슴에 담겨 있던 로마 시내 원형극장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지금 로마에 가면 볼 수 있는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가 만든 원래의 원형극장이 아니다.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콜로세움은 수시로 화재에 시달렸다. 전체적인 구조는 석재였지만 지하공간과 아레나, 관중석 지붕 등은 모두 나무였기 때문에 화재에 취약했던 것이었다. 나무에 불이 붙으면 대리석 등 석재의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켜 붕괴시킬 정도로 화염이 뜨겁고 거셌다.
처음에는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땜질보수로 충분히 재건할 수 있었다. 207년 최상층 관중석을 때린 번개로 불이 났을 때에는 상황이 달랐다. 로마에 있던 7개 소방 회사 직원은 물론 카스트라 미세나티움 해군기지에 있던 선원까지 모두 불을 끄러 달려와야 할 정도였다. 겨우 뼈대만 남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콜로세움을 아예 없애 버리든지, 아니면 새로 지어야 할 형편이었다.
이곳에서는 도저히 검투사경기를 치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검투사경기에 미치다시피 한 로마인들을 생각할 때 행사를 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후 5년 동안 검투사경기는 마르스 평원에 있던 스타디움 도미티아나(도미티아누스 경기장)에서 거행해야 했다. 오늘날 나보나 광장이 바로 그곳이다.
원형극장을 완전히 새로 짓는 데에는 30년이나 걸렸다. 재건축을 시작한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니었다. 코모두스 황제가 죽고 발생한 내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집권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처조카였던 엘라가발루스였다. 시리아의 제사장 출신이었던 그가 황제로 취임한 뒤 얻은 공식이름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새 원형극장 봉헌식은 222년 엘라가발루스의 사촌동생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거행됐다. 공사가 끝난 상태는 아니었지만 원형극장에서 검투사경기를 열어 달라는 시민 요구가 빗발쳐 할 수 없이 서둘러 임시 개장한 것이었다.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240년 고르디아누스 3세 때였다. 당시 발행한 동전에 완공 사실이 담겨 있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성대한 개선식을 열고 싶어 했다. 승리를 축하하는 검투사경기와 동물사냥을 새로 개장한 원형극장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행사에는 코끼리 32마리, 엘크 사슴 10마리, 호랑이 10마리, 사자 60마리, 표범 30마리, 하이에나와 곰, 기린 10마리, 물개 6마리, 코뿔소 1마리 등이 동원됐고, 검투사는 2천 명이 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