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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오해와 착각이 낳은 르네상스의 걸작



테베레 강 건너편에는 로마의 중세 풍취를 느끼게 하는 트라스테베레라는 구역이 있다. 이곳에는 자니콜로라는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이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야누스 신의 이름을 따서 야니쿨룸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당시에는 언덕에 작은 성채가 건설돼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곳에 병력을 배치해 외적의 침입에 미리 대비했다.


트라스테베레에는 꽤 유명한 성당이 여럿 있다.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마리아 성당,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등이다. 자니콜로 언덕 언저리에도 작은 성당이 하나 있다. 규모는 작지만 상당히 유명한 성소다. 15세기에 건설한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몬토리오의 성 베드로 성당’이지만 ‘순교한 사도 성 베드로의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몬토리오라는 이름은 언덕에 있던 노란 모래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해가 뜰 때 황금색으로 빛나는 모래 채취장이 있었다. 얼마나 밝게 빛났던지 멀리 로마 시내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이곳에서 상당한 분량의 황금이 발견됐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 초창기에 이곳은 몬스 아우레우스 즉 ‘황금의 언덕’으로 불렸다. 이때문인지 이 성당의 영어 이름은 ‘황금 언덕의 성 베드로’다.


이 성당에 ‘성 베드로’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중세 전설에 따르면 성당 자리는 성 베드로가 순교한 곳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당혹스러운 사실이지만 과거에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15세기 최고의 라틴어 시인으로 평가받는 마페오 베기오는 1455년에 쓴 시에서 성 베드로의 순교 장소를 몬토리오라고 주장했다.



‘축복받은 베드로가 몬테 아우레오에 발자국을 남겼다.’


물론 이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기독교도 이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성 베드로는 바티카누스의 네로전차경기장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다.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즉 성 베드로 대성당이 그곳에 세워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니콜로 언덕에 순교한 사도 성 베드로의 성당을 만든 이유는 다소 엉뚱하다. 그 과정을 살펴보려면 베드로의 행적을 담은 2세기 기록 『베드로 행록』 37장을 봐야 한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이다.


‘사형 집행관이여! 그대에게 바라노니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주시오. 다르게는 매달지 마시오. 그 이유를 듣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리다.’  


이 글에는 베드로가 머리를 거꾸로 한 채 ‘inter duas metas’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돼 있다. ‘inter duas metas’는 ‘두 메타 사이에’라는 뜻이다. 여기서 메타라는 단어가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고대 로마의 전차경기장에는 스피나라는 공간이 있었다. 트랙의 가운데 빈 공간이었다. 이곳은 전차경주 진행을 돕는 보조자나 경기 도중 부상당한 선수가 몸을 피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빈 공간의 모양이 마치 사람 등뼈처럼 생겼다고 해서 스피나라고 불렀다. 전차경주에 나선 선수가 착각하지 않도록 스피나에는 뾰족한 기둥이나 동상 등을 세워두었다.


스피나의 양쪽 끝에는 메타라고 하는 원뿔을 3개씩 세웠다. 전차가 회전하는 지점이었다. 전차를 모는 기수들은 이 기둥을 보고 반환점에 다 왔다는 걸 인식하고 전차의 방향을 틀었다. 성 베드로가 네로전차경기장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베드로 행록』 37장에 나오는 메타를 스피나의 양쪽 끝에 세워진 원뿔이라고 보았다.


중세에 바티칸은 아게르 바티카누스 즉 바티칸 평원으로 불린 로마 외곽지역이었다. 비아 아피아 등 로마의 다른 외곽도로처럼 이곳에도 로마인들의 무덤이 많았다. 마르스 평원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귀족이나 상류층 인사들의 무덤을 만들기 편리했던 곳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인근에는 피라미드처럼 생긴 삼각뿔 모양 무덤이 있었다. 메타 로물리 또는 피라미다 바티카나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피로 리고리오가 그린 그림을 보면 옛 성 베드로 대성당과 하드리아누스 영묘 즉 산탄젤로 성 사이에 삼각뿔이 하나 서 있는 게 보인다. 바로 그곳이 메타 로물리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 근처에는 테레빈투스 네로니스라는 영묘도 있었다. 테레빈투스는 영묘를 만든 재료인 석회암을 뜻하는 라틴어다. 중세까지도 이곳에는 네로 전차경기장이 있었기 때문에 바티칸 평원의 여러 유적에는 네로니스라는 이름이 많이 붙어 있었다. 테레빈투스 네로니스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에는 건재했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허물어져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일부 사람들은 메타 로물리와 테네빈투스 네로니스가 『베드로 행록』 37장에 나오는 ‘메타’라고 추정하게 됐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곳은 테레빈투스 네로니스와 메타 로물리 사이이거나 메타 로물리와 네로 전차경기장 가운데 서 있던 오벨리스크 사이라는 것이었다.


비슷하면서 약간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날 지하철 피라미데 역 앞 즉 오스티엔스 광장 맞은편에 피라미드 모양 건축물이 하나 있다. 바티칸에서 보면 테베레 강 건너편이다. 직선거리도 5㎞ 정도니 제법 멀다.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에 축제를 주관하는 사제집단 중 한 명이었던 가이우스 세스티우스의 무덤이다. 중세 시대에는 이곳을 메타 레미라고 불렀다. 


어떤 지식인은 메타 로물리와 메타 레미를 『베드로 행록』에 나오는 두 개의 메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 베드로는 두 메타 사이의 지점에서 순교했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런 착오와 오해 덕분에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이 태어나게 됐다. 그런데 설사 이들의 주장이 맞다 하더라도 몬토리오는 뜬금없는 장소다. 이곳은 테레빈투스 네로니스와 메타 로물리 사이도 아니거니와 메타 로물리와 메타 레미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 자니콜로 언덕을 ‘두 메타 사이’라고 생각하면서 성당을 지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 베드로에게 바친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에 대한 첫 언급은 9세기 역사학자인 안드레아스 아그넬루사가 편집한 『리베르 폰티피칼리스 에클레시아이 라베나티스』에 나온다. 처음에는 수도원으로 등장한다.  ‘성 베드로의 이름을 붙인 야니쿨룸의 수도원.’


수도원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8세기 비잔틴 수도사들이 세운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뿐이다. 당시 이런 종류의 수도원이 적지 않았다. 이곳은 10세기 들어서는 베네딕토 수도원이 됐다. 11세기에는 수도원 연합을 형성한 20개 수도원 중 하나가 됐다. 당시 수도원장 20명은 교황청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베네딕토 수도원은 13세기 치욕스러운 부패 때문에 종교적 명성을 잃고 말았다.  다른 수도회에 권한을 모두 넘겨주어야 했다. 교황 식스토 4세(재임 1471~84년)는 사용 중단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수도원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개혁적 수도사 모임인 아마데우스회에 넘겨주었다. 


수도사들은 1481년 수도원 재건 작업을 시작했다. 성당은 새로 짓기로 했다. 어떤 건축가가 사업을 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은 덕분에 성당은 1494년 완공됐다.



봉헌식은 6년 뒤인 1500년에 열렸다. 실내 장식 작업이 늦어졌거나 공사 과정에서 생긴 빚 청산 때문에 봉헌식이 늦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봉헌식을 치르고 나면 성당이 진 빚은 모두 없어지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채권자들이 빚을 갚을 때까지 봉헌식을 미루라고 강요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봉헌식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가 치렀다. 스페인 출신이었던 그는 성당 건설 공사에 스페인을 끌어들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페르디난드 국왕과 이사벨 여왕에게 부탁해 성당에 예배당을 추가할 자금을 지원받은 것이었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밀라노에 르네상스 건축을 도입한 도나토 브라만테였다.



브라만테가 탄생시킨 결과물은 정원에 건설한 예배당인 템피에토였다. ‘작은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건물이었다. 정식 명칭은 카펠라 델라 크로치피시오네 디 산 피에트로 아포스톨로(사도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예배당)이다. 준공 당시부터 로마에 르네상스의 문을 연 기념비적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은 건물이었다. 여기에 성 베드로와 십자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성 베드로가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전설에 크게 신경을 쓴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브라만테는 밀라노에서 초기 시절을 보낸 뒤 로마로 건너갔다. 그는 나중에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년~13년)가 되는 기울리아노 델라 로벨 추기경의 눈에 띄었다. 브라만테는 그 덕분에 고대 로마의 신전 등 유적을 공부할 수 있었다.


브라만테는 티볼리에 있는 베스타 신전도 둘러보았다. 당시에는 베스타 신전으로 알려졌던 포룸 보아리움의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도 공부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에 순교자 기념 성당을 지을 때 원형 건축물을 이용했다. 그는 공부를 통해 이런 사실도 알게 됐다. 두 곳을 둘러본 것은 템피에토를 건설할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템피에토는 토스카나에서 유행했던 도리아 양식 건축물이다. 도리아 양식은 헤라클레스처럼 아주 강한 이미지를 주는 남자 신에게 어울리는 양식이다. 그래서 성 베드로에게 바치는 양식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브라만토가 템피에토에서 시도했던 설계는 나중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 건축사학자는 템피에토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선구자였다고 평가한다. 템피에토는 완공되자마자 주목을 끌었다. 성당에 담긴 전설을 헐뜯는 종교 학자보다는 훌륭한 건축물을 찾아다니는 건축 순례자들로부터 찬미를 받았다.


템피에토에는 로욜라의 성 이그나티우스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1534년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 받은 수도사들과 함께 예수회를 창립한 인물이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혁명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갈등이 극심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의 부패, 타락을 비판하면서 교세를 키우고 있었다. 가톨릭의 교세는 위축돼 위기를 맞았다. 예수회는 가톨릭이 반성하고 혁신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회는 1540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초대 총장을 선출하기 위해 수도사들이 선거를 실시했다. 창립자인 이그나티우스가 선출됐지만 취임을 거절했다. 성 이그나티우스가 거절하는 바람에 두 번째, 세 번째 선거가 연이어 실시됐다. 수도사들은 계속 그를 선출했다. 그는 연거푸 취임을 거절했다. 예수회 창립에 참여한 수도사들은 걱정하게 됐다.


“당신이 계속 거절하면 예수회는 이대로 무너지고 말 겁니다.”


당시 성 이그나티우스의 고해 신부는 순교한 사도 성 베드로의 성당의 수도사인 테오도시오 다 로디였다. 성 이그나티우스는 성당에 가서 트리디움을 시작했다. 사흘간 기도하고 명상하는 의식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성당이 자리 잡은 곳은 언덕 언저리여서 테베레 강은 물론 멀리 로마 시내가 보였다. 당시 트라스테베레에는 지금과는 달리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생각했다.


성 이그나티우스가 예수회를 창립한 것은 마흔아홉 살, 초대 총장으로 선출된 것은 쉰 살 때였다. 당시 기준으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교회의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개혁운동을 시작했지만, 그는 일을 후배 수도사들에게 맡기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하느님을 모시는 일에만 열중하고 싶었을 것이다.


밤에 테베레 강과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로마 시내를 바라보는 그의 머리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이웃에 살던 대장장이 집에서 자라던 기억이 떠올랐다. 군인으로 성공하려고 여러 전쟁에 나섰다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장애인이 된 생각도 났다.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성경을 읽어주던 형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가 사제의 길로 접어든 것은 그녀 덕분이었다.


트리디움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성 이그나티우스를 방으로 불러 조언했다.


“하느님이 맡긴 운명입니다. 총장 자리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바꾸십시오.”


성 이그나티우스는 테오도시우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직접 선택한 것이든 하느님이 맡긴 것이든 이 길은 그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총장으로 취임하기로 했다.


18세기까지 성당에는 라파엘로가 그린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그림이 제단 뒤에 걸려 있었다. 1797년 이탈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는 그림을 빼앗아갔다. 나중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엉뚱하게도 그림은 성당 대신 바티칸 박물관에 걸리게 됐다.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변용' at 바티칸박물관


결과적으로 그림이 바티칸에 걸린 것은 그림으로 봐서는 행운이었다. 1849년 프랑스가 로마 공화국을 탄압하기 위해 로마를 폭격했을 때 성당의 애프스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림이 제단 뒤에 걸려 있었다면 불타 없어져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템피에토 제단에는 회색 대리석으로 만든 도리아 양식 기둥이 서 있다. 성 베드로로 보이는 작은 조각상이 있다. 중앙 홀은 중세시대 사람들이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라고 추정하는 지점이다.


성가대 애프스에는 큰 창이 두 개 달려 있다. 두 창 사이에는 귀도 레니가 그린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 그림 모작품이 걸려 있다. 원래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이 걸려 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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