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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 바오로는 어디에 묵었을까?


로마여행을 가서 시내를 오가다보면 언제나 비아 델 코르소 즉 코르소 거리를 지나게 된다.  로마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중심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폭이 겨우 10m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좁지만 하루 종일 로마인들은 물론 해외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길이다.


첼로를 들고 연주하는 노인, 바닥에 앉아 빵을 먹고 있는 젊은이, 남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키스하는 데 여념이 없는 청춘남녀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굳이 길을 제대로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골목으로 불쑥 들어가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골목에는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과 카페가 넘쳐나고, 명품은 물론 싼 옷도 살 수 있는 가게가 즐비하다.



코르소 거리는 카피톨리노 언덕 앞 베네치아 광장에서 시작해 포폴로 광장까지 이어지는 총길이 1.5㎞ 정도의 거리다. 이곳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많은 로마 유적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판테온, 나보나 광장 등 유명한 관광지들이 이 길을 따라 몰려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망 전후에 만들어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도 이 거리에 있다.


코르소 거리는 지금은 관광의 중심지이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군사도로였다. 북쪽으로 달려가는 비아 플라미니아 즉 플라미니아 가도의 초반 구간이었다. 이 도로를 처음 만든 사람은 BC 220년 감사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였다. BC 1세기~서기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의 『지리』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다.


플라미니우스는 이탈리아 북부 포 강 인근 갈리아 키살피나에 살던 리구르 족을 정벌한 뒤 로마에서 티레니아와 옴브리카를 거쳐 아리미눔까지 이르는 길을 만들었다. 이것이 비아 플라미니아였다. 로마에서 아리미눔까지 거리는 1천350스타디온이었다. 요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211~270㎞ 정도라고 한다.


비아 플라미니아는 나중에는 아퀼레이아까지 연장됐다. 로마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군사 활동을 펼치는 데 비아 플라미니아는 매우 중요한 도로였다. 그래서 BC 65년 무렵에는 이 도로만 관리하는 특별 관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카피톨리노 언덕 앞쪽의 베네치아 광장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르비우스 성벽의 포르타 폰티날리스 앞이 이 길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이곳은 로마 시내에서 외곽인 마르스 평원이었다. 로마군대가 외국으로 전쟁을 하러 갈 때 군인들이 집결하던 곳이었다. 당연히 이곳에 길을 내면 행군하기에 무척 편했다.


비아 플라미니아는 마르스 평원을 가로질러 현재의 포르타 델 포폴로(포폴로 문)를 지나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올라갔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시내에 무덤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도로 주변에는 많은 무덤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 묻히는 것은 당시 평민은 물론 귀족에게도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부터 제정 초기에는 마르스 평원 주변에 개발 바람이 불었다. 그 덕분에 비아 플라미니아 주변은 도시로 변모했다. 기념비적 건축물이 차례로 세워지기도 했다. 지금은 중세에 만들어진 건물들이 도로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찼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지만, 제정 시대까지만 해도 도로 주변에서는 많은 신전, 바실리카 등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주거 지역도 조성됐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역이 근·현대 발굴조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집들이 아주 밀집해 있어 사람들이 적지 않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3세기 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야만족의 침입에 대비해 로마 주변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쌓았다. 이 때부터 비아 플라미니아의 초반 구간인 코르소 거리는 자연스럽게 성벽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비아 플라미니아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으로 나가는 곳에는 성문이 하나 만들어졌다. 비아 플라미니아가 지나가는 문이라고 해서 포르타 플라미니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로 오늘날의 포폴로 광장에 있는 포폴로 문이다.


비아 플라미니아는 4세기 무렵부터는 ‘넓은 길’이라는 뜻인 비아 라타로 불렸다. 정확히 설명하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쪽의 길 즉 오늘날의 코르소 거리 구간만 이렇게 불렀다. 코르소 거리의 평균 폭은 10m여서 현대적인 도로 기준에 비춰보면 좁은 골목길 수준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길에 비해 매우 넓은 도로였기 때문이었다.


고대 로마가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당하고 100여 년이 지난 600년 무렵 비아 라타에는 빈민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복지센터와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가 세워졌다. 15세기부터는 새로 지은 성당이나 리모델링한 성당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살기 위한 궁전도 연이어 만들어졌다. 이때 건물을 짓는 데 사용했던 건축자재는 인근 포로 로마노나 팔라티노 언덕 등에서 뜯어온 것이었다.


코르소라는 거리 이름은 이 무렵에 만들어졌다. 1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비아 라타에서는 기수 없는 말 경주가 열렸다. 이 경주를 코르사 데이 바르베리라고 불렀는데, 코르소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나왔다. 코르사는 ‘경주’라는 뜻이었다.


중세에 코르소 거리를 채운 성당, 저택, 궁전 등은 규칙적, 계획적으로 건설된 게 아니었다. 17세기 무렵에는 여러 건축기법으로 만들어진 건물 때문에 코르소 거리는 조화롭기는커녕 불규칙하고 지저분한 길로 전락해 버렸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 재임 1655~67년)는 로마 중심가인 코르소 거리를 재정비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절도 있는 개발을 촉구했다. 하지만 귀족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이에 따르지 않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화가 난 교황은 거리에 질서와 균형감을 주겠다면서 지나치게 튀어나왔거나 높은 건물은 부수어버렸다. 거꾸로 너무 작거나 뒤로 물러난 건물에는 부속 시설을 덧붙이기도 했다. 길을 시원하게 뚫겠다면서 여러 건축물을 아예 뭉개버리기도 했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막 들어간 코르소 거리 모퉁이에는 엄청나게 큰 저택이 있다. 지금은 도리아 팜필리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는 도리아 팜필리 궁전이다. 로마의 개인 소유 갤러리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이 궁전 옆에는 아주 유서 깊은 성당이 하나 서 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이다. 규모, 그리고 건축물의 미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눈길을 끌만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 장소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은 로마에 간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2년 동안 머물렀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기를 기다리면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는데, 한 건물의 지하에 갇혀 있었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의 지하실이 바로 그곳이었다. 말이 갇혀 있었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밖으로 나가 로마를 돌아다니거나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성 바오로가 로마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인 28장 23절과 30~31절에 나온다. 물론 그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표현돼 있지는 않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는 황제에게서 재판을 받을 날을 기다리면서 건물 지하실에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쳤다. 이 주장이 옳다면 이곳은 로마 최초의 토착 기독교인이 탄생한 자리였던 셈이다. 『사도행전』을 한 번 읽어보자.


‘그들(로마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날짜를 정해 바오로가 거처하는 셋방에 무더기로 찾아갔다. 바오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입증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사례를 들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납득시키려고 하면서 강론을 펼쳤다(제28장 23절).’


‘바오로는 2년 동안 셋방에 머물며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다 만났다. 완벽하게 확신하면서 주저 없이 하느님의 왕국을 설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쳤다.(제28장 30~31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성 누가가 이곳에서 사도 바울과 이야기를 나눈 뒤 글을 정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누가가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 초상화를 그렸다는 전설도 전한다. 이곳에는 실제로 성모 마리아 그림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13세기 그림으로 평가하지만, 어쨌든 성모 마리아 그림은 많은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전설도 있다. 성 베드로와 리모게스의 첫 주교였던 사도 마르시알이 포로 로마노에 있던 감옥 툴리아눔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사도 바울과 함께 이곳에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다. 성 베드로가 이곳에서 방문자들에게 세례를 주려고 했을 때 기적처럼 우물이 솟아올랐다는 전설도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성 베드로는 1세기 사람이었던 반면 성 마르시알은 3세기에 살았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은 떨어지는 이야기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 자리에는 원래 1세기 하드리아우스 황제 시대에 만든 다층 건축물이 서 있었다. 그 건축물이 공동주택인 인술라였는지 아니면 공공건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인술라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인술라는 1층에는 상업용 공간, 2층 이상에는 주택을 넣은 주상복합건물이었다.


건물의 천장은 원래 10m 높이였다. 원래 창고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 것은 이렇게 천장이 높기 때문이었다. 3세기 무렵에는 건물 중간 5.5m 지점에 천장을 넣어 1개 층을 두 개로 나눴다. 각 층의 기둥 사이에는 벽돌 벽을 쌓아 방을 여러 개로 나눴다. 작은 가게를 여러 개 넣을 수 있게 바꾼 것이었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의 기원은 디아코니아에서 시작한다. 디아코니아는 현대적 용어로 따지면 사회복지센터였다. 이곳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이나 생활필수품을 나눠주었다. 이런 일을 맡은 사람을 디아코누스라고 불렀다. ‘하인’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단어다. 대부분 디아코니아는 나중에는 가정 성당인 티툴루스로 발전했다. 성 바오로가 갇혀 있었던 건물에 처음 디아코니아를 만들었을 때 여러 방 중의 하나에 애프스(성당에서 반원형으로 움푹하게 들어간 부분)를 만들어 작은 예배당으로 이용했다.


디아코니아로 이용되던 건물에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을 언제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건립 연도가 4세기로 추정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현재 성당 건물은 18세기에 새로 지은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방을 개조해 만든 예배당을 4세기 무렵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임 314~335년)가 성당으로 리모델링했다. 이것은 전설일 뿐이고 객관적인 자료로는 입증되지 않았다.


성당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프레스코 그림은 대개 7~11세기 작품이다. 일부 팔림프세스트와 다른 문서 조각을 보면 6세기라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팔림프세스트는 원래의 글을 바탕으로 새로 쓴 고대 문서를 말한다.


17세기 문서를 보면 교황 세르지오 1세(재임 687~701년) 시기에 성당이 건립됐다는 표현이 나온다. 교황은 순교한 성 아가피투스를 이 성당에 모셨다고 한다. 로마 원로원 의원 알베리크의 누이인 테오도라의 남편 테오필락트가 706년에 성당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됐든 이 건물이 성당으로 처음 사용됐을 때에는 사도 바울과 성 누가에게 봉헌한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무렵 이곳은 비잔틴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동로마제국에서 성상파괴를 피해 달아난 난민 수도사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수도사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시에는 이곳이 성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의 지하 프레스코 그림에는 비잔틴의 영향이 진하게 남아 있다. ‘에페수스의 일곱 잠꾸러기’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3세기 중반 로마 황제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에페수스 외곽 동굴에 숨어 살았던 일곱 형제의 전설을 담고 있다. 이곳에 살던 비잔틴 수도사들은 10세기 무렵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곳에 제대로 된 본격적인 성당 건물이 지어진 것은 11세기 무렵이었다. 그 이유는 홍수였다. 당시 비아 플라미니아는 지금보다 5m 정도 낮았다. 도로 근에 있는 테베레 강의 수면보다 높지 않았다. 강이 범람해 홍수가 나면 도로 주변에 있던 많은 건물은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성당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수는 거의 해마다 발생했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건물을 새로 고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교황 레오 9세(재임 1049~54년)는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1049년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의 기반을 더 높여 새로 지었다. 성당에 원래 있던 작은 예배당을 포함해 옛 수도원의 일부분은 지하로 바꾸보존했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은 1491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 재임 1484~92년)의 지시에 따라 새로 지어졌다. 성당 재건축을 담당한 추기경은 로드리고 드 보리아였다. 그는 나중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가 되는 사람이다.


새로 지은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됐다. 성 누가가 그렸다고 알려진 성당 제단 위의 성모 마리아 그림이 높은 인기를 누린 덕분이었다. 게다가 1408년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 나타나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까지 퍼져 인기는 더욱 커져 있었다.


성당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출입문을 바꾸기 위해 인근에 있던 아르쿠스 노부스(노부스 개선문)를 없애버렸다. 아르쿠스 노부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헌정 이유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먼저 293년 데케날리아를 맞아 황제에게 헌정했다는 주장이 있다. 데케날리아는 10년마다 황제가 주최한 루디(경기대회)였다. 이 행사의 유래는 고대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시작한다. 원로원은 황제에게 종신 최고 권력을 부여했지만 그는 10년 동안만 받겠다고 했다. 아구우스투스는 10년이 지나면 축제를 열어 모든 권력을 시민의 손에 돌려주는 행사를 거행했다. 시민들은 그의 겸손한 행동을 칭찬하면서 10년간의 권력을 그에게 다시 부여했다. 이것이 나중에 다른 황제들의 시대에는 데케날리아라는 축제로 바뀌었다.


두 번째는 303~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공동 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아르쿠스 노부스(새 개선문)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이 거리에 이미 클라우디우스 개선문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은 1659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임 1655~67년) 시대에 다시 지어졌다. 교황은 사도 바울과 성 베드로의 전설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는 두 성인의 이야기가 깃든 성당을 허름하게 놔둘 수 없다면서 성당 지하 공간에 특히 신경을 써서 제대로 다시 지으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2년 뒤에는 지하 예배당도 만들었다. 예배당에는 대리석 부조로 장식한 새 제단을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코르소 거리에 가면 볼 수 있는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이 사실상 완성된 것이었다.


이 성당의 지하 공간은 여섯 개로 나뉘어 있다. 이 중에서 1번 방이 성 바오로가 살았다고 하는 곳이다. 이 방에는 작은 대리석 기둥이 하나 세워져 있다. 기둥에는 십자가 그리고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신의 말씀은 묶을 수 없다’라는 내용이다. 기둥에는 쇠의 녹이 묻은 흔적이 남아 있다. 아마 기둥에 쇠사슬이 묶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2010년에 성당의 지하 공간 근처에서 오래 된 쇠사슬이 발견됐다. 이 쇠사슬이 성 바오로를 묶어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중세에 사용했던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작은 우물도 하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성 바오로가 신도들에게 세례식을 베풀 때 사용했던 우물이었다.


로마에는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과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다른 성당도 있다. 테베레 강의 폰테 시스토 다리와 폰테 가리발디 다리 사이에 있는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이다. 여기도 사도 바오로가 살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이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인 28장 23절과 30~31절이다. 성경에 구체적 지명이 명시돼 있지 않기 때문에 성당 두 곳이 똑같은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2세기 자료에는 성 바오로가 모임을 갖기 위해 곡물저장고를 빌렸다고 돼 있다. 1978~82년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 뒤편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곡물저장고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


게다가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 자리는 고대 로마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성 바오로가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포교 활동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이야말로 그가 살았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성당 측의 주장이다.


사도 바오로의 원래 직업은 가죽 천막 제조업자였다. 옛날 고대 로마 시대에는 테베레 강변에서 유대인 가죽 무두장이들이 일했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천막 제조업자인 성 바오로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이 언제 건설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문서에는 1186년에 처음 이 성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곳은 산 로렌초 인 다마소 성당의 부속성당 가운데 하나라는 내용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성 바오로가 한 칸짜리 거처에 만든 기도실 옆에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성당을 설립했다. 묘하게도 실베스테르 1세가 산타 마리아 인 비아 라타를 처음 만들었다는 전설과 내용이 똑같다.


성당 건립 초기에는 인근에 살던 가죽세공인과 무두장이들이 성당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수호성인은 바로 성 바오로였다. 성당이 무두장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전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599년에는 ‘맨발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작은 공동체가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을 관리하게 됐다. 이 수도회는 원래 엄격하고 은둔적인 형태의 종교생활을 추구하는 개혁 운동을 하는 종교단체였다. 수도회의 본부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있었다.


1619년에는 ‘프란체스코 제3회’의 시칠리 분회에게 성당 관리권이 넘어갔다. 당시 이 수도회는 스페인 왕에게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큰 수도원과 학교를 지었고,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 재건축 작업도 시작했다. 공사는 1687년에 시작해 1728년에 끝났다. 이 과정에서 인근에 있던 산 체사리오 성당을 허물어 산 파올로 알라 레골로 성당 확장 부지를 마련했다.


산 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은 지금은 페루에서 시작한 ‘사도 생활 수도회’에서 관리한다. 성당에는 성 바오로가 거처하면서 신도들을 가르쳤다고 하는 방이 아직도 깔끔하게 보존돼 있다. 바로 성당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인 성 바오로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에는 초록색 대리석 십자가가 새겨진 제단이 있다. 위에는 로마병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슬에 묶인 채 신도들을 가르치는 성 바오로의 모습을 담은 모자이크가 있다. 오른쪽에는 1096년에 새겨진 명문이 붙어 있다. 주 제단에는 루이기 가르지가 그린 성 바오로 그림 세 점이 걸려 있다. ‘성 바오로의 개종’ ‘성 바오로의 가르침’ ‘성 바오로의 순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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