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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세 분수의 수도원

성인의 잘린 목이 세 번 튄 성스러운 샘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정권 장악 20주년이 되는 1942년 로마세계박람회를 열기로 했다. 그는 행사 장소로 콜로세움에서 남쪽으로 8㎞ 정도 떨어진 곳을 골랐다. 제11행정구인 트레 폰타네였다. 행정구의 이름은 ‘세 분수’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무솔리니가 이곳을 선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사실상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외곽이어서 개발 사업을 진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 고대 로마 영광 복원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트레 폰타네는 로마 시내의 베네치아 광장에서 출발해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를 거쳐 카라칼라 욕장을 지나 비아 임페리알리 고속도로를 따라 달려 티레니아 해까지 이어지는 코스의 중간에 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박람회는 열리지 못했다. 이곳에는 EUR 즉 ‘로마세계박람회(Esposizione Universale Roma)’라는 지명만 남게 됐다.


무솔리니가 박람회을 개최할 장소로 고른 트레 폰타네는 옛날부터 세 분수 수도원과 성당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수도원에 가려면 지하철 B라인을 20~25분 정도 타고 EUR 역이나 종점인 라우렌티나 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5~7분 정도 이용하거나, 15~2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이곳은 지금도 로마에서 꽤 떨어진 외곽이다. 그렇다면 고대 로마나 중세에는 시내에서 상당히 먼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오가기가 어지간히 불편한 게 아니었을 텐데 왜 이런 곳에 수도원과 성당을 지었을까?  이유는 한 가지다. 이곳은 성 바오로가 목을 잘려 순교한 현장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성 바오로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대신 세속의 역사 자료가 여러 추정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성 바오로는 재판을 받기 위해 64~68년 감옥에 갇히거나 가택연금 당했다. 그 사이에 한두 차례 풀려나기도 했다.  그가 어떤 혐의로 기소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로마 화제와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



성 바오로는 첫 기독교 처형의 물결이 몰아치던 62~68년 무렵에 순교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68년 5~6월 사이에 숨졌을 것으로 본다. 네로가 자살한 6월 9일 이전의 일이라는 것이다. 67년 6월 29일에 숨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로마에서 십자가형은 원래 노예를 처벌하기 위해 이용됐다. 나중에는 해적, 국가의 적은 물론 하급계층 시민을 처벌하는 데 이용됐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발가벗은 채 천천히 고문당하며 죽어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전시됐다. 


반면 성 바오로는 참수형으로 순교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어에 능통한 유대인이었던 그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범죄자를 사형하는 방법은 십자가형이 아니라 참수형이었다. 


재판에 회부된 로마시민권자는 공화정 때에는 민회, 제정 때에는 황제에게 항소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유죄를 받아 사형되더라도 고통이 적고 깔끔한 참수형을 당했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처럼 고문당하거나 채찍질을 당하지 않았다. 물론 성 베드로가 정말 참수형을 당했는지는 불투명하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서 추론한 데 불과하다. 


96년 교황 클레멘스 1세(90/92~101년)은 코린트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죽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질투와 시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올바른 교회의 두 기둥이 처형당해 목숨을 잃었다. 베드로는 부당한 질투 때문에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재판을 겪어야 했다. 결국 순교자의 증인이 됐고, 그에게 어울리는 영광스러운 장소로 갔다. 바오로는 질투와 갈등 때문에 결국 인내의 보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리켰다. 일곱 번이나 투옥됐고 쫓겨났고 돌에 맞았다. 그는 순교자의 목격자가 된 뒤 세상에서 떠나 성스러운 장소로 올라갔다. 훌륭한 인내의 모범 사례임을 입증했다.’


전설에 따르면 망나니가 성 바오로를 참수했을 때 그의 머리가 세 번 튀었다. 한 번 튈 때마다 그 자리에 샘이 하나씩 솟았다. 처음에는 뜨거운 물, 나중에는 미지근한 물, 마지막에는 차가운 물이 나오는 샘이었다. 그의 목에서는 피가 아니라 우유가 흘러내렸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참수 당하는 현장에 성 누가가 있었다. 그는 다른 기독교도들과 함께 그의 시신을 로마 쪽으로 4㎞ 옮겨 묻었다. 나중에 그 장소에 세워진 성당은 바로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남는다. 트레 폰타네는 콜로세움에서 8㎞ 떨어진 곳이다. 죄수를 사형시키기 위해 데리고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다. 성 바오로 처지에서는 로마 시내에서 죽든 외곽 먼 곳으로 걸어가서 죽든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을 처리해야 하는 군인 입장에서는 죄수 한 명을 죽이는 데 굳이 힘들게 먼 길을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사실 세 분수의 전설은 6세기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세 분수가 있었다’는 기록만 6세기 교황 대 그레고리오(재임 590~604년)의 토지를 설명하는 문서에 나온다. ‘성 바오로가 참수를 당했고 그의 목이 튀어 세 분수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7세기다. 650년 무렵 한 독일 순례자가 『로마 성 밖 성스러운 땅의 기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에 ‘트레 폰타네는 성 바오로가 참수당한 장소’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당시 여기에 있던 수도원이 명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설을 지어낸 것이라는 의심을 사기도 한다. 


엔리크 시모네 '사도 바오로 참수' at 스페인 말라가 엔카네시온 성당


트레 폰타네의 옛 이름은 아게르 헤로디스였다. 네로 시대에 헤롯 왕국의 왕이었던 헤롯 아그리파 2세가 이 지역에 저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게 아니냐는 추론이 나온다. 1878년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는 고대 잣소나무 솔방울과 벌목한 소나무, 네로 시대의 동전이 나왔다. 전설에 따르면 성 바오로가 죽던 장소에도 잣소나무 숲이 있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성 바오로의 목이 튀면서 생겼다는 세 분수 근처에는 세 개의 신전이 건설돼 있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세 분수를 어딘가에 활용됐을 것이다.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전혀 없다.


나중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장악한 이후 세 분수와 주변에 성당과 수도원이 건설됐다. 성 바오로가 참수당한 바로 그 장소에 지었다는 산 파올로 트레 폰타네 성당,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산타 마리아 스칼라 코엘리 성당, 세 분수 수도원을 겸하는 산티 빈센초 e 아나스타시오 트레 폰타네 성당이었다.


5세기 로마로 쳐들어간 동로마제국 장군 나르세스는 세 분수 인근에 있던 세 신전을 없애고 성당을 만들었다. 그것이 산 파올로 트레 폰타네 성당이었다. 16세기 추기경 알도브란디니는 건축가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에게 성당을 새로 짓게 했다. 예술을 사랑했던 그는 삼촌인 교황 클레멘스 8세(재임 1502~1605년) 때 추기경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재산을 성당 재건에 쏟아 부었다. 



산 파올로 트레 폰타네 성당 동쪽 벽을 따라가면 쇠살대를 친 구역이 보인다. 이곳이 세 분수가 있는 곳이다. 기독교 이전 시대에 세 분수는 아쿠아 살비아 즉 ‘구원의 샘’이라고 불렸다.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곳에서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모자이크 식 포장 구역이 발견됐다. 세 분수는 1950년 봉인됐다. 오염 때문에 물을 마실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다.


성당의 정면 파사드 상부에는 성 베드로의 조각상과 성 바오로 조각상이 있다. 프랑스 조각가 니콜로 코르디에리가 만든 것이다. 입구 위 대리석 판에는 라틴어로 ‘사도 바오로 순교 장소에서 세 분수가 경이롭게 솟아났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성당 내부에 있는 제1제대는 성 바오로가 참수당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성 바오로의 머리 모양이 장식돼 있다. 제2제대에는 바오로가 참수당한 뒤 머리가 땅에서 세 번 튀어 오르는 장면을 묘사한 성화가 있다. 바오로가 참수당할 때 묶였던 돌기둥이 보존되어 있고, 세 분수가 솟은 자리에는 델라 포르타가 제작한 감실이 세 군데 마련되어 있다.


성당 안의 기둥은 성 바오로가 참수당할 때 묶였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전설은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기둥은 실제로는 인근에 있던 로마 유적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예배당에는 주로 볼로냐에서 활동했던 화가 바르톨로미오 파세로티가 그린 ‘성 바오로의 참수’ 그림이 걸려 있다.


세 분수 수도원은 수도원과 성당을 겸한 곳이다. 성당 이름은 산티 빈센초 e 아나스타시오 트레 폰타네 성당이다. 수도원을 만든 사람은 교황 호노리오 1세(재임 625~638년)였다. 교황 연대기인 『리베르 폰티피칼리스』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호노리오 1세는 625년 이곳에 수도원 성당을 지었다. 비잔틴에서 온 그리스 수도승들을 배치했다. 1세기 동안 비잔틴식 전례를 거행하는 수도원학교가 도시에서의 수도사 생활을 통제했다.’ 


호노리오 1세가 교황일 때 동로마제국의 많은 수도사가 그리스도 단의론 세력의 박해를 피해 로마로 건너왔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세 분수의 수도원’을 피난처로 제공했다. 아나스타시우스의 리벨리우스라는 사람은 628년 ‘그레고리우스, 아쿠아 살비아이에 있는 킬리키 수도원의 사제’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문구는 호노리오 1세로부터 수도원을 넘겨 받은 수도사들이 지금 터키 남동쪽인 킬리키아에서 왔다는 걸 암시한다. 성 바오로는 터키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리베르 폰티피칼리스』에 따르면 8세기 말 무렵 수도원과 성당에 불이 나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마르티노 1세(재임 649~655년) 등 여러 교황이 성 바오로의 성소를 그냥 놔둘 수 없다며 재건 작업에 나섰다.


세 분수 수도원은 로마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의 유력인사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특히 샤를마뉴 대제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에 토스카나 해안 인근에 있는 기글리오 섬과 오블레텔로 등 11개 지역 관할권을 넘겨주었다. 수도사들은 이 지역에서 세속적 사법권까지 행사할 수 있었다. 수도원은 13세기 들어 전성기를 맞았다. 그 덕분에 카사노바, 아라보나, 몬탈토 디 카스트로, 팔라졸로 등에 자매 수도원 4곳을 더 세울 수 있었다.


이 수도원에 아나스타시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페리스아 출신 순교자 성 아나스타시우스의 유해가 안치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628년에 목숨을 잃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군인이었다. 성당에 안치된 유해는 641년 동로마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기증한 것이다. 


650년 무렵 한 독일 순례자가 『로마 성 밖 성스러운 땅의 기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에 ‘수도원 성당은 성 아나스타시우스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장소’라는 설명이 처음 나온다.


나중에는 성 빈센초라는 이름도 붙었다. 1370년 스페인이 ‘사라고사의 성 빈센초’의 유해를 성당에 기증한 덕분이었다. 성 빈센초는 기독교 박해가 심했던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순교한 성인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수도원에서는 양을 키운다. 양에게서 얻은 털로 제단 보를 짜야 하기기 때문이다. 교황은 해마다 1월 21일 성 아그네스 축일에 이 수도원의 양에게 축복을 내린다. 수도원은 이때 양털로 짠 제단 보를 교황청에 건네준다. 교황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축일에 새로 대주교가 된 사제들에게 제단 보를 선물한다.  


산타 마리아 스칼라 코엘리 성당은 성 바오라로 순교하기 직전에 잠시 갇혀 있던 곳에 만든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의 지하 묘지가 바로 그 장소라고 전해진다. 이 성당은 원래 3세기 말에 순교한 성 제노의 전설에 기반을 두고 생긴 성소였다. 


당시는 고대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매우 심한 시절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에 욕장을 건설하면서 성 제노 등 많은 기독교인을 일꾼으로 동원했다. 완성 후에는 감옥에 가두는 비용을 절약하려고 교인들을 지하에 생매장 했다. 이때 순교한 사람들은 ‘성 제노와 동료’라는 이름으로 성인이 됐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순교한 성 제노와 기독교도 1만 명의 유해가 묻혀 있는 땅 위에 성당이 건설됐다. 바로 산타 마리아 스칼라 코엘리 즉 ‘성모 마리아 천국의 계단 성당’이었다. 기독교도 생매장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성당 규모를 고려하면 1만 명이라는 수치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전설에 따르면 12세기 프랑스 출신의 성 베르나르가 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집전하던 도중 환영을 보았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사다리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그 이후 이 성당은 ‘천국행 계단 성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제단에는 이를 상징하는 스칼라 코엘리 즉 ‘천국의 계단’이 있다. 성 베르나르는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53년)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 등 유럽에서 제2차 십자군 원정군을 모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제였다. 


성 베르나르가 환영을 본 이후 이곳에서 치러지는 추모 미사에서는 면죄부를 주는 관습이 생겼다. 1520년대에는 스칼라 코엘리에서 추모 미사를 거행해달라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른바 ‘미사 유언’이 유행했다. 나중에는 로마의 다른 교회에도 면죄부 제공의 특혜가 주어졌다. 


성 베르나르가 환영을 봤다는 옛 성당은 16세기 들어 허물어질 정도로 낡은 상태였다. 이곳을 새롭게 단장한 사람은 1582년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였다. 그는 사재를 털어 낡은 성당을 헐고 새 성당을 만들었다.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의 손자였던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추억이었다. 


1534년 바오로 3세가 교황 자리에 오르자 겨우 열다섯 살이던 파르네세는 세 분수 수도원의 수도원장 직무대행 자리를 맡았다. 그가 관할한 곳은 세 분수 수도원과 주변의 모든 성당이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중반의 소년일 때 수도원에 갔던 그가 임무를 마치고 떠난 것은 스물네 살 성인이 됐을 때였다. 그는 이곳에 머문 9년 동안 각종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낡아 허물어질 위기에 몰린 옛 성당을 새로 지은 것은 이런 감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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