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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1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억압에서 구원과 해방의 상징으로


기독교를 전 세계로 전파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성 베드로는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세 번 갇힌 적이 있었다. 두 번은 예루살렘에서, 한 번은 로마에서였다. 예루살렘에 갇혀 있었던 이야기는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나온다.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꺼내고는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했다(제5장 17~25절).’


‘헤롯 왕이 교회 사람들 중에서 여러 명을 해치려고 했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다. 베드로는 옥에 가두었다. 헤롯이 끌어내기 전날 밤 베드로는 쇠사슬에 묶여 두 병사 틈에서 잤다. 파수꾼은 문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때 감옥에 광채가 비치더니 주님의 사자가 다가왔다. 사자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치면서 어서 일어나라고 말했다. 쇠사슬은 저절로 풀렸다. 베드로가 두 파수꾼을 지나 성에서 나가는 쇠문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문은 저절로 열렸다. 문을 빠져나간 다음 천사는 떠났다(제12장 1~7절).’


성 베드로는 로마에서도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기록은 없고 다만 전설로 전해지는 내용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기 전에 쇠사슬에 묶인 채 고대 로마 감옥인 마메르티눔에 갇혀 있었다. 이곳은 잡범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자나 야만족 지도자를 가둬두는 곳이었다. 그는 초대 교황이었기에 이곳에 갇힐 만큼 중요성을 인정받기에 충분했다는 게 전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역사학적으로는 옳다고 보기 어렵다. 먼저 성 베드로가 실제 로마에 갔는지 아닌지, 그곳에서 순교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성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는 당시 마메르티눔에 갇힐 정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단순히 문제만 일으키는 유대인 분파의 지도자로 생각됐다. 로마 사회에 이렇다 할 기반도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투옥됐다 하더라도 잡범을 가둬두는 프라이펙투라 우르비스 즉 로마 시청의 감옥에 갇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초기에는 교회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은 곳도 프라이펙투라 근처였다. 


성 베드로의 로마 쇠사슬에는 성 발비나와 교황 알렉산데르 1세(1재임 07~116년)의 전설이 전한다. 


2세기 무렵 로마에 대대장을 지낸 퀴리누스라는 군인이 있었다. 그는 정부로부터 알렉산데르 1세와 헤르메스라는 사내를 감옥에 가둬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둘을 따로 투옥한 뒤 쇠사슬을 채워 엄중 감시했다. 어느 날 저녁 천사가 알렉산데르 1세에게 나타났다. 그는 쇠사슬을 풀어주고 헤르메스의 감옥으로 데리고 갔다. 둘은 밤새 종교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날 아침 퀴리누스는 두 사람이 같은 감방에 있는 걸 보게 됐다. 헤르메스는 마침 알렉산데르 1세 덕분에 아들이 살아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퀴리누스의 딸 발비나는 갑상선종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데르 1세에게 물어보았다.


“내 딸을 살려준다면 우리 가족은 기독교도가 될 것이오.”


“딸을 내가 원래 갇혀 있던 감방에 데리고 오시오.”


“당신은 지금 여기서 헤르메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떻게 원래 감방에 간단 말이오.”


“나를 여기 데리고 오신 분이 나를 다시 그곳으로 데려가실 것이오.”


지오반니 란프랑코 '베드로의 해방' at 버밍엄미술관

퀴리누스는 간수에게 알렉산데르 1세가 절대 감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잘 지키라고 지시하고는 서둘러 집에 갔다. 그는 아픈 딸을 가마에 태워 감방으로 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곳에는 이미 알렉산데르 1세가 와 있었다. 몸에는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퀴리누스는 이 모습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믿음이 차오른 발비나도 무릎을 꿇고 알렉산데르 1세를 감고 있던 쇠사슬에 입을 맞추었다. 교황은 담담하게 말했다.


“쇠사슬에 입을 맞출 필요는 없소. 나가서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찾아보시오. 믿음을 갖고 그 쇠사슬에 입을 맞추면 너는 회복할 것이오.” 


퀴리누스는 베드로가 순교하기 전에 갇혀 있던 감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딸을 말에 태워 감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베드로를 묶었던 쇠사슬이 그대로 있었다. 발비나는 무릎을 꿇고 쇠사슬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병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퀴리누스는 알렉산데르 1세와 헤르메스를 풀어주었다. 물론 딸, 아내와 함께 교황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교황은 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다.


“앞으로 해마다 발비나가 병에서 나은 날에 쇠사슬의 기적을 찬양하는 행사를 열리라. 쇠사슬이 있던 곳에 베드로에게 바치는 성당을 지으리라.”


불행하게도 퀴리누스는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붙잡혀 116년 3월 참수 당했다. 그는 비아 아피라 거리에 있는 프라텍스타투스 카타콤베에 묻혔다. 발비나는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처형당했다. 그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참수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초기 기독교는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종교적 자유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의 억압, 그리고 구원과 해방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물이라고 봤다. 고대 로마 황제들이 초대 교황 성 베드로에서 6대 교황 알렉산데르 1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독교인을 쇠사슬로 묶었지만 결국 교회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2세기 그리스의 주교였던 폴리파르프은 ‘쇠사슬은 성인의 장식품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의 왕관’이라고 표현했다.


성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감독에 갇혀 있을 때 묶였던 두 쇠사슬은 예루살렘에 보관돼 있었다. 그곳에서 기독교 순례자들의 숭배를 받았다. 이 쇠사슬이 이스라엘을 떠나 로마로 건너온 것은 5세기 무렵이었다.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2~450년)의 부인 아일리아 에우도키아는 438~439년 성지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권력을 놓고 다투던 시누이 풀케리아를 누르기 위해서는 종교적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이던 성 유베르날에게서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선물 받았다. 


로마를 찾는 순례자와 여행자를 위해 12세기에 쓴 안내서인 『미라빌리아 우르비스 로마이』에 따르면 에우도키아는 두 쇠사슬 중 하나는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무덤이 있는 ‘성 사도들의 교회’에 보관하게 했다.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하는 바람에 교회는 파괴돼 없어졌고 쇠사슬도 사라져 버렸다.


에우도키아는 나머지 쇠사슬 하나를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에게 맡겼다. 열일곱 살이던 437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서로마제국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결혼한 딸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두 아기를 낳은 뒤 어머니가 건네준 쇠사슬을 들고 로마로 건너갔다. 

 

에우독시아는 로마인들이 매년 8월 1일을 아우구스투스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대 로마에서 8월은 원래 섹스틸리스로 불렸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해 명칭을 오거스트로 바꿨다. 로마인들은 초대 황제가 안토니우스에게 거둔 승리를 기억하기 위해 8월의 첫날을 축일로 지정했던 것이다. 이교도 제국의 황제가 여전히 로마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그녀는 관습을 바꾸기로 했다.  


에우독시아는 아우구스투스 축일을 성 베드로의 쇠사슬 축일로 변경하기로 했다. 그녀는  교황 대 레오 1세(재임 440~461년)와 논의한 뒤 “이교도 황제의 축제는 중지하고 성 베드로의 축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쇠사슬을 로마인들에게 공개했다. 


에우독시아는 고대 로마 시대에 서민 감옥이었던 프라이펙투라 부근에 새 성당을 건설했다. 그곳에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보관하게 했다. 당시에는 성 베드로가 갇혀 쇠사슬에 묶인 곳이 프라이펙투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곳에 성당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성당의 이름이 에우독시아나 또는 티툴루스 에우독시아라고 불렸다. 세월이 흐른 뒤에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즉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에우독시아가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전에 다른 성당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에 로마를 방문한 한 순례자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비문 내용을 베껴 놓은 글이 그 사실을 전한다. 에페수스 공의회에 참석했던 필리푸스라는 사제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가 바로 그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에우독시아가 쇠사슬을 꺼냈을 때 로마의 쇠사슬과 하나로 합쳐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대 레오 1세가 로마의 쇠사슬을 가져와 예루살렘의 쇠사슬과 비교해보고 있을 때 두 쇠사슬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한다. 


합쳐졌다는 쇠사슬은 지금 성당의 주 제단 아래에 안치돼 있다. 길이는 2m 정도다. 한쪽 끝에는 고정용 고리가 달려 있다. 성당의 신도석 천장에는 두 쇠사슬이 합쳐져 하나가 될 때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기적을 묘사한 프레스코 그림이 새겨져 있다. 1706년 지오반니 바티스타 파로디가 그린 ‘쇠사슬의 기적’이다. 


중세 기독교도들은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만지면 병자가 낫고, 쇠사슬을 꺼내면 악마가 달아난다고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969년 한 오토 황제와 친분관계를 갖고 있던 한 공작이 귀신에 씌었다. 그는 치아로 자신의 살을 물어뜯기도 했다. 황제는 친구인 공작을 교황 요한에게 보냈다. 교황은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가지고 와 공작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갑자기 공작의 목에서 악령이 튀어나오더니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은 중세시대에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교황 하드리아노 1세(772~795년), 레오 3세(795~816년), 스테파노 4세(816~817년), 그레고리오 4세(827~844년)는 복구공사를 하거나 치장 작업을 거행했다.


성당 규모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때때로 공의회가 열리거나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개최되기도 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년)는 1073년 이 성당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 동안 성당은 매우 황폐해졌다. 1448년 성당 관리를 맡은 니콜라우스 추기경은 사비를 들여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실시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공사에 사용하라며 많은 재산을 남겼다. 그 덕분에 교황 식스토 4세(재임 1471~84년)와 율리오 2세(재임 1503~13년)는 공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현재 성당의 포르티코(기둥을 받쳐 만든 현관 지붕)와 수도원은 이 시기에 만든 것이다. 


5세기에 만들어진 성당의 긴 애프스에는 1577년 야코포 코피가 프레스코 그림을 그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이 그림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성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장면, 유베날이 쇠사슬을 에우독시아에게 선물하는 장면, 에우독시아가 쇠사슬을 교황에게 전달하는 장면이다. 


1875~77년에도 성당 재건 공사가 실시됐다. 공사 기간 중에 쇠사슬을 평소에도 볼 수 있도록 주 제단 아래 마루를 파서 콘페시오를 만들었다. 콘페시오는 순교자의 유해, 성 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성당의 제단 지하에 설치한 작은 묘실이다. 이전에는 쇠사슬을 성구보관실에 보관하다 특별히 중요한 날에만 대중에게 공개했다. 


에우독시아가 성당을 건설한 지역은 원래 고대 로마인의 주거지였다. 네로 황제가 만들려고 했던 도무스 아우레아 즉 황금궁전의 서쪽 끝부분이었다. 20세기 들어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쇠사슬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건설한 주택과 예배당이 나왔다.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성당 복원 작업을 실시하기 전 성당 마루 아래를 다시 들여다봤더니 네 겹으로 쌓인 고대 건축물의 흔적이 나타났다. 가장 아래쪽에는 BC 2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 바닥이 깔린 집 두 채가 나왔다. 그 위에는 1세기 무렵 새로운 건축물이 만들어진 흔적이 보였다. 2세기 무렵 건물 가운데 부분에 덧붙인 연못또는 물 저장고를 갖춘 열주 회랑 정원도 나타났다. 


맨 윗부분에는 3세기 말에 만든 애프스(교회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 부분)를 갖춘 커다란 홀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초기 기독교 예배당 즉 쇠사살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들어서기 직전의 교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이 복원한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의 원래 모습을 보면 길이 61m, 폭 29m였다. 입구에는 큰 아치형 문 다섯 개가 달려 있었다. 중앙 신도석 벽에는 창문 17개가 있었다. 신도석 양측에는 아치볼트, 우리말로 장식 홍예 창도리가 달렸다. 그 아래에는 기둥 열 개가 이어져 있었다.


쇠사슬 외에 성 베드로의 쇠사슬 성당에서 유명한 유적은 조각상 7개다. 이 조각상들을 보려고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성당 앞에 줄을 선다. 특히 여름에는 너무 많은 관람객이 몰려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다. 가장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기는 11월의 비오는 날이라고 한다.


조각상 7개는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3년) 시대에 만든 것이었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히고 싶어 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젊었을 때 추기경으로 근무했던 이 성당에 묻혔다. 교황은 자신의 무덤을 꾸미려고 미켈란젤로 등에게 조각상 40개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7개밖에 완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만들어 중앙에 세운 ‘모세’다. 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십계명’을 받아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장면을 담았다. 모세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잘못 번역한 탓이라고 한다. 당시 히브리어에는 ‘빛’과 ‘뿔’이라는 단어가 비슷했다. 


모세 왼쪽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 오른쪽에는 야곱의 조강지처 레아가 있다. 이 두 조각상도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개는 누가 만들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미켈란젤로 조각상을 보기 위해 여름에는 엄청나게 많은 관람객이 몰린다. 가장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기는 11월의 비오는 날이라고 한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노예의 조각상 두 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미완성 노예 조각 4개, 역시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 있는 미완성 니케 조각상 등도 원래 이 성당에 설치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성당의 긴 애프스는 5세기에 만든 원래 부분이다. 여기에 달린 장방형 창문 2개는 15세기에 만든 것이다. 애프스에는 1577년 야코포 코피가 그린 프레스코 그림이 달려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 성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장면, 유베날이 쇠사슬을 에우독시아에게 선물하는 장면, 에우독시아가 쇠사슬을 교황에게 전달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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