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올라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제대로 숨도 못 쉬는 어머니를 포옹하면서 눈물을 터뜨렸다.
“어머니! 당신이 이겼습니다. 당신에게는 행복한 승리이지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조국을 구하셨지만 저는 스스로를 망치게 됐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아주 충실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라는 걸 기억하십시오.”
코리올라누스는 어머니와 아내, 두 아들을 데리고 사령관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어머니와 상의하면서 하루를 다 보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로마 원로원은 코리올라누스의 복귀와 관련해서 평민에게 어떤 제안도 내놓지 않는다. 볼스키가 전쟁을 끝내고 선린관계 수립을 검토할 때까지 평민은 어떤 투표도 실시하지 않는다. 코리올라누스는 진지를 걷고 우호적인 지역을 거쳐 군대를 철수시킨다. 그는 이와 관련해서 볼스키에게 설명하고 그가 이룬 업적을 알린 다음 적인 로마를 선린으로 받아들여 정당한 조약을 맺자고 요청한다. 조약의 조건이 공정하고 속임수가 없는지는 볼스키가 살피도록 한다.
볼스키가 성공에 자만한 나머지 협상을 거부한다면 코리올라누스는 사령관 자리에서 자진사퇴한다. 인재가 부족하다면 볼스키는 다른 사령관을 데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군대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위험을 감수한다면 큰 손실을 입은 뒤에야 무엇이 이득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코리올라누스가 어머니와 숙의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모든 사람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내용이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도 있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리들이 ‘로마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면서 실망감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면 코리올라누스는 그들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소명할 기회도 없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코리올라누스는 이것뿐만 아니라 더 큰 다른 위험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코리올라누스는 가족과 차례로 포옹한 뒤 천막에서 내보냈다. 그들을 따라 다른 여인들은 모두 로마로 돌아갔다.
코리올라누스는 병사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는 왜 전쟁을 끝내려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병사들에게 용서해달라고 진심으로 간청했다. 귀향하더라도 그가 안겨준 많은 이익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다른 시민들이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주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외에도 병사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말을 한 뒤 다음날 진지를 걷고 철수하자고 했다.
여인들이 로마에 돌아가기 전에 벌써 위기가 끝났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모든 로마인은 크게 기뻐하며 성문을 열고 여인들을 환영하러 달려갔다. 그들을 껴안으면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최악의 위험에서 빠져나와 예기치 않은 행운을 얻은 사람들은 말과 행동으로 기쁨을 표시했다.
로마인은 그날 밤 축제를 열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두 집정관은 원로원 회의를 개최했다. 그들은 코리올라누스의 복귀는 나중에 더 적당한 시간에 결정하기로 결론지었다. 대신 여인들의 열정을 단순히 칭찬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후세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했다. 명예로운 선물도 주기로 했다. 무엇이든지 받는 사람에게는 가장 즐겁고 가장 훌륭한 선물이었다. 평민은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여인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어울리지 않는 선물은 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들이 조국을 위해 중재에 나서기로 결정한 장소에 포르투나 물리에브리스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직접 짓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전쟁을 끝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여신에게 해마다 희생제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원로원과 평민은 국고를 들여 땅을 사서 신에게 바친 다음 그곳에 신전과 제단을 짓기로 결정했다. 폰티프가 거행하는 다른 제례처럼 이 희생제례도 국고를 들여 치르기로 했다. 여인들이 거행하는 첫 의식을 치를 제관은 여인들이 그들 중에서 직정 고르게 했다. 원로원이 이런 법안을 통과시키자 여인들은 첫 여사제를 선택했다. 그들에게 볼스키 진영으로 찾아가자고 제안했고 코리올라누스의 어머니를 설득했던 발레리아가 그 영예를 안았다.
첫 희생제례는 여성들이 거행했다. 발레리아가 의식을 먼저 시작했다. 성스러운 구역에 제단이 세워졌고 나중에 신전과 조각상도 설립됐다. 다음해의 12월, 로마인이 칼렌다이라고 부르는 새 달이 뜨는 날이었다. 이날은 전쟁을 끝낸 날이었다.
첫 희생제례를 치른 다음 해에 국고를 들여 지은 신전이 완성됐다. 그리고 퀸틸리스 달의 일곱 번째 날에 봉헌식이 치러졌다. 봉헌식을 거행한 사람은 그해 집정관이었던 프로쿨루스 베르기니우스였다.
원로원은 신전 건설 및 동상 제작비 전액을 국고에서 충당하기로 결정하고, 여인들이 직접 돈을 내 다른 동상을 만들기로 했다. 두 동상은 신전 봉헌식이 열린 첫 날 함께 세워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상이 말을 웅얼거렸다. 멀리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도 들릴 정도의 큰 소리였다. 그 말의 뜻은 이러했다.
‘여인들이여! 그대들은 나를 모시는 데 있어 신성한 도시의 법에 잘 순응했도다.’
현장에 있던 여인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말을 한 게 동상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믿었다. 특히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느라 동상이 말하는 순간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걸 본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나중에 두 번째 사례가 일어났다. 신전에 사람이 꽉 찼을 때 우연히 아주 조용한 순간이 찾아왔다. 그때 동상이 더 큰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 없게 됐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걸 알게 된 원로원은 다른 희생제례와 의식을 해마다 거행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모두 종교 의례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시한 대로였다.
사제들의 충고에 따라 여인들은 새로운 관습을 만들었다. 두 번 결혼한 여성은 누구라도 이 동상에 화관을 씌우거나 직접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상에 바치는 모든 공경과 예배는 갓 결혼한 여성에게 맡기도록 했다.
로마 여인들이 떠난 이후 새벽 무렵에 코리올라누스는 군대를 인근 나라로 이동시켰다. 그는 볼스키 영토에 진입했을 때 모든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자신에게는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병사들을 해산시켜 집에 돌아가게 했다.
그와 함께 전쟁에 나섰던 병사들은 모두 부자가 돼 귀가했다. 전쟁을 마치고 쉬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고 그에게 깊은 호의를 느꼈다. 어머니의 간청 때문에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충분히 용서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볼스키에 남아 있었던 젊은이들은 군대에 나섰던 사람들이 얻은 엄청난 전리품을 질시하게 됐다. 로마를 함락함으로써 로마인들의 자존심이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을 보지 못해 실망하게 됐다. 이들은 코리올라누스에 분노하게 됐다. 결국 그들은 볼스키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삼아 분노를 키우고 불경한 행동을 저지르게 됐다.
특히 코리올라누스에게 분노를 터뜨린 사람은 툴루스 아티우스였다. 그는 모든 도시의 여러 사람으로 구성된 큰 당파를 이끌고 있었다. 질투를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코리올라누스가 승리를 거두고 볼스키로 돌아올 경우 비밀리에 속임수로 그를 제거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올 경우 그를 반역자로 몰아 사형시킬 작정이었다.
상당한 지지 세력을 모은 아티우스는 이미 일어났던 일과 사실은 엉터리로 왜곡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추론하면서 그를 고발했다. 코리올라누스에게 지휘권을 반납하라고 촉구했고, 그의 행동을 해명하라고 재촉했다. 아티우스는 볼스키에 남은 병사들의 장군이었다. 그리고 민회를 소집하고 누구든지 기소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코리올라누스는 이런 요구를 거부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전쟁에서 했던 행동을 설명한 다음에 볼스키가 결정한다면 지휘권을 내려놓겠다고 말했다. 대다수 시민들이 아티우스에게 매수당한 단 하나의 도시가 독단적으로 이 문제를 결정해서는 안 되며, 모든 도시가 합법적인 모임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스키가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모든 도시로부터 대표단을 모으는 것은 관습이었다.
아티우스는 이런 제안을 거절했다. 코리올라누스는 말을 잘 하기 때문에 그가 지휘권을 보유한 상태로 전쟁에서 수행한 활약상을 설명하게 할 경우 대다수를 설득해서 반역자라는 처벌을 받지 않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더 빛나고 더 칭찬을 받을 게 뻔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전쟁을 끝낸 것에 대해 모두의 동의를 받아 내리라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갈등이 이어졌다. 그들은 민회와 포럼에서 매일 논쟁하고 다투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상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슷한 세력으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결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티우스는 하루 날을 골랐다. 코리올라누스에게는 공직에서 사퇴하고 반역 재판에 출정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일부 무모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받을 희망을 심어주고 불경스러운 행동을 이끌라고 촉구했다.
코리올라누스는 정해진 날 민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재판정 앞으로 나가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가 자발적으로 사퇴하지 않을 경우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라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코리올라누스는 변론을 펼치기 위해 재판정에 올랐다. 아티우스 파당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가 연설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으며 고함이 이어졌다.
“그를 쳐라.”
“돌을 던져라.”
가장 무모한 사람들이 코리올라누스를 에워싸고 돌을 던져 죽여 버렸다. 그는 포럼에 내팽개쳐졌다. 비극적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물론 그가 죽은 뒤에 나타난 사람들은 그가 볼스키를 위해 헌신했던 봉사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살인자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재판도 없이 폭력을 휘둘러 총사령관을 죽인 불법적인 행동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었다. 코리올라누스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죽음을 맞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주어져야 하는 명예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럼에 가지고 옴으로써 그에게 보답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준비 됐을 때 사람들은 그를 최고사령관 옷을 입혀 아름답게 장식한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상여 앞에는 각종 전리품과 왕관, 그가 정복한 도시 대표들을 앞세웠다.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젊은이들이 상여를 들었다. 그들은 눈에 잘 띄는 외곽 지역까지 상여를 메고 간 귀 미리 준비한 장례 장작더미에 올렸다. 시신을 따라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한탄했다.
사람들은 코리올라누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자를 살해했다. 그리고 직접 만든 모든 제물을 장작더미에 올렸다. 그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은 불길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후 그의 유해를 모아 그 자리에 묻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높은 언덕을 쌓아 웅장한 기념비를 만들었다.
코리올라누스는 이렇게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을 지배한 모든 오락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부당한 일을 하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사악한 일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게 만드는 걸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결한 마음의 소유자였고 관대했으며 친구의 어려움을 알게 되년 늘 도와주려고 했다. 공적 업무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도 귀족 중 누구보다 뒤지지 않았다. 로마의 반란 요인이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로마 공동체는 더 큰 패권을 장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성격에 모든 미덕이 동시에 나타나기는 불가능하다. 자연에 의해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 중에서 모든 면을 통틀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나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은 코리올라누스에게 미덕을 선물하면서 불행한 흠결과 치명적 결함도 함께 보탰다. 코리올라누스는 부드럽고 활기찬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 호의를 얻을 수 있는 상냥함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겼을 때 달래거나 회유하는 기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언제가 가혹하고 엄격했다.
그를 다치게 한 것은 이런 특징만이 아니었다. 법을 집행하고 법을 준수하는 문제에 있어서 거침없이 과도한 엄격성, 합리주의에 전혀 양보하지 않는 경직성도 그의 성격이었다. ‘도덕적 미덕은 중용이지 극단이 아니다’는 고대 철학자의 금언은 틀린 게 없어 보인다.
코리올라누스가 조국에서 쫓겨나고 모든 축복의 즐거움을 박탈당한 것은 엄격하고 극단적인 정의를 추구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평민에게 합리적 양보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들의 요구를 다소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른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평민에 반대함으로써 그는 증오를 자초했고 결국 추방당했다.
로마와의 전쟁을 끝낸 뒤 볼스키 군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고, 로마가 귀환을 허락할 때까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오롯이 그의 마음먹기에 달렸을 때 그는 적의 음모와 대중의 어리석음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사령관 자리를 맡긴 사람들에게 전쟁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한 뒤 그의 일신을 맡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판결을 받으면 법에 정한 대로 처벌을 받을 생각이었다. 결국 이 같은 극단적인 정의 때문에 그는 유감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이제 로마인들이 코리올라누스의 지휘를 받는 볼스키와 아이퀴 군대에 의해 위협을 받을 위험은 사라졌다. 이 같은 위험은 로마 건국 이래 겪었던 어떤 일보다 더 끔찍했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