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훈족의 침략을 피해라

by leo


1. 훈족의 침략


“훈족이 쳐들어옵니다. 아틸라가 군대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습니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452년 3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사내가 공포와 절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이탈리아 북부 알티눔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몸에 걸친 옷은 마치 걸레조각처럼 보였습니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걸쳤다기보다는 그냥 몸에 걸려 있었습니다. 입술은 바싹 마른 채 터져 있었고, 얼굴과 손에는 땟국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내는 알티눔 성문 앞에서 두어 번 소리를 지른 뒤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습니다. 성문을 지키던 로마군 병사 두 명이 문을 열고 달려 나가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사내의 큰 소리를 들은 알티눔 주민들이 순식간에 성문 근처로 몰려왔습니다. 병사들은 사내의 입에 물을 넣어 주었습니다. 잠시 후 사내는 힘들게 눈을 떴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오?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아틸라의 훈족이 여기로 온다니 무슨 말이오?”


“훈족은 갈리아 아니면 게르마니아 땅에 있지 않소?”


주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앞 다퉈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찌나 많은 질문이 터져 나왔는지 사내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습니다.


사내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힘들게 상체를 일으켜 앉아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아퀼레이아에서 도망친 마르쿠스입니다. 아틸라는 갈리아에서 로마와 갈리아 연합군에 패해 쫓겨났습니다. 화가 난 그는 게르마니아로 돌아가다 방향을 틀어 이탈리아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미 아퀼레이아는 훈족에게 약탈당해 폐허가 됐습니다. 알티눔에는 이삼 일 뒤면 도착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달아나든지, 아니면 맞서 싸울 준비를 하든지 해야 할 겁니다. 아틸라에게는 맞서 싸워도 죽고 항복해도 죽는답니다.”


마르쿠스라는 사내의 말은 알티눔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동시에 엄청난 공포감을 퍼뜨렸습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하는 여인네들이 있는가 하면, 넋이 나간 듯 하늘만 올려다보거나 땅만 내려다보는 사내들도 있었습니다.


훈족이 어떤 부족인지, 아틸라가 누구인지 모르는 어린 것들만 무심하게 깔깔거리며 뛰어다닐 뿐이었습니다.


마크루스의 말처럼 아틸라는 훈족을 이끌고 토스카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이탈리아인들이 최후방어선이라고 여겼던 아퀼레이아로 쳐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주둔한 로마군은 훈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퀼레이아는 얼마나 심하게 약탈당했던지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틸라는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토스카나 지방으로 행군했습니다.




알티눔은 2세기 무렵만 해도 로마 해군 기항지로 사용하던 곳이었습니다. 로마 군단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야만족이 설친 5세기 무렵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곳에 군대라고는 성벽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 수십 명이 고작이었습니다. 주민들에게는 훈족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어디에 가든 안전하지 못합니다. 달아나도 죽고, 싸워도 죽는다면 싸우는 게 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남자들은 모두 성벽 위에 올라가 적과 싸우고 어린이, 노인, 여인들은 뒤에서 지원을 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훈족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병사들을 모으고 투지를 불태울 수는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칼도 없고 창도 없어요. 활이나 화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성벽 밖에 몰려올 훈족에게 던질 돌도 찾기 힘듭니다. 여기 남아 있다가는 모두 몰살할 겁니다. 어디로든 훈족이 올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나야 합니다.”


알티눔의 광장에 모여 갑론을박하던 주민들은 결국 달아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쟁을 피해 도망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말을 꺼냈습니다. 평민이었지만 나이가 많고 여러 곳으로 다녀본 경험이 많아 늘 사람들에게 다른 지역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닷가로 갑시다. 내가 알기로 훈족은 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바닥사에 토르첼로를 포함해서 여러 섬이 있습니다. 논과 밭은 없지만 땅이 비교적 비옥하기 때문에 농토로 만들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 섬들에서 훈족이 물러날 때까지 서너 달 버팁시다. 아무리 길어도 1~2년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알티눔 주민들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짐을 꾸렸습니다. 잠시라도 지체했다가는 훈족이 성을 포위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날 밤 바로 떠나야 했습니다.


토르첼로 섬은 당시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던 무인도였습니다. 작은 배를 나눠 타고 섬으로 건너간 주민들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섬 주변은 개펄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훈족 병사들이 큰 배를 타고 건너오기는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나눠 타고 올 만큼 작은 배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올 겨울만 넘기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내년 봄에 귀향해서 부서진 집을 고치고 다시 농사를 지으면 예전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알티눔 주민들은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시름을 덜었습니다. 노인의 말처럼 섬의 땅은 비교적 비옥했습니다. 서둘러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 가을에 충분히 밀 같은 양식을 얻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알티눔에서 가져간 양식과 가축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인도였던 토르첼로 섬에는 사람이 살게 됐습니다. 베니스로 피난 온 사람들은 알티눔 주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파두아, 아퀼레이아, 트레비소, 알티노, 콩코르디아 등의 주민들도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토르첼로 외에 암니아나, 메타마우코 등에 나눠 살았습니다. 여러 도시에서 여러 민족이 피난 왔기 때문에 마을의 인적 구성은 다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베니스의 시작이었습니다.


2. 베니스의 역사


아드리아 해에 붙은 베니스 일대에는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습니다.


기록으로만 보면 BC 1세기 고대 로마의 유명한 역사학자였던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에 베니스 이야기가 처음 나옵니다. BC 13세기 트로이가 멸망할 때 탈출했던 안테노르가 파플라고니아에서 쫓겨난 에네티족과 함께 아드리아해에 세운 도시였다는 겁니다. 트로이인들과 에네티족을 합친 주민들을 베네티족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전성기에도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일부 로마 자료에 보면 습지 석호의 섬에 어부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을 ‘석호 거주자’라는 ‘인콜라이 아쿠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네티족이 인콜라이 아쿠나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곳은 사냥과 어업에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소금을 생산하기도 했고 해상무역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6년 행정구역 재정비를 실시할 때 ‘베네티아(Venetia)’가 10구역의 일부로 호함됐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단수형인 이 지명은 비잔틴제국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그들은 베니스를 ‘베네티카(Venetikà) 또는 라틴어로 베네티아 마리티마(Venetia maritima)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현재 베니스 메인 섬을 중심으로 주변 섬들에 있던 거주지를 모아 통합해 베니스라는 도시가 생겼습니다.


특이한 점은 현재 베네치아(Venezia)라는 이름은 복수형이라는 사실입니다. 라틴어 단수형 베네티아(Venetia)가 아니라 복수형 베네티아이(Venetiae)의 격변화 된 단어라는 것입니다. 베니스가 여러 섬의 통합 도시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뜻에서 처음에 사용하던 베네티아 대신 나중에는 베네티아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입니다.




베니스 건국 전설과 서류를 모아놓은 11세기 서적인 『크로니콘 알티나테』에 따르면 베니스 도시 창건일은 첫 성소인 리알토의 산 지아코모 교회 건립 때였다고 합니다. 교회 봉헌일은 421년 3월 25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모순이 생깁니다. 훈족이 쳐들어오기 이전에 교회가 만들어진 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교회는 실제 훨씬 이후인 10세기 이후에 건설됐다고 합니다. 현재 교회가 서 있는 부지를 다룬 11세기 문서가 있는데 여기에도 교회 이야기는 없습니다. 문서에 교회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세기입니다. 그렇다면 베니스의 창건을 훨씬 앞당기려고 교회 측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작은 어촌 마을이 아니라 후세의 우리가 알고 있는 베니스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설명하는 역사적 자료는 하나도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베니스의 원주민은 피난민이었다는 데에 견해 일치를 보입니다.




알티눔 주민들이 달아났던 토르첼로 섬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알티눔의 지도자였던 기독교 주교도 주민들과 함께 섬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 덕분에 토르첼로 섬은 638년 공식 주교좌로 승격했습니다. 이후 1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주민들은 성 헬리오도루스의 유해도 함께 가져갔습니다. 성 헬리오도루스는 이후 토르첼로 섬의 수호성인이 됐습니다.


사람이 많이 살게 된 토르첼로는 이후 번영가도를 달렸습니다. 역설적으로 야만족의 연이은 침략이 번영의 원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토르첼로는 비잔틴 제국과 문화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잔틴 제국의 서쪽 최전방 방어벽 역할을 한 셈이었습니다.


10세기 무렵 토르첼로 인구는 1만~3만 5천 명 정도까지 늘어났습니다. 바닷가 습지에 위치한 덕분에 엄청난 소금이 생산됐습니다. 소금은 토르첼로 경제의 뼈대 역할을 했습니다. 항구는 서쪽의 유럽과 동쪽의 아시아가 거래하는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토르첼로는 1348년 흑사병을 겪으면서 몰락했습니다. 게다가 이 무렵부터 토르첼로 주변 습지 면적이 늘어났습니다. 베니스를 포함해 인근 석호 지역의 해발이 낮아진 게 원인이었습니다.


석호에서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결국 항구를 무역항으로 사용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흑사병과 경제적 침체를 견디다 못한 토르첼로 주민 대다수는 베니스, 무라노, 부라노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1689년에는 주교좌 자리도 무라노로 옮겨졌습니다.


토르셀로 섬에는 아주 오래 된 하얀색 바위 의자가 있습니다. 지역 전설에 따르면 아틸라의 권좌였다고 합니다. 의자는 매우 크고 단단해 보입니다. 범접하기 힘든 권위가 넘쳐 흐르는 것 같습니다.


아틸라는 토르셀로 섬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로마로 행진하다 마음을 바꿔 북쪽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틸라뿐만 아니라 훈족 군대 중 단 한 명이라도 그곳에 발을 디뎠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의자는 누구의 것일까?


역사학자들은 의자의 주인을 당시 토르첼로 섬으로 피신한 주민을 다스리던 지방 행정관의 의자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마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한 지역 군사 책임자를 일컫는 ‘매지스터 밀리툼’의 자리였을 것으로 봅니다. 매지스터 밀리툼은 해당 지역에서는 황제 다음으로 큰 권력을 갖는 지방 최고 행정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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