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의 조상은 누구였을까?(2)

바다 건너 온 펠라스기 인

by leo



원주민은 움브리아 인을 몰아낸 뒤 처음에는 그들의 도시에 정착해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을 기반으로 세력을 다진 뒤에는 땅을 더 넓히려고 일반적인 의미의 야만족뿐만 아니라 이웃인 시쿨리 족과도 싸웠다.


이어 신성한 젊은이 무리가 도시 밖으로 진출했다. 새로운 호구책을 찾아보라며 그들의 부모가 내보낸 젊은이들이었다. 이것은 야만족뿐만 아니라 그리스 인도 따라한 관습이었다.


특정 도시의 인구가 너무 늘어나 땅에서 나는 농산물로는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없게 되거나,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화 때문에 땅이 평소보다 적은 생산물을 허용할 때, 또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일어나 인구를 줄여야 할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신에게 특정한 연령 이하의 사람들을 봉헌하곤 했다. 그들에게 무기를 준 뒤 도시에서 나가게 한 것이다.


만약 인구가 크게 늘어나거나 또는 전쟁에서 이긴 뒤 신에게 감사들 드리는 형식으로 이런 일이 진행되면, 주민들은 먼저 점괘에 따라 신에게 희생물을 바친 뒤 식민지단을 내보내곤 했다. 하지만 신의 분노를 자초하는 바람에 그들을 둘러싼 악으로부터 구원을 찾아야 할 때에는 똑같은 절차대로 의식을 거행해 젊은이들을 내보내면서도 슬픈 심정으로 그들의 용서를 구하곤 했다.



떠나는 젊은이들은 부모의 땅에서 물려받을 지분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땅을 찾아야 했다. 그들을 반갑게 맞아줄 땅을 발견하든지 아니면 전쟁을 통해 정복해야 했다. 그들이 도시를 떠날 때 제물을 바친 신은 대개 그들을 돕거나 모든 인간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은 수준까지 새 식민지가 번성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도시 인구가 크게 늘어날 경우 원주민은 특정 신이나 다른 신에게 특정한 해에 태어난 아이들을 바치곤 했다. 아이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아동 살해는 가장 중대한 범죄로 취급됐다.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면 도시에서 내보내 식민지를 개척하게 했다.


젊은이들이 적의 나라에서 땅 일부를 차지하게 되면 역시 땅이 필요한 나머지 원주민도 곧바로 이웃인 시쿨리 족을 공격해서 도시를 세우곤 했다. 그런 도시 중 일부에는 오늘날까지 사람이 살고 있다. 바로 안템나이, 텔레나이, 피쿨리아, 티부르 등이다. 티부르의 일부 구역은 오늘날까지도 시쿨리 지구라고 불린다. 이들은 이웃 중에서 시쿨리 족을 가장 괴롭혔다. 이런 갈등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이전에 발생했던 어떤 전쟁보다 더 중요한 전쟁이 여러 나라 사이에 발생했다. 전쟁은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리스 테살리에 살던 펠라스기 인 중에서 일부가 조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을 때 이탈리아 원주민에게로 건너가 정착했다. 원주민은 그들과 힘을 합쳐 시쿨리 족과 전쟁을 벌였다. 원주민은 부분적으로는 지원을 얻을 희망을 갖고 그들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그들이 서로 친족 관계였던 게 이유로 보인다. 펠라스기 인도 펠로폰네소스가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펠라스기 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운해 고정된 거주지를 찾지 못하고 많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아카이아의 아르고 근처에서 살았다. 왕이 펠라스구스여서 펠라스기 인이라고 불렸다. 펠라스구스는 제우스와 포르노네우스의 딸인 니오베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니오베는 제우스가 가장 먼저 알았던 인간 여성이었다.


그로부터 여섯 세대가 흐른 뒤 펠라스기 인은 펠로폰네소스를 떠나 당시에는 하이모니아, 지금은 테살리로 불리는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당시 지도자는 아카이우스, 프티우스, 펠라스구스 삼형제였다. 이들은 라리사와 포세이돈의 세 아들이었다.


삼형제는 하이모니아에서 야만족 주민을 몰아내고 영토를 셋으로 나눠 다스렸다. 각 영토에는 그들의 이름을 붙여 프티오티스, 아카이아, 펠라스기오티스라고 불렀다. 펠라스기 인은 그곳에서 다섯 세대 동안 살면서 큰 번영을 누렸다. 테살리에서 가장 풍요로운 평원의 생산물을 마음껏 즐겼다.


하지만 여섯 번째 세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지금은 아이톨리아 인, 로크리아 인이라고 불리는 쿠레테스 인, 렐레게스 인에 의해 테살리에서 쫓겨났다. 이들뿐만 아니라 파르나소스에 살던 사람들과 프로메테우스와 오케아누스의 딸인 클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디우칼리온이 다스리던 사람들도 이들을 쫓아냈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흩어진 펠라스기 인 중 일부는 크레타로 갔다. 다른 사람들은 키클라데스 제도로 불리는 섬으로 갔다. 일부는 올림푸스 인근의 헤스티아이오티스와 오사에, 다른 사람들은 바다 건너 보이오티아, 포키스, 에우보이아로 갔다.


그 중 일부는 아시아로 넘어가 헬레스폰트 일대 해변지역과 여러 섬을 차지했다. 그 중 하나는 오늘날 레스보스로 불린다. 이들은 크리나쿠스의 아들인 마카르의 지배를 받고 있는 초기 정착민과 힘을 합쳐 살았다. 펠라스기 인 중 대다수는 내륙으로 방향을 바꿔 도도나의 거주민 사이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들 중 누구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 펠라스기 인은 상당한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땅이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없게 돼 주인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펠라스기 인은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가라는 신탁에 따라 도도나를 떠났다. 당시에는 사투르니아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펠라스기 인은 많은 배를 준비한 뒤 이오니아 해를 가로질러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도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익숙하지 않았던 남쪽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그들은 먼 바다로 밀려났고 결국 포 강 하구 인근에 도착하게 됐다.


더 이상 고난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서 하선했다. 일이 잘 안 풀릴 경우 철수할 수 있도록 배를 지킬 인원을 배치한 뒤 주변을 살폈다. 배에 남은 사람들은 목책을 캠프 주변에 세웠고, 배에 있던 많은 보급품을 가져다 놓았다.


일이 만족스럽게 풀릴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도시를 세웠다. 펠라스기 인은 이오니아 만 일대에 머무른 사람들보다 더 번성했고, 오랫동안 바다에서 지배권을 장악했다. 바다에서 얻은 수입으로 델포이의 신에게 헌금을 꼬박꼬박 바쳤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낸 것보다 더 훌륭했다.


나중에 이웃에 살던 야만족이 엄청난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도시를 떠났다. 이 야만족은 세월이 흘러 나중에 로마에 의해 쫓겨났다. 스피나에 남은 일부 펠라스기 인은 이렇게 해서 소멸했다.


내륙으로 방향을 돌린 펠라스기 인은 이탈리아의 산악 지역을 넘어 원주민의 이웃인 움브리아의 영토로 들어갔다. 움브리아 인은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에 거주했으며 매우 뛰어난 고대 민족이었다. 펠라스기 인은 가장 먼저 발견한 땅을 차지했고, 움브리아 인에게 속하던 작은 마을 여러 개를 빼앗았다. 하지만 대규모 군대가 쳐들어오자 깜짝 놀란 나머지 원주민 지역으로 달아났다.


원주민은 처음에는 펠라스기 인을 적으로 생각하고는 영토에서 몰아내기 위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서둘러 불러 모았다. 펠라스기 인은 쿠틸라 인근에 진영을 꾸릴 수 있었다. 쿠틸라는 신성한 호수 주변에 있던 원주민 도시였다.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에게서 호수에 작은 섬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게 된 펠라스기 인은 그들의 신탁이 이제 실현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루키우스 말리우스가 도도나의 제우스 구역에 있던 삼각대 다리 중 하나에 고대 문자로 새겨져 있는 내용을 봤다면서 그들에게 전해준 신탁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시쿨리의 사투르니아 땅으로 여행을 떠나라

섬이 떠 있는 원주민의 쿠틸리아를 찾으라

이들과 어울린 뒤 아폴로에게 헌금을 바치거라

크로누스의 아들에게 가서 사람을 보내도록 하라’


원주민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오자 펠라스기 인은 손에 올리브 가지를 들고 비무장인 채 다가가 그들의 운명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주 우호적으로 자신들을 받아들여 함께 살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늘이 신탁을 내려 우리를 이 독특한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절대 부담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원주민은 이 설명을 듣고는 신탁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이 그리스 사람들을 동료로 받아들여 다른 야만적인 적에게 맞서기로 했다. 그들은 시쿨리 족과의 전쟁에서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은 펠라스기 인과 조약을 맺었고, 그들에게 신성한 호수 근처에 땅을 떼어주었다. 대부분은 습지였고 그들의 옛 언어 형태대로 오늘날까지도 벨리아라고 불리는 곳이다.


땅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펠라스기 인은 원주민을 설득해 움브리아 인과의 전쟁에 동참하게 했다. 그들은 움브리아 인의 아주 부유한 대도시인 크로톤을 기습해 차지했다. 전쟁 때 방어용 장소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요새화돼 있었고 주변에 풍요로운 목초지도 있었기 때문에 펠라스기 인은 크로톤을 움브리아 인에 맞서 싸울 근거지 겸 성채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펠라스기 인은 여러 도시를 장악해 지배자가 됐으며, 시쿨리 족과의 전쟁에서 열성을 다해 원주민을 지원해 시쿨리 족을 영토에서 몰아냈다. 펠라스기 인은 원주민과 손을 잡고 여러 도시에 정착했다. 그 중 일부는 이전에 시쿨리 족이 살던 곳이었으며 다른 일부는 직접 건설한 곳이기도 했다. 이런 도시로는 당시 아길라로 불린 카이레와 피사이, 사투르니아, 알시움 등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도시들은 에트루리아 인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팔레리이와 페스켄니움은 오늘날까지도 존재하며 로마인이 살고 있다. 이전에는 시쿨리 족에 속하던 곳이었지만 펠라스기 인이 세운 도시의 유적 일부가 남아 있다. 이 여러 도시에는 이전에 그리스에서 통용되던 고대 관습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예를 들면 아르고스(고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의 한 지역)의 방패와 창 같은 전쟁 무기의 모양이다. 게다가 그들은 영토를 넘어 무기를 들고 나가 전쟁을 하거나 침입을 막을 경우에는 비무장 상태인 신성한 남자를 앞장세워 평화의 조건을 제시하게 했다. 또 신전 구조와 신의 형태, 정화의식, 희생제례, 그 밖의 많은 일들이 비슷했다.


시쿨리 족을 몰아낸 이 사람들이 원래는 아르고스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팔레리이에 있는 유노 신전이었다. 이 신전은 아르고스에 있는 신전과 똑같은 형태로 건설됐다. 게다가 희생제례도 거의 유사했다. 성스러운 여인이 신성한 구역을 지켰고, ‘바구니를 옮기는 여자’라는 뜻인 카네포루스라는 명칭의 미혼 소녀가 희생제례의 초반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처녀 합창단이 조국의 노래로 유노 여신을 찬양하기도 했다.


펠라스기 인은 캄파니아 평원에서 제법 넓은 영역을 차지했다. 그들은 평원에서 야만족인 아우로니시족을 몰아내기도 했다. 평원은 매우 풍족한 목초지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낙관적인 미래의 희망을 주기도 했다.


이들은 이곳에 여러 도시를 건설했는데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고향 도시의 이름을 딴 라리사도 만들었다. 이 도시들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물론 주민은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라리사는 오래전에 버려졌으며, 오늘날에는 이름 말고는 과거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름조차도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라리사는 포룸 포필리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들은 또한 시쿨리족으로부터 다른 지역도 점령했는데, 해변지역은 물론 내륙지역을 모두 포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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