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쿨리 족의 섬 시칠리아
펠라스기 인과 원주민의 공격을 받은 시쿨리 족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아내와 자식, 그리고 금은으로 된 다른 재산을 챙긴 뒤 조국을 적에게 넘겨주고 달아나버렸다. 이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는 산악지역을 통과해 이탈리아 최남단으로 이주했다.
시쿨리 족은 가는 곳마다 쫓겨났다. 이들은 결국 바다를 건너가기로 하고 뗏목을 준비했다. 조류 상태를 잘 살핀 뒤 이탈리아에서 인근 섬으로 넘어갔다. 섬에는 이베리아 민족이면서 리구리아 인을 피해 달아난 시카니 족이 살고 있었다. 섬은 삼각형으로 생겼다고 해서 종전에는 트리나크리아라고 불렸지만 시카니 족은 그들의 이름을 붙여 시카니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섬의 면적은 상당히 넓었지만 시카니족 인구는 매우 적었다. 그래서 섬의 대부분 지역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시쿨리 족은 섬에 상륙한 뒤 처음에는 섬의 서쪽에 살았다. 나중에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됐다. 시쿨리 족의 이름을 따라서 섬은 나중에는 시칠리아라고 불리게 됐다. 이렇게 해서 시쿨리 족은 이탈리아 본토를 떠났다. 레스보스의 헬라니쿠스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기 3세대 전에, 아르고스에서 알키오네가 사제직을 맡은 지 26년 되던 해의 일이었다.
헬라니쿠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탈리아 이주민이 두 차례 시칠리아로 넘어갔다. 첫 번째 이주민은 오이노트리아 인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난 엘리미족이었다. 두 번째는 그들로부터 5년 뒤 이아퓌기에서 달아난 아우소네스 족이었다. 아우소네스 족의 왕은 시켈루스였다. 그의 이름을 따 섬을 시칠리아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라쿠사의 필리스투스에 따르면 그들이 섬으로 건너간 시기는 트로이 전쟁이 터지기 80년 전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부족은 엘리미 족이나 아우소네스 족이 아니라 리구리아 족이었다. 필리스투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부족의 지도자가 시켈루스였다. 그는 이탈루스의 아들이었다. 그의 통치기에 리구리아 인은 시쿨리 인으로 불리게 됐다. 또 리구리아 인은 움브리아 인과 펠라스기 인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났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쿠스는 두 부족이 바다를 건넌 시기를 밝히지 않으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두 부족은 시쿨리 족이었다. 시쿨리 족은 오이노트리아 인과 오스키족 때문에 쫓겨났다. 그들은 스트라톤을 지도자로 골랐다.’
반면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다르다.
‘이탈리아를 떠난 부족은 시쿨리 족이었다. 오스키 족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이다. 시기는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기 오래 전이었다.’
펠라스기 인은 넓고 비옥한 지역을 차지해서 많은 마을을 정복하거나 새로 세웠다. 이후 대단히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인구는 늘어났고 부유해졌고, 모든 면에서 번성했다.
그들은 번영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가장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 그들에게 신의 분노가 찾아왔다. 도시 중 일부는 신이 일으킨 재난으로 파괴됐고, 다른 도시는 야만족 이웃의 침략으로 무너졌다. 주민 대부분은 그리스 곳곳이나 야만족 지역으로 흩어졌다. 일부만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에 남았다.
이 도시들이 버려진 첫 번째 이유는 땅을 황폐하게 만든 가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무에는 과일이 전혀 열리지 않았고, 그나마 몇 개 달린 과일은 덜 익었을 때 떨어졌다. 곡식은 물론 가축을 키울 풀도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물은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일부는 여름에 줄어들었고 나머지는 완전히 말라버렸다.
불운은 가축은 물론 사람의 자식에게까지 미쳤다. 그들은 유산하거나 사산하기 일쑤였다. 일부는 임신한 상태에서 죽었다. 무사히 출산했더라도 장애인이 됐으며, 각종 사고로 다치기도 했다. 그래서 키우기 쉽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 특히 인생의 황금기에 있던 사람들은 흔하지 않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거나 흔하지 않은 방식의 죽음을 맞았다. 그들은 어떤 신에게 잘못을 저질렀는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희망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신탁을 구했다.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원하는 것을 얻어놓고도 약속한 것을 지불하는 일에 태만했다. 가장 가치 있는 게 아직 너희에게 남아 있다.’
펠라스기 인은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이 부족한 시기였지만 유피테르 신과 아폴로 신, 카베이리 신에게 미래의 증가분을 모두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기도는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과일과 가축만 신들에게 바쳤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레스보스의 미르실루스가 한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을 거의 그대로 옮겼다. 다만 그가 이 사람들을 펠라스기 인이 아니라 티레니아 인이라고 부른 것만 다르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펠라스기 인은 신탁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했다. 다들 어쩔 줄 몰라 서성거릴 때 한 노인이 그 말의 뜻을 추측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탁의 뜻을 놓쳤소. 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불평한다고만 생각한 것이오. 우리는 물질적인 것 중에서 과일을 아주 올바르고 적당한 방법으로 신에게 바쳤지만 신의 눈으로 볼 때는 가장 신성한 인신공양을 하지 않았소이다. 약속한 공양은 아직 남았소. 신이 정당한 몫을 받는다면 신탁은 만족하게 될 것이오.‘
일부는 노인의 말을 옳다고 생각했고, 다른 일부는 그의 말 뒤에 배신의 뜻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이렇게 제안했다.
“신에게 인신공양을 하는 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냐고 신에게 물어봅시다.”
펠라스기 인은 두 번째로 사절을 보냈다. 신은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펠라스기 인 사이에서 인신공양을 고르는 문제로 분란이 일어났다. 각 도시의 정부를 꾸려가는 행정관들은 서로 다퉜다. 나중에는 나머지 사람들이 행정관을 의심하게 됐다.
이런 이유로 무질서한 이민 행렬이 시작됐다. 신의 손에서 풀려난 광기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구성원 중 일부가 떠나는 바람에 많은 가정이 사라졌다. 도시를 떠난 사람의 친척들은 가장 소중한 친척, 친구와 헤어져서 최악의 적 사이에 남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나 여러 야만족 지역을 헤맨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됐다. 이런 일은 해마다 반복됐다. 지도자들은 젊은이들이 성인 나이에 이르면 희생물로 선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지도자들은 신에게 어울리는 희생물을 바치기를 간절히 원했고, 또 잠재적인 적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그럴 듯한 이유 때문에 도시에서 쫓겨났다.
펠라스기 인은 여러 호전적인 부족 사이에 살면서 늘 위험을 겪은 탓에 군사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전투에서 누구보다 뛰어났다. 또 티레니아 인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항해술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했다. 호구지책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한 ‘필요성’이 모든 위험한 모험에서 그들의 지도자며 감독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덕분에 그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어려움 없이 정복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로부터 티레니아 인이나 펠라스기 인이라고 불렸다. 티레니아라는 이름은 그들이 쫓겨난 지역에서 따온 것이고, 펠라스기는 그들의 오랜 기원을 기념하면서 만든 이름이다.
시인이나 역사학자가 펠라스기 인을 티레니아 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을 때 어느 누구도 똑같은 민족이 어떻게 해서 다른 이름을 갖게 됐는지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과 관련해서 투키디데스는 트라키아의 악테와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그곳의 여러 도시를 설명한다. 펠라스기의 나라와 관련해서 투키디데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들에게는 칼키스(그리스 에우보이아 섬의 주요 도시) 같은 요소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요소는 펠라스기 스타일이다. 그리고 렘노스와 아테네에 살았던 티레이나 족에 속하는 것들이다.’
소포클레스는 그의 희곡 『이나코스』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부르며 합창을 한다.
‘오 공정한 이나쿠스여
모든 물의 지배자인 바다에서 태어나
당신은 권위로 세상을 지배하도다
아르고스의 들판과 헤라의 언덕은 물론
티레네의 펠라스기 인들도’
티레니아라는 이름은 당시 그리스에 널리 알려졌다. 이탈리아 서부 지역은 모두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그 지역의 여러 나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호칭을 잃어버렸다.
펠라스기 인의 고통이 시작됐던 무렵은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기 두 세대 전이었다. 이런 비극은 트로이 전쟁 이후에도 그 나라가 거의 고려할 필요가 없는 수준으로 쪼그라들 때까지 계속 일어났다. 움브리아에 있는 중요한 도시인 크로톤만 제외하고 원주민의 땅에 세워진 다른 모든 도시, 그리고 펠라스기 인의 모든 도시는 파괴됐다. 크로톤은 고대의 형태로 오랫동안 보존됐다. 최근에야 이름과 중요성에 변화가 생겼을 뿐이다.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이며 코르토니아라고 불린다.